[비하인드 스토리] 동박삭 편: 제2회 재치로 황제에게 직언하다
(사진설명: 동박삭의 목각상)
제2회 재치로 황제에게 직언하다
한무제는 무공(武功)을 중히 여기는 황제라 한나라 조정의 주요 신하들은 모두 무공에 의해 발탁되었으며 동방삭처럼 말만 잘하는 문인은 순전히 즐기기 위해 등용되었다. 하지만 동방삭은 황제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기회를 봐서 황제에게 간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사냥을 즐기기 위해 가로 세로 몇 백 리(1리=0.5km)에 달하는 관중(關中)의 농경지를 큰 규모의 황실 정원으로 꾸몄다. 한무제는 독단적이고 폭압적이었으며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라 누구든 감히 어명을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무제의 정원 조성에 문무대신들은 찬성하거나 아예 침묵했다. 오직 동방삭만이 나서서 용감하게 간언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다시 되살릴 역사들이 있습니다.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녹대(鹿臺)를 축조한 것으로 인해 제후들의 역모를 유발했고 초영왕(楚靈王)은 장화대(章華臺)를 쌓아 민심을 잃었으며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아방궁(阿房宮)을 지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지난 날을 잊지 않아야(前史不忘) 훗날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後事之師).”
“짐은 인부도 모집하지 않고 물자도 낭비하지 않았소. 이 하늘 아래(普天之下)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는데(莫非王土) 짐이 정원을 조성한 것이 무슨 큰 일이오?”
한무제의 말에 동방삭이 다시 아뢰었다.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한 관중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잘 사는 기반입니다. 만약 이런 땅을 정원으로 만들면 반드시 위로 나라에 해를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손해를 주게 됩니다. 지금 호원(虎園)과 녹원(鹿園)을 조성하기 위해 백성들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백성들의 집을 허물어 백성들이 몸 둘 집을 잃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조정을 원망하고 있는데 어찌 민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동방삭은 한무제가 침묵하자 계속 말했다.
“겸허하고 신중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고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면 하늘은 화를 내릴 것입니다. 폐하의 궁궐이 높지 않습니까? 정원이 넓지 않습니까? 왜 상림원(上林苑)을 또 조성해야 합니까?”
한무제는 상림원을 조성하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지만 동방삭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황금 백 근을 하사한 동시에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시켰다.
한무제에게는 소평군(昭平君)으로 책봉된 생질이 있었다. 소평군은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황제의 총애를 믿고 장안에서 제멋 대로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는 유명한 불량 소년이었다. 한 번은 그가 취중에 살인을 해서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공주의 아들이고 황제의 생질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정위(廷尉)는 감히 법에 의해 소평군의 죄도 묻지 못하고 황제의 지시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한무제는 소평군이 누이동생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앞장 서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신하들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한무제는 공개적으로 소평군의 죽을 죄를 사면하지는 못하고 다른 수를 생각했다. 그는 정위를 불러 놓고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짐의 누이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한무제의 이 말은 누가 들어도 하나밖에 없는 공주의 아들을 사면하라는 뜻이었다. 한무제의 속마음을 읽은 문무대신들이 이 기회에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너도 나도 나서서 소평군을 대신해 사정했다.
이 때 동방삭이 나서서 한무제에게 축하를 표시했다.
“성군께서 법을 엄격하게 지키셔서 상을 내림에 원수를 피하지 않으시고 벌을 주심에 가족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폐하께서 이토록 사심이 없이 공정하시니 나라도 백성도 너무 행운입니다!”
동방삭의 칭송을 들으니 한무제는 오히려 생질을 봐줄 수 없어서 정위에게 법에 의해 소평군을 처벌하라고 말했다.
소평군이 처벌을 받은 것으로 인해 한무제는 자신이 아주 위대하다고 생각해 동방삭에게 뽐냈다.
“동방 대부, 대부가 보기에 군주로서 짐은 성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동방삭은 한무제가 칭송의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라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성덕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초과하십니다. 조정을 보십시오. 인재가 넘치고 현인이 가득합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신하들이 폐하를 보필하니 폐하께서 어떻게 성군이 아닐 수 있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승상으로 하시고, 공자(孔子)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강태공(姜太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필공고(畢公高)를 습유(拾遺)로, 변엄자(卞嚴子)를 위위(衛蔚)로, 고도(皐陶)를 대리사경(大理寺卿)으로, 후직(后稷)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이윤(伊尹)을 소부(少府)로, 자공(子貢)을 사절(使節)로, 안연(顔淵)을 박사(博士)로, 자하(子夏)를 태상경(太常卿)으로, 백익(伯益)을 우부풍(右扶風)으로, 계로(季路)를 집금오(執金吾)로, 계(契)를 홍려경(鴻胪卿)으로 용봉(龍逢)을 종정(宗正)으로, 백이(伯夷)를 경조윤(京兆尹)으로, 관중(管仲)을 풍익군수(馮翊郡守)로, 노반(魯班)을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중산보(仲山甫)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신백(申伯)을 태부(太仆)로, 계찰(季札)을 수형도위(水衡都尉)로, 백리해(百里奚)를 전속국(典屬國)으로, 유하혜(柳下惠)를 대장추(大長秋)로, 손숙오(孫叔吾)를 제후상(諸侯相)으로, 사어(史魚)를 사직(司直)으로, 공부(孔父)를 첨사(詹事)로, 거원(蘧瑗)을 대부(太傅)로, 경기(慶忌)를 기문(期門)으로, 자산(子産)을 군수(郡守)로, 하육(夏育)을 정관(鼎官)으로, 후예(後羿)를 의장관(儀仗官)으로, 송만(宋萬)을 사도후(司道侯)로 두셨습니다…”
동방삭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32명의 현인을 모두 한무제의 대신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무제는 기쁘기도 하고 스스로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로써 한무제는 성군에 비해서 자신이 못한 점을 찾아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성군이 되려면 아직도 더 많이 노력해야 함을 깊이 느꼈다.
하지만 한무제는 겸손한 군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문무대신들 중 사실 고대의 현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재능이 뛰어나고 언변도 강한 일부 선비들은 사실 옛 사람을 초과한다고 까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든 한무제가 동방삭의 말을 반박했다.
“지금 짐의 대신들 중 공손홍(公孫弘)과 주부언(主父偃), 동중서(董仲舒), 사마상여(司馬相如), 주매신(朱買臣), 엄조(嚴助), 급암(汲黯), 사마천(司馬遷) 등은 박식하고 사부(辭賦)에도 능하고 말솜씨도 뛰어난데 그대는 어떤 분야에서 이들과 비할 수 있다고 보시오?”
동방삭이 웃었다.
“저에게는 그들의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와 털로 가득 덥힌 얼굴, 두터운 입술, 길게 뻗은 목, 뻗어 나온 아래 턱, 엉거주춤한 안짱다리, 큰 엉덩이, 그리고 뱀이 지나간 듯한 발자국과 절름발이 같은 걸음새만 보입니다. 저는 비록 보 잘 것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이런 특징은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동방식의 우스갯소리에 한무제도 즐겁게 따라 웃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