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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집권 시기인 2000년 9월1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북한의 송이버섯 전달식에 모습을 드러낸 박재경(오른쪽)의 모습. 박재경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인물은 김종환 당시 국방부 보좌관이다. 박재경은 1968년 1.21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이익수 대령(사건 이후 준장 추서)을 살해하고 北으로 돌아간 인물이다.1998년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 관련대금 6억 달러를 전용해 핵(核)무기 개발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선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가나안농장의 알림종을 치는 김용기 장로
가나안 농군학교는 개신교 장로인 기용기(1909년-1988년)가 "한손에는 성서를, 한손에는 괭이를"이라는 신념에 따라 1962년에 설립한 기독교 합숙교육기관이다. 교육과 노동을 통한 의식교육이 특징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인 교육기관으로 초창기에는 농업인을 대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정신교육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1962년 2월 9일 가나안농장을 둘러보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앞줄 왼쪽) 일행과 김용기 장로(앞줄 오른쪽)
박정희 대통령이 물론 가나안농군학교의 근면정신과 검소함을 새마을 운동의 힌트로 삼아서 새마을 운동정신에 반영하였다 . 5.16 군사 혁명 당시의 막강한 리더였던 육군 소장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그곳을 불시 방문을 했다. 그 때 군장성 30여명이 함께 했다. 점심으로 감자와 빵이 나와 먹으려 할 때 김용기 장로님이 막아 섰다. ‘여기서는 내가 대통령이니 내 말대로 따라야 한다’며 조국과 식사를 위한 감사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그리고 모두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고서야 먹을 수가 있었다. 그 후에 이 기도의 순간에 함께했던 장성 중에 여러 명이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그 때 받은 깊은 충격과 감동의 여파로 ‘새마을 운동’이라는 혁명의 구체적인 의지와 실천 항목을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얻은 셈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 참석하여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박정희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연설대 아래로 피했던 박정희는 다시 나타나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계속하였다. 범인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의 대한민국 입국과 총기 입수를 도운 일본인 전직 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1978)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포항제철 1기 착공버튼을 누르는 청암 박태준과 박정희 대통령. 두 거인의 만남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냈다.
포철은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 포항제철이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연간 조강 2천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하였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이를 지시한 대통령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한다. 첫 삽을 뜬 이래 4반세기 동안 연인원 4천만 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제철은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73년 7월에 포항종합제철 준공예정을 앞둔 시점에 현대 정주영회장을 청와대로 부른다. 당시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 뿐만 아니라 제2제철공장을 계획하고 있던터라 우리 기술로 생산된 제철을 단순 수출에 치중하기 보다는 생산된 제철의 부가가치를 높여 생산된 제품을 수출할 목적으로 정주영회장에게 조선소 건립을 마치 지상명령 내리듯 제안한다.
이를 듣고 있던 정회장은 얼굴 빛이 창백해 지며 어렵게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한다. "각하 현재 저희가 추진하고 있는 울산 현대자동차공장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동차 공장은 저가 꼭 해보고 싶었고 그에 대한 기술적 자신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소... 단순히 소형 고깃배도 아니고 수십만톤이나 되는 유조선등을 만들어야 하는 조선소 건립은 불가능합니다. 자동차공장과는 차원이 다른 종합적 첨단기술과 자본이 요구되는 엄청난 사업입니다. 저희 현대의 사활을 걸어도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있는 무모한 도전 입니다." 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박대통령은 대답은 진노에 가까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요즘 국내 내노라하는 기업들이 마치 자신들이 노력해 그렇게 된 줄알고 착각하며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는 정보를 나는 듣고 있소. 나는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그리고 정 회장, 지금의 현대가 정회장 개인거요? 지금의 현대가 성장할때 까지 정 회장 자신만의 노력으로 된 것인줄 아시오? 여기엔 정 회장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민 그리고 현대 소속의 근로자들이 다함께 피와 땀으로 일궈논 것이지 어느 특정인이 오늘에 현대가 있게한게 아니란 말이요. 그런 측면에서 볼때 현대 뿐만 아니라 내노라하는 이름있는 기업들은 모두 국민기업인 것이요. 어느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란 말이요.
