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애
日記抄 2
황 석 영
내가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도 그 사내의 전화가 왔었다고 아내가 말했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어넘겼기 때문에 그 뒤에도 몇 차례인가 전화가 걸려왔을 때까지도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어느 늦은 밤에 드디어 그가 찾던 당사자인 내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내가 밤에 일하는 습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서 오후 늦게까지가 내게는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라 짐작하고 늦은 밤에 연락을 해오는 일이 더러 있었다.
처음에 그는 예의 바르게 말을 걸었고 자기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온 누구인데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당시에 명문이라던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설사 졸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십오년이 흘러간 지금에 와서 누가 누구인지 종잡을 수가 없을 게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상대에게 마주 반색을 해서 이쪽의 실례와 무성의를 미리 얼버무리는 데는 이골이 나 있던 사람이라, 조심스럽게 반기는 척하면서 말을 놓았다.
― 내가 누군지 이제야 기억이 나는 모양이지?
나는 아무개라는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풀이 외워보면서 어슷비슷 콩자반처럼 머리를 박박 깎은 검은 교복의 아이들 얼굴을 떠올렸고, 그럴듯하게 키와 생김새를 꿰어맞추었더니 그는 안심한 듯이 말했던 것이다. 나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응, 생각이 나는 것두 같다. 턱이 아마 좀 별다른 데가·……
―맞다 맞어, 턱이 그랬지.
턱이 짧고 아랫입술이 앞으로 삐져나온 합죽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어떤 아이를 생각하고 말해봤더니 요행히도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우리집 전화는 어떻게?
―물어 물어 알았지. 뭣 좀 의논할려구 그러는데 잠깐 만날 수 없을까?
대개 그 학교의 동창생이 뭔가 의논하자면 그리 골치 아픈 일은 아닐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가볍게 응했다.
―무슨 일인데? 지금이라두 괜찮아.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지. 나는 워낙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낼 오전 아홉시나 열시 사이에 집에 있을 거냐?
― 밤새우고 잘 시간이지 만 기다려볼까.
내가 선선히 응답하자 그는 그럼 내일 보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고등학교의 동창생들과 연락이 닿은 것은 내 쪽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글을 써서 책도 내고 세상에 작은 물의도 일으키면서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러니까 아마 삼십대 말쯤에 가서야 가끔씩 기억할 만한 아이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던 듯 싶다. 내가 이제 사십대 중반을 넘고서도 그들을 아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 시절 검은 교복을 입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고서는 상대방이나 내 쪽이나 피차에 너무 생경했기 때문이랄까. 누렇게 퇴색한 그 무렵의 가령 소풍 기념사진이나 짝패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관 사진의 얼굴들과 머리털도 알맞게 세고 품위나 풍채도 그럴듯한 중년의 얼굴을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비슷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살아가는 꼴도 엄청나게 변했을 터이다. 많이 달라졌다고들 막연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없던 것이 생짜로 나타난 것은 아닐 테고, 콩이 콩나물처럼 눈밭이 풀숲처럼 번성 한 결과일 터이다. 그러니까 이미 그 학교는 풀숲의 눈밭이었달까. 또한 그때 그 시절의 눈이 반짝이던 영리한 아이들은 콩나물의 콩이었달까. 나는 이 번성의 수
십년 동안을 아직도 감상적으로 회상하고 싶지는 않다. 무슨 근대화라거니 자본주의 라거니 하는 케케묵은 낱말을 들추지 않더라도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겪은 씁쓸한 살림살이와 앞으로도 별 차이 없이 전개될 이곳에서의 살림살이를 대강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치르고 그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어느 정도 주눅이 들어 있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부터는 애들 각자의 집안 사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단계였다. 서울이라는 곳도 지금보다 훨씬 더 한눈에 눈치챌 수 있도록 사는 사정에 따라 도시가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하긴 지금은 한구역 안에서도 잘살고 못사는 곳이 더욱 세분화 되었지만.
