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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06월29일(일요일)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 [쿠푸왕의 피라미드=고대 이집트로의 여행] 관람일정
탐방지 :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 [쿠푸왕의 피라미드=고대 이집트로의 여행]
[르포] '진짜' 몰입이란 이런 것, 쿠푸왕의 피라미드 VR 전시
김수진 기자 (Eonn@inven.co.kr)
INVEN 기사 등록 : 2025-04-11
지난 3월, 흥미로운 전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VR을 활용한 몰입형 탐험 전시, 쿠푸왕의 피라미드였죠.
‘기존 VR 경험의 제약을 파격적으로 넘어서는 몰입감 있는 체험’, ‘300평에 이르는 공간을 자유롭게 탐험’, ‘문화와 오락을 넘나드는 새로운 형식’. 그동안 VR을 활용한 게임, 혹은 간단한 전시만 경험했기에 해당 전시의 소개 문구가 갑자기 확 끌리더군요.
그래서 직접 예매 후 전시가 열리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약 45분가량 진행된 피라미드 탐험은 그야말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유익하기까지 합니다. 혼자 와서 끝나고 전시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프랑스 엑스큐리오가 제작한 쿠푸왕의 피라미드 전시는 2022년 파리에서 첫 공개 됐습니다. 가상 현실을 통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기자의 대피라미드 공간을 탐험할 수 있는 체험형 전시로, 이번 서울 전시는 바이브 포커스3를 착용한 뒤 직접 걸어 다니며 거대한 피라미드와 그 이상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전시는 한 팀이 출발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다음 팀이 출발하는 방식이었는데, 원활한 체험을 위해 타임 당 인원이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참여한 시간대는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이미 앞에 여러 팀이 출발, 뒤에도 연이어 다른 팀들이 출발할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찾았습니다.
처음 기기를 착용하고 나면, 튜토리얼 개념의 안내가 흘러나옵니다. 물론 상호작용을 하거나 조작하는 요소가 없기에, 어려울 건 없었습니다. 어느 공간까지 이동해야하고, 혹시나 길을 잃으면 어떻게 진행 상황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뭐 이 정도의 안내입니다.
그리고 화면이 암전되고, 눈앞이 밝아지면 우리는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해 있죠. 그렇게 본격적인 탐험이 시작됩니다. 놀라운 건 눈앞의 그 거대한 피라미드와 카이로의 모습입니다. 비록 스탠드얼론 VR이라 매우 선명한 화질은 아니지만, 시선이 닿는 모든 곳, 360도 모든 방향의 전경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요.
전시는 단순히 피라미드를 걸어다니며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45분의 탐험을 아우르는 스토리가 존재하죠. 평범하게 가이드 모나와 함께 기자의 대피라미드,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관람하러 들어간 뒤, 이집트의 신 바스테트를 만나 시공간을 넘으며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이 스토리라인을 따라 자연스럽게 피라미드의 건설 방식부터 그 내부의 공간,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 피라미드 및 쿠푸왕과 관련된 내용, 마지막으로 미라를 만드는 방식과 그 이후의 이야기 등 다양한 콘텐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구현된 가상 공간은 실제 우리가 이집트와 피라미드 내부에 있는 듯 몰입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죠.
이 경험이 놀라울 수 있었던 건, 300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이동 때문입니다. 전시는 HTC 바이브의 위치 기반 엔터테인먼트, LBE 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전시가 진행되는 거대한 공간에서 다수의 관람객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죠.
LBE 기술은 사용자의 움직임을 보다 자연스럽게 반영하며, VR 공간 내에서 실제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극대화합니다. 관람객은 단순히 가상의 화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공간에서 이동하며 탐험하고,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죠. 저는 혼자 관람했지만, 최대 6명이 한팀이 되어 탐험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 팀이 해당 공간에서 동시에 체험을 진행하기에 동선이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긴 합니다. 탐험 역시 매번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동 후 특정 공간을 보고, 또 이동하고 관람하고, 그러다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야 할 시 암전 후 장면이 변환되는 방식입니다. 즉, 엄청나게 많은 이동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한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실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이를 납득시키기 때문이죠. 좁은 통로나 사각의 방, 피라미드 꼭대기, 나일 강 위를 떠 있는 배 등 특정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스토리를 진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쿠푸왕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누워있는 관 안을 직접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좀 더 멀리서 신관들의 제를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360도로 펼쳐진 기자 평야의 파노라마 뷰를 직접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관람객이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을만한 구간은 직접 하나하나 이동하며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연출은 많은 이동 없이도 상황에 크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죠. 실제로 제 앞 팀의 경우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구간부터 마지막까지 일행 두 명이 계속해서 탄성을 터트리더군요.
모든 체험이 끝난 뒤 기념품 샵에서 창 너머로 체험 공간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생각보다도 더 넓은 공간에 놀라긴 했습니다. 그동안 접해온 대부분의 VR 콘텐츠가 한정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 혹은 체험 정도였기에 이렇게까지 거대한 가상 공간을 경험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웠을 수도 있어요.