야당의 극렬반대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과 내가 의기투합해 강력하게 추진했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면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위해 그 어려운 난관들을 해쳐나온것이요? 오직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민족의 제단앞에 우리의 목숨을 걸자고 다짐하면서 추진한것 아니요. 나역시 내가 구상하고 추진하려하는 조선소건립과 완공 후 생산되는 선박이 단순한 선박이 아님을 잘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 일을 추진하고 성공해야만 하오. 모든 뒷받침을 정부가 나서 지원할테니 곧바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시오. 외자유치 부분에선 정부가 보증을 서 주겠소.
이렇게하여 박 대통령이 정주영회장께 마치 지상명령하듯 추진한 울산 현대조선은 착공 2년뒤, "조선소 건립추진으로 현대가 날아갈 수있다하며 불가능하다" 말한 정주영회장에 의해 1974년 6월에 26만톤급 유조선 어클랜틱바론 1,2호를 건조해 육영수여사님이 진수식 테잎을 끊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김재규가 총을 꺼내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그 당시 함께 있었던 신재순씨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 자신들이(김재규 부장과 거사 계획에 가담했던 중정 요원들)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다고 확신해서 안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데려다 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 이후 입이 무거운 여자가 됐지요.”
“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입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다음은 아내 잃은 대통령의 허전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전해주는 일기의 한 부분이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李慶齡 여사)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 마디 없소.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 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1974년 9월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
마오쩌둥,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이들은 얼핏 보기엔 아무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국가 주도로 경제개발계획을 실천에 옮긴 최고권력자다. 경제개발계획은 스탈린이 원조다.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따라 공산국가만이 아니라 비동맹 국가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후진국들은 다투어 경제개발계획을 밀어붙였지만, 이들 중 성공한 지도자는 박정희와 등소평뿐이다. 왜 그랬을까?
마오쩌둥의 대약진(大躍進))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0년부터 1961년말-1962년초 까지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 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철강 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3,00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 난다. 이 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 회복을 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4,0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사상 최악의 굶주림과 기아로 사망하자 4년째인 1962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한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했다. 이 대약진 운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원시 공산주의 실험이었다. 비록 4년(1958-1962)에 불과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정부 공식 발표로만 비자연적으로 사망한 수가 2,158만 명이고, 동서양의 다른 자료들에 의한 추가 사망자 수는 약 2,000만 명이다. 주요 사인은 아사였고, 학자들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구황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약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망자수(5000만 명~85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전쟁 한 번 없이 굶어 죽게 함으로써 경종을 울리며 끝이 났다.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 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옛 소련이 붕괴한 뒤 모스크바 체카의 문서가 공개되고 역사가들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발생한 전체 사망자 수를 처음으로 사실에 기초해 파악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1937년에 35만 3천 명이, 1938년에 23만 9천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1944~1948년에 소수 민족 강제 이주 과정에서 14만 명이 죽었습니다. 또한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숫자가 1933년 2백50만 명에서 1953년에 5백50만 명으로 늘어났고, 수용소 내 사망률은 일반주민들에 비해 5~9배나 높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강제 집단화로 인한 기근 때문에 5백만 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역사가들은 스탈린 체제가 매우 유혈적인 체제였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우상화를 추진해 나갔다. 스스로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 찬양받았다. 스탈린의 초상화나 동상이 소련 내 곳곳에 걸리거나 세워졌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가 만연했다. 한편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고위 정치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천리마운동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였다. 천리마운동의 시작은 1958년부터였다. 그러나 이후 북한 역사가들은 천리마운동이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끔 그 운동이 195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조작하였다. 1956년 당시 김일성은 전원회의를 통해 당 일꾼들은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 대중의 창발성을 최대한 발동시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기한 내에 완수하자고 제기했으며, 직접 강선제강소에 현지지도를 나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열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당초 6만 톤의 생산계획을 생산경쟁운동을 통해 12만 톤으로 초과달성하게 되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천리마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이 운동의 전개로 제1차 5개년 계획(1957~1961년)은 전 부문에 걸쳐 예정보다 빠른 2년 6개월 만에 목표를 달성하였다. 