회색빛 시멘트 담과 언제나 언덕처럼 쌓여 있던 석탄더미들, 기관차의 화물차량들과 그 뒤를 쥐새끼처럼 쫓아가며 코크스를 줍던 아이들, 국방색 작업복에 똑같이 하얀 칼라를 내놓은 차림의 방직공장 처녀들, 검은 무명 팬티만 입고 벌거벗은 채 뛰어다니며 쌍소리를 하던 영단주택의 노동자의 아이들, 공장 폐수가 끊임없이 흘러가던 학교 가는 길, 죽은 쥐, 버려진 제웅, 그리고 실직한 노동자들이 몰려 살던 부서진 화물차들, 그 양지쪽에서 맨발로 해바라기하던 아이들, 미군부대가 보이는 여의도 일대의 쓰레기더미, 틈틈이 잡초가 보이고 깡통 사이로 피어나던 오랑캐꽃과 민들레, 냉이꽃 같은 작은 들꽃들, 이런 것들이 영등포에서의 내 어린 날의 기억이다. 노동자의 아이들과 나는 날마다 음모를 꾸몄고 비록 몰락했지만 자신들은 개화된 도시의 점잖은 시민이었다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는 날마다 속여넘겨야 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형편없는 품삯꾼의 새끼’들과 같았고 쥐뿔도 없이 자산가의 흔적만을 자존심처럼 갖고 살던 월남한 피난민의 도련님이었다. 동네에서나 변두리의 학교에서는 나는 그런대로 도련님이었다. 부모가 식민지 치하에서 전문교육을 받았으며 노동이나 농사일을 하지 않았고 일제가 진출해서 번영시킨 만주국의 수도에서 형화관, 백화점, 까페, 그릴, 댄스홀 따위의 문화시설을 기꺼이 드나들며 잘 살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와서 그들이 친일파였는지 아니면 은근히 독립을 바랐는지는 잘 모르지만 해방 이후에 서울로 와서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예전처럼 괜찮았던 세월은 다시 누리지 못했다. 곧 뒤이은 전쟁으로 밑천을 만들 여유를 갖지 못했고 몇 해 뒤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일찌감치 서로 다른 두 세상을 홈쳐보면서 자란 셈이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허위를 증오했다. 부모들이 지니고 있던 과거의 자랑스런 생활들은 모두 참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얌전하고 바른 말씨, 언제나 으뜸이어야 하는 성적, 어머니가 불시에 나타나던 학교 수업의 참관, 재봉틀로 유별나게 만든 아동복, 집에서 만든 간식 같은 것들은 우리집을 영단주택의 노동자 구역 가운데서 섬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동창생을 자처하던 사내는 아침 나절에 전화를 하겠다던 약속을 어겼다. 내가 외출했다가 늦게 돌아왔더니 아내는 방금 그 사내의 전화가 걸려왔었다고 말했다.
―좀 이상해요. 연락처를 알려달라니까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등 서울에 살고 있지 않다는 등 그러데요. 외국에서 오셨냐니까 그런 건 아니래요.
―아침에 전화한다더니.
―너무 바빴대요.
하고 나서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ㅡ글쎄요, 헤어진 지 오래된 사람을 만나는 게 별로 좋지 않대요. 이십년 이상이나 본 적도 없고 그 사이 한두 해에 몇 번씩 연락이 있던 사람이라면 몰라두…… 잘 알던 사람도 그렇다는데 얼굴도 모른다면서요?
―그래 다음에 또 연락한대?
ㅡ그런댔어요.
나는 아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이십오년이라면 그 변화의 폭을 거의 짐작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내게는 한가지 믿음이 있었다. 그 학교를 나왔다는 녀석들치고 지금 세상과 다른 꼴로 변했을 리는 없을 테고 오히려 지금 세월에 적응하게끔 똑같은 모양으로 변모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한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지금도 그 학교의 학력평가 시험을 치르던 나날이 꿈에 보인다고 했다. 나는 애들은 부지런히 쓰고 있는데 자기만 한 문제도 몰라서 백지를 쥐고 땀을 흘리다가 깨어난다는 식 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간에 냉정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었으며 속을 내보이거나 남에게 약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초급학년에서 서투른 짓으로 몇 번 반 아이들의 비웃음을 샀던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는 고학년이 되기까지 끝내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이 지내다가 어디론가 전학을 갔다. 나도 학력평가 시험에 관해서는 원한이 깊은 사람이다. 전학년의 학생들 이름을 점수 순서대로 석차를 매겨서 교실 앞 복도에 붙여놓고는 했는데 어느 달엔가 성적이 떨어져서 어머니를 격노시켰다. 나는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되돌아가서 캄캄한 복도로 들어가 성냥불을 그어대며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과 점수를 베껴와야만 했다. 그 캄캄한 어둠속으로부터 꼬물거리며 떠오르던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그리고 그들의 실체는 지금 어찌되어 있을까. 