인상깊었던 건, 전시 자체의 완성도입니다. 매우 사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가상 공간, 45분을 꽉 채운 스토리 라인, 그리고 섬세한 고증을 거친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들이 합쳐져 풍부하게 하나의 콘텐츠를 체험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었거든요.
VR 게임처럼 직접 뭔가를 조작하거나, 상호작용이 있다거나, 스릴 넘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편안하게 보고 듣고 걷는 것만으로도 ‘탐험’이라는 이 전시의 목적을 확실히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체험이 끝난 뒤 만난 다른 관람객 역시 “VR을 경험한 것 자체가 처음인데, 진짜 이집트를 갔다 온 것 같아서 놀라웠다”고 할 정도로 만족감을 표했고요.
물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다른 사람들과의 마주침입니다. 체험 중 앞이나 뒷팀과 가까워질 경우, 투명한 마네킹과 같은 실루엣이 보이게 되는데요. 타임 당 인원이 정해져 있지만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다 보니 연출이 길어지는 구간에서 다른 팀들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실루엣이 보일 정도로 서로 근접해 있을 경우에는 체험 속 음향을 뚫고 다른 팀들의 목소리도 환하게 들리다 보니 몰입감이 확 깨지게 되더군요. 사람과 부딪힐까 봐 움직임에도 제약이 생기고요. 애초에 출발 텀을 좀 더 길게 두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VR 기기를 처음 써보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가 조금 부족한 듯싶었습니다. 저 역시 초점을 맞추기 위해 기기 자체를 조금씩 이동시키라는 말만 들었을 뿐, 가운데 다이얼을 조정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 300평의 매우 넓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체험
개인적으로 이런 체험이 VR이 줄 수 있는 좋은 경험의 예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단순히 가상 현실을 사실적인 화면으로 제공하는 게 끝이 아니라, 사진이나 책으로, 그냥 영상으로만 보던 문화적인 공간을 직접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 말이죠. 그것도 흥미로운 연출, 그리고 스토리와 함께요.
덕분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모나의 마지막 인사가 서운할 정도로, 출구 표시로 걸어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깊이 몰입해서 재미있게 전시를 즐겼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전시가 단순히 재미만 있는 건 아닙니다. 하버드대 이집트학 교수 피터 데 마뉴엘리안의 철저한 고증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덕분에 흥미로운 탐험 중 마주하는 모든 정보는 건축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검증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전시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9월 28일까지 진행됩니다. 시간당 인원은 정해져 있으며, 티켓은 인터넷을 비롯해 현장에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탐방코스: [삼각지역 12번 출구~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쿠푸왕의 피라미드=고대 이집트로의 여행]을 관람~삼각지역 12번 출구]
탐방일 : 2025년06월29일(일요일)
날씨 : 비가 내린 날씨 [서울 용산구 용산동1가 최저기온 23도C, 최고기온 2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30분 소요)
12:00~12:30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삼각지역 12번 출구로 나옴 [30분 소요]
12:30~12:40 삼각지역 12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 번지에 있는 용산전쟁기념관으로 이동 [10분, 580m 이동]
[키오스크를 통해 [쿠푸왕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로의 여행] 전시의 해당 시간대 잔여석에 한해 현장 발권도 가능]
12:40~13:50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쿠푸왕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로의 여행]을 관람
[〈쿠푸왕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로의 여행〉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기자 피라미드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획 전시다. 2025년3월27일부터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세계 20개 도시에서 150만 명 이상이 체험한 이번 전시는, 고대 이집트 유산에 대한 최신 연구와 첨단 기술을 결합한 ‘몰입형 탐험’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현장에서는 전시 기획 배경과 몰입형 VR 기술의 특징, 연출 의도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으며, 현장에서는 제작사 Excurio와 주최사 디커뮤니케이션, UNQP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시의 철학과 메시지를 직접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전시 관람을 넘어, 4,500년 전 고대 이집트로의 감각적 시간여행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관람객은 VR 헤드셋을 착용한 채 약 300평 규모의 전시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기자의 대피라미드 꼭대기부터 내부 복도, 매장실, 여왕의 방, 나일강 장례식 장면까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직접 걷고 들으며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몰입형 탐험 구조가 특징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하버드대 이집트학 교수 피터 데 마뉴엘리안의 연구를 기반으로, 실제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적 사실을 철저하게 고증하여 구성되었다. 특히 기자 네크로폴리스와 쿠푸 파라오의 삶과 죽음, 사후세계에 대한 이집트인의 관념을 실제 탐험처럼 따라갈 수 있도록 재현해낸 것이 인상적이다.
Excurio가 개발한 독자적인 기술 플랫폼은 수많은 관람객이 동시에 체험해도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가족 단위 관람객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점에서 문화 콘텐츠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관람 중 주변 관람객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은 기존 VR 체험에서 흔히 느껴지는 고립감을 극복한 중요한 차별점이다.