천리마처럼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듯한 느낌의 글자체 천리마체까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천리마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체를 관통하는 북한 사회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운동의 한계성에 따라 천리마운동이 퇴색하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1976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이라는 이름의 경쟁운동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80년대 속도, 90년대 속도 등의 구호가 내걸리기도 했으며 1999년부터는 제2의 천리마대진군의 구호로도 변형되기도 하였으며 김정은 정권 들어서는 만리마속도창조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부단한 정치사상교양과 노동생산성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방법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본투자와 기술혁신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은 채 노력동원과 속도경쟁에 기초한 경제 건설방식은 초기에는 비약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지만, 점차 피로도 증가와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 의해 성장이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하였지만 90년대 말부터 고난을 겪는다. 미국의 학자들은 당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게는 60만 명, 많게는 100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학자인 이석박사는 아사자의 숫자가 58만명에서 98만명정도로 추정하였다. 얼마 전에 독일 학자 2명은 최신자료를 분석함으로써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게는 25만명, 많게는 49만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종합해보면 고난의 행군 때 아사자들이 50~60만 명 정도라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통계라고 생각된다. 북한 전체 인구의 2%가 굶어 죽은 것이다. 아시아의 역사에서 지난 50년 동안 전체인구의 2%가 굶어 죽는 대기근을 겪은 나라는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 뿐이다. 김씨 일가가 지배해 온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이 ‘영원한 수령’으로 개정되며 김씨 일가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김씨 일가 왕조에서 최고지도자에 관한 충성도에 의해 성분이 높은 자가 후진된 다른 북한 지역보다 발전 수준이 높아 천국처럼 보이는 평양에 살 권리를 얻는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와 조직지도부, 국가보위성이나 다른 당국 요원의 분노를 일으킨 자가 지옥과 같은 정치범관리소에 수감된다.
한국의 지식인은 너나 없이 제1공화국이 초안하고 제2공화국이 기획한 경제개발정책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박정희의 경제 기적을 폄훼한다.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그러면 왜 제2 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과 빼다 박은 경제정책을 쓴 네루와 스탈린과 모택동은 수천만 명을 굶겨 죽였는지 모른다. 그들이 주장하는 경제정책을 거의 그대로 쓴 중남미 국가들이 왜 100년 이상 독재와 빈곤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박정희도 처음에는 경제를 거의 몰랐으니까, 계획만 대충 세웠을 뿐 실천은 엄두도 못 냈던 이전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계획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첫 해가 1964년이다.
2차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서방 선진국에서는 이미 용도 폐기되었지만,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제국주의의 음모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웅크리는 '고슴도치' 전략이 바로 네루와 모택동과 김일성의 민족주의다. 해방후나 건국후에 그들은 자연히 자립경제를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방된 지 얼마 안 되는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든 장면이든 경제정책의 목표는 자립경제였다. 그래서 공산권이든 제3세계든 대체산업 및 국영기업 육성과 보호무역 고수는 경제정책의 불문율이었다. 뜨거운 애국심만 있었지, 경제를 몰랐던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3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고슴도치 경제계획은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경제정책은 호랑이와 사자와 독사가 득실거리는 경제 정글로 박정희는 한국의 산업전사들을 방물장사의 보따리만 하나 들려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열정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의 장관을 제대로 뽑아 하나같이 장수 장관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는 명 장관이 되었다. 박정희는 그들의 아이디어와 말을 경청하였다. 1967년과 1969년과 1971년부터 최형섭과 김정렴과 오원철을 KIST 소장(후에 과기처 장관)과 비서실장과 경제2수석으로 임명하고 1978년 12월 또는 1979년 10월 26일까지 과학기술과 경제 전반과 공업을 주도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도 무수한 난관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일 중독에 빠진 이들 장관을 위시한 여러 세계적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18년 동안 세계제일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박정희는 국내의 해외 박사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도 않았다. 손에 잡히는 현실과 상식을 따랐다. 그는 우선 국내 기업을 키웠다. 터무니없이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하나 목표를 달성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가발, 합판, 섬유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석유화학, 철강업, 조선, 전자, 자동차 산업 등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중화학공업을 독일, 일본 이후 세계 최초로 미국과 당당히 맞서는 대기업을 일궜다. 어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적이다. 박정희는 반드시 시차를 두고 국내에 한 업종에 2개 이상의 기업을 키웠다. 그렇게 국내서 치열한 경쟁을 하게 만들고 곧장 해외로 진출시켰다. 어느 정도 커진 기업은 적극적으로 주식시장에 상장시켰다. 그런 식으로 기업들이 자본을 조달하게 하는 동시에 사실상 대부분의 주식을 국가와 사회에 환원하게 만든 것이다.
