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king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마지막 지상낙원을 걷다
글·사진 서정환 서울대 농대 산악부
학교 산악부의 아콩카구아 원정등반을 마치고 곧장 귀국을 하지 않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선정한 지구상의 10대 낙원 중 하나인 파이네 국립공원 트레킹을 나섰다. 파타고니아 지역으로 여행을 가는 60년대 학번 선배들과 함께 칠레 국내선을 타고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로 이동했다. 푼타 아레나스는 칠레 파타고니아 지역의 남쪽에 있는 도시로 파타고니아와 남극여행의 기점이 되는 도시다. 우리 일행은 푼타 아레나스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해 파이네 국립공원 트레킹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장비와 식량을 준비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는 많은 여행사와 장비점, 마트가 있어서 여행준비에 불편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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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토레스로 가는 길. 파이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는 ‘W트레킹 코스’
다음날 아침 선배들이 예약한 버스를 타고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선배들은 트레킹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관광하기로 해서, 공원 입구(Laguna Amarga)에서 헤어졌다. 이제부터는 혼자 떠나는 길이다. 가벼운 긴장감과 설렘으로 기분이 좋았다. 공원사무실에서 입산신고를 하고 입장료(15,000칠레페소)를 지불하니 지도 한 장을 준다. 이곳 현지 가이드들의 추천대로 ‘W코스’를 둘러보기로 하고 출발한다. ‘W트레킹 코스’를 돌면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라스 토레스(Las Torres) 산장을 지나 칠레노 야영장(Campamento Chileno)까지 가는데, 오늘따라 이곳에서는 드물게 화창한 날씨라 따가운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걷는다. 파타고니아에서 맑은 날은 자외선이 매우 강하다. 반팔 차림에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탓에 목과 팔이 새까맣게 탔다. 덕분에 이곳을 여행한다면 선글라스와 선크림을 꼭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다.
칠레 야영장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토레스 야영장으로 향한다. 토레스 야영장 가는 길은 계곡 옆으로 난 숲길인데 조용하고 참 좋다. 나무와 개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을수록 기분이 상쾌해진다. 토레스 야영장에 도착해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빌린 작은 텐트를 치고 간단히 저녁을 챙겨먹는다. 내일은 야영장 옆에 있는 전망대와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등반의 베이스캠프인 하포네스 야영장(Campamento Japones)까지 다녀오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을 챙겨먹고 전망대에 올랐다. 야영장에서 출발해 40분 정도 급경사의 너덜지대를 오르면 언덕 위에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는 작은 호수 너머로 토레스 델 파이네가 보인다. 봉우리에는 구름이 걸려있고 호수 주변에는 강풍이 몰아치지만, 에메랄드빛 호수와 침봉의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동안 사진도 찍고 침봉들을 감상한다. 가운데의 주봉은 높이가 3050m로 수직 절벽만도 1천m에 이르는 바위 봉우리이다. 깎아지른 암봉을 보니 다음에는 꼭 저 봉우리들을 올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야영장으로 돌아와서 잠시 쉬었다가 하포네스 야영장으로 올라간다. 숲속에 있는 야영장에는 움막이 하나 있고 등반가들의 것으로 보이는 텐트가 몇 동 있다. 이곳은 토레스 델 파이네 등반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클라이머들을 위한 야영장이다.
마침 산 쪽으로 올라가는 외국인들이 있어서 따라 올라간다. 아마 이 길은 토레스 델 파이네 어프로치 루트인가 보다. 숲을 벗어나 모레인 지대로 난 길을 따라 걷는데, 올라갈수록 날씨가 점점 나빠진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풍이 불고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한다. 좀 더 올라가다가 험악해지는 날씨에 발길을 돌려 야영장으로 돌아온다. 역시 이곳 날씨는 만만하지 않다. 야영장에서 저녁을 먹고 쉬는데 나이 지긋한 동양인이 말을 건다. 바로 60년대 이본 취나드와 함께 인수봉 귀바위 코스 등을 초등한 선우중옥 선배다. 책에서만 뵙던 분을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다니,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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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는 V자 계곡을 따라 칠레야영장으로 향한다.
날씨가 흐려지더니 야영장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까지도 그칠 줄 모른다. 점심때가 다 되어갈 즈음, 비가 그치고 날이 개기 시작해 텐트를 걷고 출발한다. 칠레 야영장을 지나 쿠에르노 가는 길 왼쪽으로는 호수와 얕은 구릉, 오른쪽으로는 높다란 산이 펼쳐져 있다. 게다가 길 양쪽으로 야생화가 피어 있으니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듯 너무나 아름답다. 하지만 오후 4시쯤 되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하늘을 보니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비바람을 맞으면서 쉬지 않고 쿠에르노 산장까지 간다. 비를 피하면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탈리아노 야영장(Campamento Italiano)에 도착하니 그저 비에 젖은 야영장인데도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진다.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도 마신다. 소주보다도 싼 싸구려 와인이지만 지금은 어느 술보다 맛있다. 오후 내내 비바람에 시달리며 걸어왔기에 따뜻한 음식과 술, 편안한 잠자리가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니 계속 비가 내리고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어제 무리한 것도 있고 날씨도 좋지 않아 오늘은 휴식하기로 한다. 낮이지만 해가 없으니 꽤 춥다. 텐트 안도 12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파이네에서 트레킹을 시작하고 첫날을 빼고는 계속 흐리거나 비가 온다. 일기예보기능이 있는 시계는 계속 비를 표시한다. 쉬는 날이라 마음 편히 푹 쉬며 기록도 하고 노래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다행히 비는 그쳐 브리타니코 야영장(Campamento Britanico)을 거쳐 전망대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브리타니코 야영장 가는 길은 양쪽으로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산과 침봉들이 있어 아주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브리타니코 야영장을 지나 전망대로 가는데 다시 날씨가 나빠진다. 고도를 높일수록 비에서 진눈깨비, 진눈깨비에서 눈으로 변한다. 고도 1천m가 조금 넘는 전망대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친다. 바위 뒤에서 외국인 남자와 눈보라를 피하면서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지만 춥고 손이 몹시 시려 포기하고 내려온다.
이탈리아노 야영장에 돌아와서 따뜻한 홍차 한 잔과 간식을 먹고, 텐트를 걷어 페호에 산장(Refugio Pehoe)을 향해 출발한다. 하지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번 트레킹은 비바람과의 싸움이다. 비바람에 시달리며 진창길을 쉬지 않고 2시간 정도 걸어 페호에 산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도저히 비바람 속에서 야영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흠뻑 젖고 지친 몸으로 산장에 들어가 잠자리를 구했다. 산장비는 제법 비싸지만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아껴두었던 여벌옷으로 갈아입으니 비로소 살 것 같다. 기분 좋게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인다.
오늘은 파이네 트레킹 마지막 날이다. 사실 트레킹은 어제 끝났고, 오늘은 배를 타고 푸데토(Pudeto)로 건너간 다음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나가면 된다. 산장 앞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데 약 30분 정도 걸린다. 갑판으로 나가니 호수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파이어 빛의 호수 풍경은 산 속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푸데토 선착장에 도착하여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를 탄다. 5박 6일 동안 파이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다시 속세로 나간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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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호에 산장 앞 선착장에서 요금이 11,000칠레페소인 배를 타고 푸데토로 가는데 30분정도 걸린다. 배에는 파이네 국립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트레커들로 붐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