그들이 배웠던 잡다한 것들, 나날이 경쟁하고 선발되고 인정받은 결과로 가지게 되었을 힘, 그 힘의 충돌과 이합집산하는 작용, 그 힘의 재생산과 팽창, 이 모든 것의 반영인 요즈음 살 만한 사람들의 행태를 나는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교실 안의 공상가였다. 창밖의 빈 운동장과 아카시아나무를 바라보든가 책상 밑에 다른 책을 감춰두고 읽거나 노트에 춘화를 그리면서 선생이 쓸데없는 소리만 떠든다고 여겼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점심시간마다 재담으로 아이들을 웃기거나 광대짓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이 교실 안의 삐에로가 결석하면 아이들이 하루종일 뭔가 빠진 것 같더라는 말에 만족했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작은 신사들의 모임’ 은 내게는 더욱 상징적이다. 그들은 모두가 요즈음 시쳇말로 이런 연대의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이 되었다. 그들은 그맘때에 벌써 번역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따위는 모조리 읽어치웠고 어른들도 읽기 힘든 사회과학책이나 철학책들을 가지고 의젓하게 자기 비평을 달아 토론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들은 사창가를 가거나 어두운 대폿집을 드나들며 퇴폐의 흉내도 냈지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지도자로 가는 길인가도 잘 알았다. 절대로 자신을 정말 방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진 매력 가운데 으뜸인 것은 역시 자기 존재와 생각을 서투르게 드러내지 않는 점이었다. 또한 밖으로 드러낼 때에도 일부러 그것을 보편적인 사물에의 비유나 실제적인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니체의 이름과 횔덜린의 시를 막바로 인용하는 건 천박한 짓이었고, 가령 니체적인 나무에 관해 말했다. 그들 중의 우수했던 아이들은 육십년대 초에 외국의 기업들이 살금살금 발을 들여놓을 적에 외국회사의 지사원으로 출발하거나 신문기자가 되거나 유학을 가거나 고시에 들었다. 나는 이런 정도의 수준에 있던 다른 학교의 고만고만한 또래들과도 연줄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들의 대개는 명문대학으로 가서 서로의 교제를 확대시키게 마련이었다. 내가 이런 길에서 탈락되었던 청년기의 어느 때엔가 나는 저절로 알아차렸다. 이들이 얽어내는 그물망 같은 사교가 서로 직조되어 일정한 그림으로 나타난 연애와 결혼, 성공과 실패, 출세와 낙오, 사랑과 야망 따위의 모양들이 결국은 저 한강 남쪽에서의 신중간층의 풍속을 건설해냈다. 아니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까지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 길은 더욱 확장되고 뚜렷해질 것이다.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되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 그 길은 내가 어릴 적부터 어렴풋하게 이건 가짜라고 느껴왔던 삶으로 가게 될 확실한 도정이었다. 그러나 벗어났을 때의 공포는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퇴학을 맞고 나서 끝없이 걸어가던 하교길이 생각난다. 이제부터 내 앞에 놓인 길은 어디나 뒷길이었다. 나는 이제 의사나 법관이나 관료나 학자나 사업가나 존경받을 장래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잘려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품삯꾼의 거친 황야로 몰려난 것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두 가지의 세상을 겪는다고 말했다. 어느 얌전하고 선량한 학생이 집에 가다가 골목길에서 야간부의 상업학교나 공업학교의 불량학생을 만나면 그들의 실체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적의를 갖는다. 십중팔구는 몇대 얻어터질 수도 있고 용돈을 털릴 수도 있다. 나는 그 창백한 학삐리이면서 또한 불량배인 것이다. 퇴학을 당하고 나서 집에서나 동네에서 빈둥거릴 때에 나는 쓰리꾼이나 직공이나 구두닦이와 별반 다른 차이가 없었으므로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비교적 냉정하게 살필 수가 있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믿지 못했고 호의를 보일 적에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변소의 창문을 통해서 안개를 가르며 등교하는 여학생들의 하얀 칼라와 남학생들의 번쩍이는 모표를 바라보며 그들의 아득한 길을 가늠해보았다. 어느 공업학교 야간부에 들어가서 몇 달 다니고 졸업을 했는데 나는 그 어둠침침한 교실에서 어린 시절의 영단주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벌써 보호자 아래에 있는 소년이 아니라 가장이거나 스스로 살아가는 어른들이었다. 낮에는 껌팔이도 하고 급사, 배달꾼도 하고 하사관, 수금원, 기능공 노릇을 하다가 저녁에는 학교 앞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했다. 