이번 한국 전시는 Emissive의 VR 프로젝트 브랜드였던 Excurio가 독립 브랜드로 전환한 이후 진행되는 국내 첫 프로젝트로, 세계 유수 문화기관에서 흥행을 이어온 몰입형 탐험의 흐름을 한국 관람객에게도 선보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Emissive는 이전에도 와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VR 문화예술 전시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바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전시는 2025년3월27일부터 용산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30,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24,000원이다. 만 65세 이상, 유공자,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위한 특별할인 요금도 마련되어 있다. 인터파크, 네이버, 카카오 등에서 예매가 가능하다.
고대 문명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이례적인 기획전인 만큼, 역사와 기술, 예술이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출처 : 문학뉴스(http://www.munhaknews.com)]
[쿠푸 왕의 피라미드(기자의 대피라미드)
최근 수정 시각: 2025-04-28 02:25:09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연도 : 1979년
등재기준 : (i)[2], (iii)[3], (vi)[4]
지정번호 : 86
목차
1. 개요
2. 역사
3. 축조
3.1. 건축 주체
3.2. 건축 방법
4. 형태
4.1. 입구
4.2. 왕의 방
4.2.1. 화강암 석관
4.3. 대회랑
4.4. 왕비의 방
4.5. 지하 방
4.6. 태양 방주
5. 미스터리 및 음모론
6. 대중매체 속 대피라미드
1. 개요
쿠푸 왕의 피라미드(Pyramid of Khufu) 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الهرم الأكبر, The Great Pyramid of Giza)는 이집트 제3의 도시인 기자 소재의 피라미드로,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 쿠푸 왕의 무덤이다. 일대 피라미드 3개 가운데 가장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기자와 이집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피라미드로서 '대(大) 피라미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축조시기는 기원전 26세기으로 2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되었는데, 하술하듯 당시에는 외벽이 반죽한 백색 석회암으로 덮여 있어 더욱 완전한 각뿔 형상이었으며,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디온'(캡스톤)을 씌워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대 이집트 왕조의 쇠퇴 이후 여러 차례 뜯겨 건축 자재로 전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링컨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3800년 넘게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들은 기원전의 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이미 현대인이 생각하는 수준의 고대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스트라보,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 등이 대피라미드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소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곳이며, 오늘날에도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집트에 막대한 외화를 벌어주는 랜드마크이자 관광지로, 매년 147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간다.
피라미드의 높이는 지어질 당시에는 146.6m였으나 외벽의 석회암 석재가 뜯겨나가면서 높이가 138.5m 정도로 감소했다. 대부분은 석회암이나, 일부는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사면의 경사는 약 51°50'40"이다. 바닥면의 길이는 230.33m이며 부피는 260만 m3에 달한다. 무게로만 치면 600만 톤에 달하는, 암석 230만 개가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내부에는 방 3개가 있다. 왕의 방과 왕비의 방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왕의 방 내부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빈 관이 하나 있다. 나머지 방 하나는 피라미드 하부 기단암을 파고 만들었는데 완공되지 않은 듯하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태양 방주를 보관하는 신전과 장제전 두 곳이 있어 석조 보도로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잔해와 터만 남았다.
2. 역사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6세기 이집트 고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쿠푸 왕의 재위기간에 지어졌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상세한 축조년도를 특정하기는 힘들며, 고고학계에서는 대략 기원전 2700년과 기원전 2500년 사이의 어느 즈음에 대피라미드가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건축 목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념비, 정교한 천문대 등 다양한 학설들이 쏟아져나왔지만, 학계에서는 현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쿠푸 왕의 무덤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긴다.
쿠푸 왕 사후 카프레, 멘카우레 등의 후계 파라오들이 그의 피라미드 곁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황금기였던 제4왕조가 끝난 이후, 더이상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지어지지 않았다. 후대의 중왕국 및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잡아먹는 피라미드 대신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파서 자신의 관과 미라를 안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원전 5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 피라미드를 관광하고 돌아갔으며, 그가 집필한 기록이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헤로도토스는 곁의 이집트 신관 및 관리들의 증언을 취합해 자신의 저서인《역사》에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대피라미드가 지어진 지 2천 년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써놓았는데, 정작 쿠푸는 신왕국보다 몇천 년 전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집트 백성들을 강제노역장에 끌고 가고, 딸에게 매춘을 시켜 그 돈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폭군으로 쿠푸 왕을 묘사했다. 당시 민주정 체제를 채택하고 전제군주를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그리스 출신의 헤로도토스는 거대한 대피라미드를 지으려면 틀림없이 평민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가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점차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피라미드는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파라오들이 자신의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피라미드의 외벽 마감재들을 떼어가긴 했지만, 파라오를 제외하고는 남의 무덤에서 대놓고 돌을 채석해가는 것을 처벌했기에 원형 그대로는 아닐지언정 나름대로 보존되었었다. 하지만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피라미드가 말 그대로 질 좋은 채석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신전을 축조하기 위해 피라미드에서 돌들을 캐어갔고, 대피라미드는 차츰차츰 그 빛을 잃어갔다. 기원전 25년, 이집트가 로마 공화국에 병합된 직후에는 스트라본이 피라미드를 방문해 내부를 관람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에는 대 플리니우스가 피라미드를 보고 '파라오가 제 보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들었을 것', 그리고 '피라미드 주위에 벽돌로 만들어진 귀족들의 집이 있었고 그 곁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라는 감상평을 썼다.