박정희는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는 세계 최후진국에서, 곧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선행시키고 동행시킨 게 2가지 있다. 그것은 법률 제정과 교육 입국이다. 정치 안정을 바탕으로 그는 항상 경제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법률을 먼저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이 편법이나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행위가 되도록 그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경제의 밑바탕은 인력이라는 것을 알고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기능공과 기술자를 키우기 위해 공고와 공대를 대대적으로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매년 50만 개 내지 10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자 상대 출신들도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를 띠었고, 인문대 자연대도 대학 졸업장만 손에 쥐면 어디든 취직이 되었다. 국졸, 중졸 산업전사를 위해서는 산업체 부설학교도 개설하여 주경야독하는 그들에게 정규 학교와 똑같은 학력을 인정했다.
박정희는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가 커지자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농민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열정을 깨워 일으켰다. 70년대 말에는 도농간의 소득을 역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는 농촌마다 마을회관을 건설하여 거기서 거의 날마다 자치적으로 마을 전체가 다 함께 잘 살도록 만드는 건설적인 회의를 거듭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혼자 다 한 듯이 기고만장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이후의 국회보다 10배는 더 나은 민주주의도 농촌마다 뿌리 내리게 했다.
박정희는 환경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공장들은 대부분 오염을 가장 덜 일으키고 수출하기도 좋도록 임해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거기에 건설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의 환경오염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산업화 초기에 오염이 적었다. 환경보전의 입장에서 보아, 박정희는 무엇보다 산림녹화에 성공했다. 박정희 덕분에 전국에 깔려 있던 민둥산이 모조리 푸른 치마를 입었다. 한국은 현재 산림면적비율이 63.8%로 핀란드 75.5%, 스웨덴 73.5%, 일본 68.9%에 이어 당당 세계 4위다. 여기서 나오는 산소는 4800만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해 준다. 5위는 캐나다인데 45.3%로 우리나라에 한참 뒤진다.
박정희의 산업화는 인정하지만 그를 독재자로 매도하는 데 서슴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을 가장 객관적인 사람으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가장 양심적인 사람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온 몸으로 겪고도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6·25의 상흔과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한 1960년대와 무장공비가 청와대까지 쳐들어오고 월남이 적화된 1970년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지도자가 누군가. 시대상황과 정치수준에 맞추어 정치적 자유를 일부 제한한 것을 독재라고 한다면, 선거 천국에 거지 왕국을 만들고 3000여개에 이르는 카스트 제도를 온존시킨 네루를 어떻게 민주주의자라 할 수 있는가. 박정희와 더불어 공산국가에서는 처음으로 경제개발계획을 멋지게 성공시킨 등소평은 비록 경제는 일으켰지만 천안문에서 비무장 학생과 노동자를 탱크와 총으로 진압하고 13억 인구 중에 야당을 단 한 명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를 보고는 독재자라고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가. 동족을 30만명 이상을 굶겨 죽이고 2천만 북한 주민에게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마저 주지 않은 김일성에 비하다면 어찌 박정희를 독재자로만 볼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장한 민주주의가 참 위험한 민주주의이다. 문민정부들어선 후의 민주주의를 생각해보라.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자로 확신하지만 기껏 '선거'민주주의 곧 군부의 입김 없이 선거만 하면 그것이 곧 자유민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권력의 칼을 정의의 칼이라며 마구 휘둘러 시대에 역행하는 악법을 양산하여 전국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현재 박정희를 독재자로 가차없이 매도하면서 박정희 시대에 한 번이라도 데모한 적이 있는 사람이면 백두산처럼 우러러보며 부모형제보다 가깝게 여기고 있다. 핵 폭탄과 미사일로 위협하는 김정일에게 두 '햇볕' 정부보다 더 화끈하게 퍼 주는 것을 진보와 개혁과 평화라고 당당히 외치고 있다. 이 땅에서 자유가 사라져가고 있다.
월남이 비행기가 모자라서 망했나 탱크가 모자라서 망했나? 아니면 보병의 수가 적어서 망했나? 월남이 망한 것은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월남의 모든 상황은 베트남의 공산군인 월맹보다 월등히 나았다. 월맹의 보병은 25만인 데 비해 월남은 미군과 한국군을 포함해서 150만이 되었고 비행기나 탱크도 월맹보다 50배나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월남이 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대통령 티우가 정책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북쪽에 있는 군대를 대기 이동시킨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의 나름대로 전략이 있었겠지만 그는 환경의 변화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몰랐던 것이었다. 그래서 월남군이 월맹의 공격을 받고 후퇴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군인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장갑차와 탱크도 줄을 잇고 이에 피난민조차 홍수처럼 밀려 내려오는 이 행렬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 광경을 본 월남민들의 마음속에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엄습해 왔다. “이제 우리 월남은 월맹에게 졌구나! 이제는 망했구나.”하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싸우겠다는 의욕을 잃은 월남은 쉽게 월맹에게 패해 망하고 말았다.