그들은 이렇게 교실에 앉아 있어봤자 별수없다는 것도 잘 알았으며 지금 배우고 있는 학과목들이 그들의 생활을 바꾸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무력하게 만들 뿐임을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킬킬대고 엉뚱한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그들은 끄덕끄덕 졸았다. 젊은 대학원생이나 병역을 마치지 못한 야간부 임시직 선생들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이 학생들을 경멸했다. 복잡한 역학 공식을 풀어 보이다가 선생이 귀찮다는 듯이 그냥 넘어갔는데 그중 제법 열심이었던 학생이 꼬치꼬치 묻자 그 선생이 이렇게 말하던 게 기억이 난다. 아, 그건 정식 엔지니어가 되려면 배워야겠지만 너희들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거다. 나는 그애들이 서로에게 갖던 끝없는 관심에 감탄했다. 그들은 돈도 꿔주고 자취방을 드나들며 깔치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병 간호도 했다. 누가 유치장에 있다며 돈을 걷고 목수인 아버지가 생신이라고 염소 서리를 하러 인근 촌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그런 관심과 인정의 표현은 멜로영화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노골적이었다. 마치
서로의 추억노트에 그려주는 갈매기와, 우정 영원히 잊지 말자! 라거나, 너의 변함없는 친구! 하는 식의 글귀처럼 그 뜻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했다. 나는 그들과 시장 다락방의 간이술집에서 나이롱뻥을 놀기도 하고 중국집에서 탕수육에 배갈을 시켜먹고 뺑소니도 치면서 우정을 다졌다. 철거된 판자촌으로 친구의 이사를 도우러 갔을 적에, 그의 식구들 틈에서 블록이 널려진 빈터에 쭈그리고 냄비밥을 먹으면서 편안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군대도 갔다 오고 장가도 들어 가장이 된 뒤에 그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비군 훈련을 받던 무렵이니 아마도 삼십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동원훈련 때라 한구역의 예비군이 총동원되어 침투사격 이네 각개약진이네 하며 박박 기었다. 점심시간에 어디 가서 뜨끈한 국밥이라도 얻어걸치려고 철조망 밖으로 나서는데 그들 말로 어떤 꼰대가 부끄러움도 없이 나를 불렀다.
―야, 깜상 너 오랜만이다.
원래 얼굴이 가무잡잡해서 야간학교 시절의 내 별명이 깜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얼핏 알아듣지 못했다.
―누구신…… 지요?
―누구긴 인마, 나 땜통이다.
그는 예비군 모자를 훌쩍 벗어 머리 한가운데를 까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를 알아보았고 그의 뒤에도 몇몇의 웃는 얼굴들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예비군복 차림에다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막걸리 사발을 들고 목로에 둘러서서 옛날처럼 킬킬대며 떠들고 마셨다.
―뭘 하구 사냐?
내가 그 순간에 그만 실수를 했다.
―글 써서 먹구 산다.
내 대답에 질문자는 차마 웃을 수는 없었는지 멋쩍은 웃음을. 참느라고 콧날개에 벌름, 하면서 힘이 가는 게 보였다.
―글? 무슨 글?
아차 복잡해지겠구나 싶어서 나는 얼른 자백했다.
―그냥 논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진지하게 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트럭 운전사였다. 처음에는 남의 차를 끌다가 얼마 전에 월부로 트럭을 사서 회사에 지입했다. 월부가 끝나 완전히 내 차가 되면 장거리로 농수산물을 싣고 뛰겠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시계포 주인. 그는 처음에는 유리상자 하나 달랑 들고 시장에서 경비들에게 괄시깨나 받으며 케이스 갈이를 했다. 고물시계에 자판을 새로 그려 갈아끼는데 유명 상표를 똑같이 그리거나 새기거나 붙여서 고급시계로 둔갑을 시킨다. 이제 겨우 점포를 얻어들었는데 도장쟁이와 동업이란다. 또다른 하나는 플라스틱 공장의 수지 반장이다. 스티로폴에 대하여는 모르는 게 없다. 공원으로 들어가서 십 이년 만에 공장 근처에 열일곱 평짜리 한옥 온채 전세를 들어 사글세로 두 집을 받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내가 갈 길을 가르쳐주려고 애썼다.
깊은 밤에 그 사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술에 취했는지 입술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ㅡ어, 미안하다. 내일은 꼭 만났으면 좋겠는데.
―전화로 하지 구래. 무슨 일야.“
나는 좀 짜증이 나서 차갑게 말했다. 지금 내 입장으로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상대였다. 저쪽은 나를 알고 있다는데 나는 건성으로 아는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가 이죽거렸다.
―흥, 인생 사는 얘기지 뭐.
ㅡ난 좀 바쁜데.
一어, 작가 선생 너무 재지 말어. 내일 밤 열한시에 만나지. 종로 종각 모퉁이에서 만나자구.
―그 시간에 길거리에서 있으라구? 그건 좀 곤란한데.
―차 가지구 나갈 테니까 염려 마.