중세시대에 들어서는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요셉의 곡물 창고라는 민중 소문이 널리 퍼졌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이집트의 기근을 예언한 요셉이 미리 막대한 곡물을 쌓아두기 위해 창고들을 지었다는 <창세기>의 구절에서 유래한 이야기였다. 이같은 근거 없는 속설은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다스렸던 2세기부터 6세기까지 쭉 유지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라쉬둔 칼리파국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피라미드와 관련된 소문들이 엄청나게 부풀려졌다. 기본적으로 무슬림들은 피라미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바스 왕조의 제7대 칼리파였던 알 마문은 직접 피라미드의 벽을 뚫고 내부의 방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피라미드 내에 파라오가 고대 이집트의 모든 비밀을 써 놓았다는 말도 있었고, 우물을 통해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 멋진 탐험을 펼친 사나이에 대한 전설도 떠돌았다. 중세시대가 끝날 즈음에는 내부의 박쥐나 날짐승들 때문에 귀신 들린 장소로 유명해졌다.
여담이지만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알 마문은 대피라미드 곳곳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알 마문은 외벽에 시작 포인트 총 7개를 잡아 굴을 여럿 뚫었고, 석회암을 쉽게 부수기 위해 불을 지펴 가열한 뒤 차가운 식초를 들이부어 암석을 깨버리는 등 보물을 찾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심지어 벽을 부수기 위해 공성용 병기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1798년에는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공화국군과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격돌했다. 나폴레옹이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다음, 1798년 7월 21일에 피라미드에서 약 9마일 정도 떨어진 엠바베 마을에서 오스만 대군과 큰 전투를 벌인 것이다.(엠바베 전투) 프랑스 군대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오스만 군대는 황급히 퇴각해 남쪽으로 쫒겨나야만 했다. 역사상 이 전투를 '피라미드 전투'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대피라미드가 보이는 위치에 프랑스 군대를 정렬시키고 사기를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제군, 이 피라미드 위에서 4천 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8년 이집트 원정 당시 벌어진 피라미드 전투 시작 연설
이후 근현대까지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남았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집트에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주는 효자 건물인 셈이다. 가끔씩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자들이 피라미드가 우상숭배의 상징이라면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긴 한데, 대피라미드가 벌어들이는 관광수입과 그 상징성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군부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다. 대피라미드 덕분에 간접적으로 상당한 외화벌이를 하는 이집트 국민들도 이집트에서 관광수익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피라미드 파괴 요구에 대해서는 정신 나간 헛소리로 취급한다. 애당초 《쿠란》에서도 무함마드 이전, 즉 이슬람 등장 이전 시대의 타 종교 건축물들은 파괴하지 말라고 써 있기 때문에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그렇듯이 피라미드 파괴를 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전통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들이다.
3. 축조
3.1. 건축 주체
헤로도토스는 대피라미드를 지을 때 쿠푸가 노예 20만 명을 징집해서 지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노예를 통한 토목 공사라는 고대인의 자연스런 추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설은 오랜 시간 서구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20세기까지만 해도 대피라미드는 노예의 피땀이 들어간 건축물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보급되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념과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농부(자유민)들이 정부와 근로 계약을 맺고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이들이 동원된 이유는 나일 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한다는, 일종의 공익 사업을 겸한 것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몇몇 피라미드에 긁적여놓은 낙서에서는 '오늘은 돈을 얼마 받았고 생필품으로 뭐가 제공되었다'고 적혀있다든지, '감독관과 싸워서 며칠 동안 안 나갔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서 결국 나갔다'고 투덜거리는 듯한 낙서가 발견되었으며,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석판 중에는 노동자들의 근태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결근 사유로써 과음으로 인한 숙취까지 허용되었다. 이들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면, 노예가 아닌 자유민 혹은 반자유민 성격의 노동자가 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고고학자이자 전 이집트 유물부 장관 자히 하와스는 피라미드 주변에는 노동자들의 공동묘지 유적이 다수 발굴되며, 노예였다면 왕의 무덤 옆에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 해설하였다. 