카터와 다른 레이건 대통령
링컨 다음으로 많은 우스개와 名言을 남긴 미국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다. 그는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물으니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즉답한 사람이다. 오랜 對좌익투쟁에서 체득한, 反共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에다가 위대한 인간성을 보탠 이다. '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狂信者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는 오웰의 충고를 실천한 이다. 그는 말의 힘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 그것도 웃으면서. 로널드 레이건을 유명인사로 만든 것은 1964년 10월27일 미국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위하여 한 방송연설이다. '운명과의 랑데뷰'라는 제목의 이 연설에서 레이건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잃게 된다면, 역사는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막기 위하여 한 일이 가장 적다는 사실을 가장 큰 놀라움으로 기록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면서 체제파괴 세력을 돕는 이른바 '강남좌파'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강남좌파란 진보성향의 고학력-고소득자를 칭하는 일종의 수사어. 강준만이 저서의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빈번히 인용되기 시작했다. 이 집단의 사람들이 강남 수준의 소득과 학력을 가졌으나 정치적 성향은 진보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붙었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강남, 서초에서 10%차의 대승을 거두었다.
1981년 6월 백악관 기자실에서 정례 회견을 하던 레이건 대통령에게 UPI 기자가 물었다.
'폴란드에서 지난 열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東歐(동구)에서 소련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단초가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레이건은 말했다.
'어떤 형태의 정부도 국민들에게 자유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고 그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그 첫번째 균열의 시작, 즉 종말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년 뒤 폴란드에서 선거를 통해서 공산당 정권이 밀려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이것은 동구뿐 아니라 소련 공산 제국의 멸망이란 연쇄반응을 부른 뇌관의 폭발이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 운동이었고, 레이건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레이건이야말로 무장한 예언가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불경기의 책임을 前 정권에 돌리는 듯한 말을 하자 한 기자가 물었다.
'대통령 각하, 각하는 불경기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잘못이나 의회에 책임을 돌렸습니다. 지금 각하가 책임질 일은 없습니까?'
레이건은 즉답을 했다.
'제가 책임 질 일이 있고 말고요. 저는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거든요.'
1980년 大選에서 현직 대통령 카터를 이길 때 그가 만든 유명한 구호는 이러하였다.
'경제불황은 내 이웃이 失職者(실직자)가 되는 걸 의미한다. 경기침체는 내가 실직자가 되는 걸 뜻한다. 경기회복은 지미 카터가 실직자가 되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 바쁜 중에도 일기를 꼬박 꼬박 썼다. 1988년 1월14일 목요일에 쓴 일기.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안기부가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를 세상에 드러내면서 사건 진상을 발표한 날의 일기였다. 1988년 6월28일(화요일)자 일기에도 서울 올림픽이 등장한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휴전선에는 북한군이 10개 사단을 더 배치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위협하는 도발을 할지 모른다. 소련은 그런 도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한 바 있다.' 레이건은 서울올림픽이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예감을 가졌는지, 그 성공을 위하여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담은 主題語는 <벽을 넘어서>(Breaking down the wall)였다. 이는 李御寧씨의 작품이다. 東西이념의 벽을 넘어서 이루어진 서울올림픽은 그 다음해 동구권 공산체제가 무너지는 일에 一助를 하였다. 동독의 민주화 시위대는 서울올림픽 主題歌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를 불렀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 현장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名言이 역사를 바꾼 경우이다.
레이건은 1964년 연설에서
"평화를 순식간에 얻는 확실한 방법이 있긴 있다. 바로 항복이다." 라고 통렬하게 갈파했다.
그러나 항복으로 얻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죽음보다 못한 노예의 굴종일 뿐이다.
고대 로마의 베제티우스(Vegetius)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는 말이다.
평화는 대화를 구걸하거나 하염없이 적을 달래는 것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레이건은 이미 49년 전 연설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국민들이 왜 박정희를 추억하고 있는 것인가? 레이건의 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