하고는 그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마흔 살이 되던 해였던가, 얼떨결에 끌려갔던 명문교의 동창회 생각이 난다. 거기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이들이 이렇듯 제법 조직적으로 모이게 된 것이 몇 해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종친회가 됐건 향우회가 됐건 이맘때의 모임이란 대개는 밑천 가진 사람들의 능력을 확대하고 교환하려는 의도가 본래의 목적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계속적인 경쟁의 관문을 통과한 자들끼리의 모임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게 될까. 거기서 소생산자나 중소기업인들은 같은 업종의 친구들을 찾아내어 옛날 서양식의 프리메이슨 같은 동업자 소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대재벌의 이사들은 은행 지점장이나 이사들과 자금의 유통에 대하여 서로 협조를 당부하며 또한 군인과 관료와 법조인들은 이들 사이에서 건전한 유대 교류가 긴요하다는 점을 서로 인식시킨다. 그들은 대개가 관리계층이거나 진작 독립해서 자기 기업 체를 끌어가기도 하고 전문가이며 기획자이고 그가 관여하는 부문에서 강한 영향력의 행사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따로이 부부동반의 각종 모임을 갖고 월별로 서로를 초대하기도 하며 해외망을 연결하기도 하고 감사장이나 기념패를 만들어 주고받는다. 선후배가 어울려 테니스와 골프 동호회를 만들고 부부동반의 헬스클럽 모임, 여행 모임, 문화행사 모임, 콘도 모임, 휴가 모임, 부동산 모임, 거시기 모임 무슨 모임 해서: 자꾸 새끼를 쳐나가고 이 모임들은 다시 큰 모임을 이루면 혼합된다. 물론 모두가 능력자이고 실력자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이맘때의 동창회란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선별되게 마련이므로 다 그만그만한 처지와 끗발들이 비교적 대등하게 만나서 우정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여자는 또 여자들끼리 남자들과 맞먹을 만한 학교의 학력과 연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차츰 분명해지고 있는 요즘 세상의 힘의 토대이면서 서로를 다시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질서의 틀이다. 역사와 사람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는 소리는 어느 교과서에 나오던 말인지. 똑같은 틀 속에서는 변화의 힘이 나오지 않고 정반대의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또한 어떤 경전에 써 있었을까.
나는 초저녁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이따가 밤 열한시에는 종각 모퉁이로 나가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태도가 좀 엉뚱한 데도 있고 약속시간이 깊은 밤이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궁금중이 들었다. 작업은 진작에 작파해버렸으므로 느긋하게 술이나 한잔 할 생각이었다. 마침 후배에게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아두었다. 박모는 대학 초년생 때 내 작품을 각색해서 연극을 해보겠다고 하여 알게 된 후배였다. 학위를 둘이나 따 놓고서도 아직도 유학중인데 다섯 나라 말을 할 줄 안다고 한다. 그는 가끔은 엄살 섞어 여기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고 그랬고, 나는 그에게 그래 미안하거라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입으로 칼럼을 쓰듯이 말한다. 그 재치는 안경 너머로 반짝인다. 수필집 내서 돈벌어라 하며 나는 그를 긁는다. 그가 말하는 건 이런 식이다. 형님 요즘 여기 신중산층의 질문이 뭔지 아쇼? 첫째, 아직도 소형차를 타십니까. 둘째,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셋째, 아직도 증권 시세를 모르십니까. 넷째, 이건 요즘에 추가됐다지요. 아직도 조강지처와 사십니까. 그는 룸쌀롱보다는 까페가 훨씬 부담 없고 신선하다는 풍속도 벌써 냄새 맡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눈치가 멀쩡하면서 매우 냉소적이었다. 박모가 학생 때 가끔씩 제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집에 놀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겁깨나 준 모양이었다. 그중에 정모가 있었는데 그 청년은 내 언변에 속아서 그만 도보로 동해안을 일주 한다고 떠났다가 수십일 만에 영양실조로 뻗어버리기도 했다. 그중에 누구는 학생운동으로 큰집에도 다녀왔다. 박은 가끔 봤지만 그의 동년배 친구들은 만나본 지 오래였다. 그들은 이제 내 친구들이 그랬듯이 인생을 출발하고 있었다. 종합상사, 오퍼상, 광고회사, 매스컴 등등이 그들의 밥벌이 터였다. 처음에는 약간 서먹서먹 대충 정중하게 반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다음에 술집으로 옮기자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이번 선거 말이야 정말 김샜어.
오퍼상 정이 말하자 광고가 받았다.
―또 그 지긋지긋한 정치 얘기, 집어치워.
종합상사가 말했다.
ㅡ봐라, 한국 자본주의도 이젠 자리를 잡았나봐. 외국 자본에 잡혀 있다고 했지만 인제는 자기 재생산 구조를 갖췄어.
매스컴이 삐딱하게 말했다.
―동(東) 김과 서(西) 김이 죽 쑤어 뭣 준다고 단일화 안해서 그래 .
박이 말했다.