또한 무덤 벽에는 자신을 '쿠푸 왕의 친구'라고 쓴 낙서까지 발견되었으며, 이는 노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급료로 보리 빵과 맥주가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는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 최초의 파업'은 고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이 기록은 기자의 피라미드에 대한 내용은 아니고 기원전 12세기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시절 파라오의 신전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인데,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기자의 대피라미드에서도 같은 식의 노동 쟁의가 가능했을 거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문화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이 있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피라미드 공사에 필요한 인부 수를 지나치게 올려 잡았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 학자들이 다시 분석해본 결과,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는 3만 6천~ 5만여 명 정도 인력이면 충분하고 20만 명이나 되는 대인력이 투입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집트학자 미로슬라프 베르너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숙련 인력 약 5천여 명과 나머지 막일꾼 3만여 명 정도면 대피라미드 하나 짓기는 거뜬하고, 서너 달쯤 교대로 일하면서 하루에 빵 10개와 맥주 1병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10명 정도씩 조를 나누어 조장과 부장을 정하고 각자 정해진 작업만 해도 10년 정도면 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다른 이집트학자 마크 레너가 한 연구를 봐도 많아봤자 4~5만 명 남짓한 인부들이 한꺼번에 작업하면 충분히 이른 기일 내에 피라미드를 완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건축비용은 대략 1조 원 내외가 된다. 사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페르시아군 규모를 수백만으로 뻥튀기하는 등 다른 데서도 인구수를 뻥튀기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3.2. 건축 방법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서는 돌들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대피라미드는 남쪽으로 몇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채석장에서 바로바로 석재를 공급했다. 다만 외벽에 쓸 고급 석회암의 경우 일부러 카이로의 채석장에서 돌을 채석한 다음 나일 강의 배에 옮겨싣고 왔다. 현대적인 채석 장비가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석재를 떼어낼 때도 상당히 힘을 쏟아야 했다. 인부들에게 주어진 도구는 철보다 한참 무른 구리로 만들어진 끌과 톱뿐이었다. 인부들이 일단 톱으로 미친듯이 돌을 줄질하면 홈이 약간 생긴다. 그 홈 사이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끼워넣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부으면 쐐기가 물을 먹어 부피가 팽창한다. 이 과정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쩍 소리가 나면서 단단한 화강암이 깨져 나가는데, 채석장에서 이 화강암을 1차로 대강 다듬은 다음 공사 현장으로 옮겼던 것이다.
공사현장으로 옮기기도 문제였다. 평균 무게가 몇 톤에 나가는 거대한 암석을 공사현장으로 낑낑대며 옮기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래에 통나무를 굴리기에는 사막 기후인 이집트에서 목재가 지나치게 귀했으므로, 이집트인들은 대신 썰매를 이용했다. 나무로 만든 썰매를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암석을 올린 다음 장정 몇십 명이 달라붙어 줄을 끌어서 옮겼다. 윤활 작용을 위해서 물을 중간중간 썰매 아래쪽에 부어주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피라미드를 쌓을 때 목재 골조를 사용했을 거라는 설, 임시 가벽을 쌓았을 거라는 설 등 다양한 학설들이 존재했지만 현대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건 경사로설이다. 이 경사로설 사이에도 어떤 경사로를 이용했을 지 학설이 분분한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자형 경사로였다는 것이 통설이었는지라 이 시기 출판된 역사서나 학습만화를 보면 이렇게 묘사한 책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유력하다. 나선형으로 피라미드를 빙빙 둘러가며 경사로를 쌓아 그 위로 암석을 옮겨 쌓은 다음, 피라미드가 완성되면 경사로를 싹 치워버렸을 거라는 학설이다. 그나마 가장 경제적이고 필요한 시간이나 인력도 적어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 외에도 내부 경사로설, 대형 직선 경사로설 등의 이론도 존재하는데, 내부 경사로설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고 있고 대형 직선 경사로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학계에서 딱히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피라미드의 기본 암석들을 쌓는 일들이 다 끝나면, 마지막 단계는 석회암을 가공하는 것이었다. 내부의 암석들과는 다르게 외벽의 석회암들은 모래로 갈아서 반질반질하게 윤을 냈다. 이렇게 가공한 석회암을 피라미드 외벽에 입히면 태양빛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황금 등으로 도금한 '피라미디온'을 올려서 마감했다. 하지만 비싼 귀금속으로 만들어졌던 만큼 제일 먼저 도굴당했으며,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금속 피라미디온이 사라진 것은 주변의 피라미드들도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유물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는 이집트 쇠퇴기에 돌로 깎아 도굴 가치가 없었던 다른 피라미디온을 통해 그 형상을 추정한다.
4. 형태
대피라미드의 단면도.
1번은 공식 입구, 2번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도굴꾼들이 파낸 입구, 3, 4번은 정식 입구에서 들어와 내려가는 하강 통로, 5번은 지하 방, 6번은 올라가는 상승 통로, 7번은 왕비의 방과 환기구, 8번은 수평 통로, 9번은 대회랑, 10번은 왕의 방과 환기구, 11번은 석재 환기구. 단 11번 통로의 용도에 대해서는 현재도 말이 많은데, 대회랑을 돌로 막은 후 인부들이 내려갔을 통로라는 설부터 단순히 부실공사로 인한 틈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피라미드는 암석 총 230만 개로 이루어졌다. 개중 석회암이 550만 톤, 화강암이 8천 톤, 회반죽 5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는 지어진 직후에는 백색 석회암으로 외장재를 덮어놓아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피라미드를 이루는 돌들 사이사이에는 회반죽을 발라 고정했고, 겉면을 사포나 모래 등으로 문질러 윤이 나게 만들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는 캡스톤을 얹어 마감했다. 대피라미드의 피라미디온은 이미 그 상징성 혹은 금붙이 때문에 기원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건물을 짓거나 자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손질이 한 차례 끝난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골라 빼가면서 현재의 거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1303년에는 크레타 섬 인근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피라미드 외벽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고, 맘루크 왕조의 역대 술탄들이 카이로를 지으려 피라미드 외벽의 석재들을 끝없이 빼갔다. 마지막으로는 19세기 이집트 왕국의 창업군주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알라바스터 모스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대피라미드에서 막대한 석회암을 가져갔고 현대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의 돈을 빼오고 있다.
4.1. 입구
물론 관광객이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려면 티켓을 추가로 구매해야 한다
피라미드 입구는 북쪽 면, 피라미드면의 중심 축에서 동쪽으로 15m 정도 벗어난 지점 13층계 정도 높이에 있다.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가 쌍을 지어 맞대어 서있는 입구로, 원래는 거대한 암석으로 막혔으나 현재는 모조리 파괴되어 달려있던 문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입구 근처에 가보면 수많은 낙서들이 가득하다. 낙서들은 대부분 근현대 들어서 적힌 것들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1842년 프로이센의 이집트 원정을 기념해 새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기념용 상형문자 등이 있다.
정식 입구는 여기지만 관광객들이 들어가는 입구는 따로 있다. 관광객들은 9세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파놓은 통로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이 입구는 5층계 정도에 있고 너비는 상당히 좁다. 이 입구로 들어가 약간 아래로 경사진 도굴용 통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정식 입구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내부 복도와 연결된다. 이 입구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 금화 몇 개와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 알 마문이 몰래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된다. 피라미드에서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인부들이 실망할까 우려한 알 마문이 미리 금화 몇 개를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대피라미드 비밀 통로?…'미지의 공간' 찾았다" JTBC 2023. 3. 3. 보도
2023년 2월경에는 대피라미드 정문 근처에서 새로운 복도형 공간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4.2. 왕의 방
대피라미드 중심부에 위치한 방.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곳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크기는 10.5m × 5.2m에 높이는 5.8m이다. 천장을 포함해 모조리 거대한 화강암 암석들로 만들어졌으며 위쪽에는 하중을 받치기 위해 층층이 쌓인 화강암들이 막대한 압력을 분산시킨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큰 압력을 몇천 년에 걸쳐 지탱하다 보니 지붕의 화강암들 모두에 2.5cm에서 5cm 정도 금이 쩍쩍 갈라졌다.
석실의 벽에는 제4왕조의 전통에 따라 그 어떠한 상형문자나 장식도 새기지 않았고, 벽을 이루는 암석의 뒤쪽은 손질되지 않았다. 실제 왕의 방인지는 알 수 없고 임의로 붙여진 명칭이다. 석실의 북쪽과 남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얕은 구멍이 1개씩 나있는데, 이를 '환기구'라 부른다. 남쪽 환기구는 대략 45도 각도로 외부까지 통한다. 현재는 습기 제거를 위해 이 구멍 둘 다에 환기기구를 설치했다.
환기구의 의도나 위치를 가지고 여러 말이 많았다. 예전에는 신비주의 학자들이 환기구가 별자리나 특정 천체를 가리킨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아니라고 밝혀졌다. 남쪽 환기구 통로는 약간 휘어 있고, 북쪽 환기구 통로는 어떤 각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꼬여 외벽으로 통하기 때문. 이집트인들이 특정 천체를 가리키기 위해 이 환기구를 지었다면 곧은 일직선으로 만들었을 것이므로 현재는 거의 폐기된 학설이다.
4.2.1. 화강암 석관
왕의 방 내부에 자리한 큼직한 화강암으로 제작된 관. 중세 시대에 발견되었을 때 이미 모조리 도굴당한 상태라 그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토록 정교한 피라미드의 관치고는 제작 당시 표시한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마감도 끝나지 않은 등 미완성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2.28m × 0.98m × 1.05m의 사이즈에 두께는 15cm이다. 내부의 안치 공간의 크기는 1.98m × 0.68m 정도의 사이즈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평균 신장을 고려했을 때 왕의 미라가 넉넉하게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관의 모양은 고왕국 시대의 전형적인 관의 모습으로, (현재는 사라진) 위쪽 관뚜껑을 고정하기 위해 구멍 3개를 뚫었다. 또한 관의 크기는 왕의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보다 약간 더 크다. 따라서 방에 천장이 얹히기 이전, 즉 공사를 하면서 관도 함께 놓였다는 뜻이 된다.
4.3. 대회랑
관광객용 입구를 지나 상승 통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나타나는 거대한 규모의 회랑. 길이는 46.68m이며 높이는 8.6m에 이른다. 들어가는 기단부의 폭은 2.1m로 꽤나 넉넉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벽이 경사지게 들어오는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위쪽 부분은 폭이 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목재로 계단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회랑의 천장은 벽보다 약간 더 경사진 모습으로 돌들이 맞대어져 있는데, 이는 대회랑에 가해지는 엄청난 하중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워낙에 건축학적으로 잘 만들어 놓은 장소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대회랑을 이집트 건축의 기념비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참고로 대회랑의 끝 동쪽 벽에는 피라미드 최하단의 방으로 향하는 조그만 터널이 있으나 물론 사람이 지나갈 만한 크기는 아니다. 대회랑을 지나면 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 피라미드 내부는 매우 덥다.