―그런 막연하고 상투적인 얘기가 어딨어. 물론 한달 단위로 정세가 휙휙 바뀌었지만 애초에 지금 상황 안에서 투표를 해보기로 선택한 거 아냐? 광주는 이미 지역문제가 아니라 민족문제야. 그리고 이번 선거는 뚜렷해진 계급간의 결판이야.
나도 끼여들 수밖에.
―그건 나두 그렇게 생각하는데. 4·19 이후를 좀 봐. 그땐 밑에 아무 역량도 없이 생각이 마구 치달아 올라갔거든. 그전까지가 느이들이나 내 주변 사람 같은 자들이 한군데로 모여들 수 있는 한계선이야. 글쎄,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민간파쇼 정도랄까. 예수쟁이, 율사, 교수, 신문쟁이, 글쟁이, 느이 같은 회사쟁이들이 지난 6월까지고 그 다음에는 한걸음도 안 나갔어. 지난 6월과 7, 8월은 전혀 만나지 않았어.
―서 김은 인제 완전히 갔어요.
―가구 오는 거 좋아하네. 그는 유신시대의 상징 외에 아무것두 아냐. 유신이 뭐냐. 신식민지적 구조의 강화 내지는 재정비 아냐? 이번 선거는 묵은 숙제를 해본 거야. 우리 일이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 잖아.
ㅡ도대체 기층민중이 뭐야.
一사천만 중에 경제활동 인구가 천사백만이래. 그 중에 오십프로 노동자, 이십 오프로 농민, 십 프로 도시빈민이라니까.
ㅡ그럼 모순이잖아 이거.
ㅡ뭐가 모순이야. 그 사람들 다 저 먹구 살기에 바쁜데. 변혁의 바른 역량이 조직되지 않은 거지.
ㅡ그러니까 뭐한다구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믿을 수가 없다니까. 쥐뿔도 실세는 없으면서 바른 소리나 하구.
ㅡ양키들 물량이 그만큼 한반도에서 막강해진 게 아닐까. 사는 방식에서 생각까지 말이야.
ㅡ난 이제 다시는 투표 따위 하지 않을 거야. 투표 상관없이 밀어붙였다면 모를까.
ㅡ상처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냐. 전부 집단 노이로제 같았다니까.
ㅡ해방 후 처음이지. 모순의 총결정판이면서 중병 걸린 사람이 종합진단해 본 격이지.
ㅡ우리가 이런 모양으루 먹 사는데 어디 통일이 되겠어.
ㅡ 일본 비슷하게 되는 거 아닐까.
ㅡ그렇잖아두 새끼 일본이라잖아.
ㅡ아닐걸, 우리는 반쪽이란 말야. 좀 다르지.
ㅡ챙피해서 참.
이야기는 끊임 없이 계속되었지만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지향이 없었다. 다시 화제는 박의 장가 드는 문제로 옮겨갔다. 그의 학위에 걸맞게 오십 대 오십, 백 대 백의 맞교환 같은 혼처 얘기가 계속 이어졌고, 누군가가 주책도 없이 말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두 없냐?
모두들 한마디씩 쥐어박았는데, 사랑이 밥 먹여주냐, 그게 어떤 백화점에서 쎄일하는 물건이냐, 어느 기업 제품이냐, 인사동에서 판다더라, 아니다 고돌이판에 가면 있다는 둥의 허튼소리들이었다. 술자리는 대충 열시 반쯤에 파장이 났다.
나는 열한시 조금 전에 종각 앞에 도착해서 네거리에서 몰아치는 찬바람 가운데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깥 공기 때문에 술이 깨어가는 탓도 있었지만 겉돌고 냉소적인 술자리의 뒤끝으로 입맛이 썼다. 한참 풋고추와 된장에 깡보리밥 식당이 도심지에서 번진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일종의 허기에 대한 허기였을 것 같다. 아 사랑, 그런 게 있기는 한가. 언젠가 시골 청년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의 고향에서는 도무지 여자를 구할 길이 없어 흑산도까지 갔단다. 흑산도에는 파시를 따라 들어갔다가 소개비요, 옷값이요 밥값이요 빚 때문에 꼼짝없이 잡혀 있는 아가씨들이 많단다. 거기서 눈매 서늘하고 건강한 아가씨 하나를 찾아 발동선에 싣고서 달아난단다. 부부가 될 상대를 술자리에서 만날 수는 없어 친구끼리 품앗이로 서로 빼어내다 짝을 지어준다고 했다.