4.4. 왕비의 방
대피라미드 중심부에 위치한 방. 왕비의 방 역시 실제 왕비의 방인지는 알 수 없으며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개 중 중간에 있으며, 크기는 5.8m × 5.2m다. 뾰족하게 경사진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높이는 6.3m이다. 정식 입구로 들어간 후 하강 통로를 지나 대회랑으로 올라가지 않고 수평 통로를 따라 쭉 이동하면 그대로 왕비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 왕비의 방으로 들어가는 수평 통로는 폭 1m, 높이는 1.17m에서 1.68m 정도로 상당히 낮고 좁아 이동하기 불편하다.
고고학자들은 왕의 방에 있는 것처럼 왕비의 방에도 환기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방을 샅샅이 조사했고, 결국 방 가까이에 있는 환기구 2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왕비의 방의 환기구는 구리 손잡이가 달린 석회암 덩어리로 막혀 있었고, 다른 쪽 끝 역시 외벽 바깥으로 뚫려있지 않았다. 2011년에 한 고고학팀이 스네이크 카메라 기술을 이용해 환기구를 막은 석회암 덩어리를 파내본 결과, 붉은색 염료로 상형문자가 새겨진 좁다란 방을 찾았다고 한다. (현재는 출입불가)
4.5. 지하 방
피라미드에 있는 방 3개 중 유일하게 기반암을 파고 들어가 설치된 방으로 지면 27m 아래에 있다. 대략 8.4m × 14.1m 정도의 투박한 직육면체 공간으로, 높이는 4m 정도로 꽤나 크다. 왕의 방이나 왕비의 왕과는 달리 확실히 미완성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방이기도 하다. 입구는 동쪽 벽 쪽에 나있는데 입구와 멀어질 수록 완성되지 않은 티가 난다. 그래서 입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벽의 경우에는 천장부터 시작해서 아직 채 치우지 못한 흙더미까지 가득 쌓여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나일 강과 폭우로 인해서 완전히 침수되어 있었으나 이후 고고학자들이 물을 빼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방이 원래 쿠푸가 묻힐 안치실이었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꿨던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4.6. 태양 방주
쿠푸 왕이 하늘로 승천할 때 사용할 거대한 방주. 피라미드 동쪽에는 거대한 구덩이 3개가 있었다. 1954년 5월에 처음으로 이 구덩이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 구덩이에서 목재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덩이의 모습을 보고 목재들이 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고고학자들은 1224개에 달하는 목재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추기 시작했다. 조각들은 큰 것은 23m에서부터 작은 것은 10cm 까지 크기가 가지각색이었다. 학자들은 밧줄을 이용해 그 많던 조각들을 제자리에 이어붙였고, 그 결과 14년이라는 대작업 끝에 마침내 완벽한 배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보존처리를 마친 후 한동안 대피라미드 옆에 건설된 전시관에 전시되다가 현재는 신설되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이전되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매일 낮에는 낮의 태양선 맘제트(Mamdjet)를 타고 하늘의 나일 강을 동에서 서로 여행했고 밤에는 밤의 태양선 메스케트(Mesket)를 타고 신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지하에 있는 명계의 나일강을 서에서 동으로 여행했다. 따라서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태양 방주 또한 2척으로 구성되었으나 1980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팀이 발굴한 나머지 하나는 아직 조립 중이다.
5. 미스터리 및 음모론
워낙 엄청난 건축물인 만큼 관련된 미스터리나 음모론도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가설 중 하나가 쿠푸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의 별 배치를 따라서 지었다는 것이다. 오리온자리를 잘 보면 '오리온의 허리띠'라고 해서 별 3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데, 피라미드가 지어졌을 기원전 1만년 전 무렵 이 별들의 배치가 기자의 3개 피라미드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점점 살이 붙어가면서 나중에는 기자의 대스핑크스가 사자자리를, 나일 강이 은하수를 의미한다고까지 주장하는 데에 이르렀다. 사진을 서로 대조해보면 은근히 그럴 듯한 주장이라 많은 지지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풍요와 오시리스를 상징했기에 더더욱 그럴듯한 가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천문학이 발전하자 이 주장도 논박당하였다. 천문학자 에드 크루프와 토니 파이랄이 플라네타리움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별들 사이의 각도는 약 47-50도 정도 각이었던 것에 반해 피라미드 사이의 각도는 그에 한참 못미치는 38도 정도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3개 피라미드를 연결하는 선을 그으면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데에 반해 오리온자리 3개 별을 잇는 선을 그으면 정반대인 남쪽으로 치우치며, 만일 대스핑크스가 사자자리를 상징한다면 이는 은하수, 즉 나일 강의 정반대편에 있어야 한다고. 게다가 가장 결정적으로 별자리들의 이름과 그에 관련된 신화는 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애초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별자리를 '사자자리'라고 부르지도 않았을테니 현대의 사자자리와 대스핑크스를 연관 지음이 더 이상할 지경이라는 뜻. 따라서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이 학설을 거의 사장된 사이비 과학 수준으로 취급한다.