그래 결혼하여 부부가 되어 산다는 건 우리 같은 자들에게 어떤 일일까. 결국 결혼은 겉으로는 온갖 문화적 장치로 위장되어 있지만 물건들이 만든 물건의 산물이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훈련받아온 계급적 이해의 표현임을 피할 수가 없다. 우스개 노래처럼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 짱구, 짱구 남편 짱구, 짱구 마누라 짱구이다. 그래. 이 삶의 삭막함은 우리가 자초한 징벌로서 긴 그림자를 내려뜨리고 저 앞에 뻗어 있다. 서로 고만고만하게 주장하고 용납하고 물러서고 그러고는 함께 상실해간다. 야간학교 아이들 식의 노골적 표현은 억제되는 게 아니라 가뭄의 강처럼 증발해가는 것이다. 나중엔 생활용어 몇마디와 아이들에 대한 질문 응답 몇가지가 남는다. 저 세월 속에는 부동산, 동산, 통장, 고지서, 영수증 같은 것들만 잃어버린 시간의 징표로서 남는다. 흑산도를 탈출하는 것 같은 열정은 우리에게는 없지. 전에 잃어버리고 축소된 꿈만큼만 우리는 서로 타협하지. 미칠 듯 뜨거운 사랑, 그런 건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자동차가 우회전을 하더니 도로 옆으로 붙으며 슬슬 다가왔다. 나는 길가로 나서기 전에 보도의 안쪽에서 잠깐 자동차 안을 관찰했다. 어디서나 흔한 군청색 중형차였다. 차 속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헤드라이트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길가 주변을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불빛 안으로 들어서면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한 중년 사내가 내렸다. 짧은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넥타이를 맨 차림에 오리털 파카를 걸쳤다. 우리는 서로 멋쩍게 악수했다.
ㅡ별로 안 늙었구나.
ㅡ응, 자네두 그렇구만.
그의 말에 나도 대꾸는 했지만 도무지 그를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반기는 얼굴 속에서 내게 적의가 없다는 걸 짐작할 뿐이었다.
ㅡ여기 타라.
그가 차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일부러 팔을 쳐들고 시계를 살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금 늦었는데…… 어딜 가는 거야?
―제발……
하면서 그가 말했다.
―내 부탁.좀 들어다오.
낯선 사람의 절박한 듯한 목소리에 끌려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그가 밤거리를 헤치고 달려나갔다. 나는 운전하고 있는 동창생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합죽이라는 친구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두 자네가 날 기억하니 다행이다. 턱의 상처가 이런 때는 필요한 모양이지 .
그가 고개를 돌려 턱을 내밀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턱을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차가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궁금하기도 하고 좀 불안하기도 해서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날 좀 도와줘야겠다. 딴 게 아니구 우리 집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 자네 집사람?
그는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제야 그에게서 술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나 지금 별거중이야.
―자네 술 먹었군. 음주운전 아나?
―걱정 마, 운전에는 십년 도사니까.
차가 다시 앞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그와 똑같은지 다른지는 아직 잘 몰랐지만 하여튼 내 경우에두 실패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의 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ㅡ애들은?
ㅡ딸 둘, 저희 에미가 데리구 있지.
나는 그의 얘기를 기다렸다. 그가 갑자기 맥을 탁 풀어놓듯이 내뱉었다.
ㅡ난 망했어. 쫄딱 망했어.
ㅡ뭐 하다 그랬어?
ㅡ가방 만들어 수출했지. 좋은 때두 있었는데 말야. 난 지금 토피 중이야. 담배 있어? 한대 붙여줘.
내가 불 붙인 담배를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와 나는 정말 어린 때에 함께 놀았고 싸움도 했고 무슨 우정도 있었던 걸까.
ㅡ빚은 빚대로 잔뜩 짊어지고 노임체불로 고발됐어. 내 앞으루 남은 건 이 고물차 한대야.
ㅡ부인은 그냥 집에 있나?
ㅡ이것저것 하지. 전에는 선생이었어. 그 친구 앞으루 해놨던 건 다 살아남은 셈이지.
그는 서울 교외의 경기도 어름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자취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생업은 시속말로 자가용 영업 운전사였다. 전에 자기가 잘 다니던 유흥가나 호텔 근처에서 손님을 끌어 일당을 번다는 것이었다.
ㅡ주차장 아이들하구 술집 웨이터들 몇 푼 주고 기름값 떼면 그저 혼자 밥먹을 만하지.
나는 그에게 부인과 합치지 그러냐고 아이들 생각을 해보라고 말했다. 빚은 두 사람이 잘살아보려고 하다가 생긴 것이니 앞으로 살면서 함께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도 말했다.
—오늘 결정을 내리자는 거야. 도장 찍는 걸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그래서 자넬 생각했지.
자동차는 다리를 건너서 강변을 따라 질주하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거뭇거뭇 고층아파트가 흘러갔다. 간혹 불켜진 창과 드문드문 불꺼진 창문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자네 글쟁이 아닌가. 내 아내 설득 좀 해달라구.