또다른 유명 미스터리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뚫린 환풍구 2개가 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사실 이 미스터리는 위의 오리온자리와 관련된 가설처럼 신빙성없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히려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다. 피라미드 가장 안쪽 왕의 방에는 정체 모를 구멍이 2개 있는데, 학자들은 처음에 이 구멍이 공기가 통하기 위한 환풍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환풍구라는 주장이 힘을 잃었다. 로봇을 통해 환풍구 내부에 카메라를 집어넣어본 결과 환풍구 중간에 돌이 지어져 막혀 있었기 때문. 그래서 힘이 실린 가설이 바로 별자리 가설인데, 환풍구가 용자리의 알파성 투반, 오리온자리의 벨트, 북극성, 작은곰자리의 코카브를 가리킨다는 학설이다. 별들을 가리키는 이 구멍들을 통해서 파라오의 영혼이 그대로 하늘의 별들을 향해 승천했다는 것. 하지만 추가적인 조사 결과 북쪽 환기구는 이리저리 꼬아진 모습인데다가, 남쪽 환기구가 약 20cm 가량 휘어진 것으로 밝혀져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왜 이집트인들이 이 환기구를 뚫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피라미드가 하늘의 별자리와 연관이 있다거나 고도의 기술을 사용한 건축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과 결합해 극단으로 치달으면 초고대 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는 헛소리로 취급하는 중. 이러한 가설은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미개한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라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의거한 백인 우월주의와도 상통한다. 이집트인들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초고대문명론이나 외계인 기원설 따위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는 아예 이집트 현지의 발굴 및 연구 허가를 안 내준다고 한다.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초고대 문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아예 반쯤 미친 작자들로 취급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일부 사람들은 '대피라미드가 애초에 무덤으로 지어지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미 9세기경 아바스 왕조의 알 마문이 탐험을 빙자한 도굴 작업을 벌였을 때부터 피라미드 내부는 텅 비었기 때문이다. 무덤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부장품, 도굴당했다고는 해도 하다못해 깨진 도자기 파편이라도 하나 남아있을 법이라도 한데 그것조차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다. 파라오의 미라도 부장품도 나오지 않았으니 대피라미드를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지었던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기자의 피라미드들에만 이 것들이 왕의 무덤이라는 확증이 없을 뿐, 다른 피라미드들에는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대놓고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조세르의 피라미드에는 관과 부장품이 발견된 바 있고 그 외에 파라오 테티의 피라미드에서는 수 백여구의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피라미드를 천문대 용도로 지었다거나 요새로 지었다는 둥 대부분의 이야기를 근거 없는 소리로 취급한다.
다만 건축학적으로 미스터리한 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피라미드의 네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근세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마저도 약 9분 정도 틀어져 있는데 수천 년 전에 세워진 대피라미드가 정확하게 방위를 맞추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틀림없다.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당시 고대 이집트의 놀라운 건축 기술 성취도를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피라미드를 쌓으려면 주위에서 발견된 채석장보다 최소 3배는 더 큰 채석장이 필요하다는 의문이 있었으나 나일 강을 통해 외부에서 돌을 실어왔다는 지적에 논파당했고, 피라미드 건설방법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의문도 있는데 이건 아마 위에서 언급한 경사로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6. 대중매체 속 대피라미드
-피라미드의 대표답게 이집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고대 이집트와 이집트 문명을 다룬 매체, 특히 이집토마니아 작품에서 단골로 즐겨 등장하는 피라미드의 주요 모티브이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잘 재현해놓은 장이 있다.
-2023년 7월 28일 Travis Scott의 앨범 UTOPIA의 리스닝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레고 아키텍처 시리즈로 발매되었다. 현재 모습이 아닌 백색 석회암 외장과 황금 피라미디온까지 재현되어 있으며, 이집트 상형문자 명판까지 들어 있다.
-수호전사 맥스맨 25화에서 맥스맨 일행이 레오니아 펜던트에 이식할 마지막 스톤이 지구 곳곳에서 적의 공격 등으로 계속 사라졌다 부활했다를 반복하다가 대스핑크스에 있는 것이 감지되어 이를 회수하러 순간이동으로 이집트까지 이동했는데 적인 데빌로스 군단도 이를 방해하러 쫓아왔고, 이로 인해 대피라미드와 대스핑크스 사이의 비어있는 공터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13:50~14:00 삼각지역 12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4:00~14:10 삼각지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6호선 전철 승차 대기
14:10~14:37 6호선을 타고 삼각지역에서 역촌역으로 이동 [27분 소요]
쿠푸 왕의 피라미드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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