그런 일로 며칠 동안 전화를 하고 나를 불러내고 했느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내고 있던 것이다. 잠시 후에 그는 진정이 되었는지 꾸민 듯한 쾌활한 투로 말했다.
―나두 자네 독자라구. 자넨 말솜씨도 있고 나보다 깊은 생각도 있을 게야. 어쩌면 그 사람이 마음을 돌릴지두 모르지.
차가 아파트의 밀집지역을 지나 한적한 외곽도로로 다시 접어들었다. 새로 낸 널찍한 도로와 갓 심은 작은 가로수며 파헤쳐진 언덕이 보였고, 짓다 만 연립주택과 아파트의 시멘트 벽이며 철근과 건축자재 더미들이 보였다.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 앞의 상가 건물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고 차가 봄비고 있었다. 차는 더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밀려서 도로 한쪽에 마구 세워졌고 상가 앞 길은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가 차를 세우고 웅성대는 군중들 쪽을 난감한 듯이 내다보았다.
―이 시간에 뭐야, 무슨 일이야?
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가 지나는 사람에 게 물었다.
―까페 레인이 어딥니까?
행인은 대답도 없이 차창을 힐끗 보고는 바삐 지나갔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군중들 속으로 다가가서 인파 속에 끼여들었다. 두툼하게 옷을 입고 파카나 돕바를 둘러쓴 여자들이 손에 마호병이며 담요 가방 같은 것들을 들고 상가의 계단과 처마 밑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뭔가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섰는데 복덕방 업자들이 인파 사이로 뛰어다니며 자기네 고객을 점검하는지 누구 엄마 누구 엄마를 외치며 뛰어다녔다. 분양사무실이라고 쓴 백지가 붙은 사무실 앞에는 곤색 점퍼를 입은 회사 직원이 질서, 질서를 지키시라고 연방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는 혼잡 속을 이리저리 비집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입구로 나왔다. 차량들은 아직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중이었다. 슬리핑백과 가방과 담요를 가진 부부들과 털모자 달린 파카를 입은 젊은 자리꾼들이 차 옆에서 흥정을 하는 게 보였다. 번호표 받고 자리를 지켜주는 데 시간당 얼마라고 뜨는 비싸다고 번호표만 받아달라고 아니면 표는 있고 자리만 지켜달라고 수군거렸다. 그가 먼저 레인이라고 붉은 불이 켜진 네온 간판을 보았고 나는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몇 번이나 슬그머니 새버릴까 했다가도 그러지를 못했는데 어느 결에 나는 헤어진 아이들과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트렁크에 간단한 짐을 꾸려서 밤기차를 타던 정거장이 생각났다. 나는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내가 국경을 넘어 당도해야 할 그 어느 곳에는 의무와 동지애와 뜨거운 사람의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땅이 있으면 죽겠다고 실없는 공상을 했었다. 그리고 기차는 밤새껏 서울을 향해 달렸고 새벽에 요란한 쇠바퀴 소리에 잠을 깼을 때, 내가 똑같은 공상을 하고 십여년 전에 떠났던 서울이 거기 다가오고 있는 걸 보았다. 어떤 시였던가, 유리창 위에 떠오르던 몇 줄의 말.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과의 힘은 없는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따스함과 그리고 노여움이 날카로운 힘이 되어 솟아오르는.” 또는 이런 말도 있었다. “튼튼한 사나이들이 네댓 명 커다란 손을 벌리고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곳은 없는가. 구름이여 물론 나는 가난하지만 괜찮지 않은가 데려가다오.”
그를 따라 들어간 까페 레인은 나무벽과 벽난로와 플라스틱 나뭇잎으로 장식된 술집이었다. 간막이 쪽에는 여자들이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가 여자들 틈에서 하나를 불러내어 우리들 좌석으로 데려왔고, 나는 그가 집사람이라고 소개할 때까지 잠자코 앉아있었다. 여자는 그냥 가볍게 내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핸드백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쪽에 한 사내가 나타나 뭔가 나눠주기 시작하자 여자는 반쯤 일어섰다.
―사모님두 번호표 받으셔 야죠.
그의 아내가 손을 들어 보이더니 일어나면서 그에게 말했다.
―서류 보시구요, 당신 이름 옆에다 도장만 찍으면 돼요.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그 여자가 일어선 뒤에 그는 서류를 그냥 놓아둔 채 술집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술집을 빠져 나왔다.
다음 주에 그 동창생이라는 사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젠 정말 귀찮아져서 그가 저녁을 사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수화기 속에서 말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한 결과 다시 합치기로 결정을 봤네. 내 아내도 자네에게 미안하다는군.
〔창작과비평 1988 봄; 열애, 나남출판 1988〕
2016년 7월 14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