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따끈, 갓 지은 밥 한 그릇에 시린 몸과 맘을 녹이고 싶은 계절이 왔다. 비록 요즘의 밥상에서 쌀의 존재감이 점점 미미해지고 있지만 예부터 우리는 ‘밥심’으로 힘을 냈다. 잘 지은 맛난 밥 한 그릇에는 단순히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울 안국역 쪽 인사동길 초입의 ‘조금(鳥金)’은 밥이 보약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소문난 밥집이다. 무려 37년째, 한국적 풍경이 그득한 인사동 한자리에서 정성 어린 일본식 솥밥으로 손님들의 발길을 꾸준히 모으고 있다.
이 집은 외관부터 일본 현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낮은 지붕에 격자로 창살을 댄 자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 천으로 마감한 벽과 둥근 조명의 어두운 실내가 차분하게 다가온다. 실내는 그닥 넓지 않지만 왼쪽 입식 테이블과 함께 오른쪽 다다미방에 좌식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골라 앉을 수 있다.
메뉴는 ‘조금솥밥’과 ‘양송이솥밥’ ‘전복솥밥’ ‘우동’이 있고 술안주나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숯불꼬치구이가 있다. 모든 솥밥은 주문 즉시 밥을 안치기 때문에 15분 이상 걸린다.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미리 원하는 메뉴를 예약하는 것이 필수.
솥밥은 한 사람당 쟁반 하나씩에 솥밥과 반찬 몇 가지를 담아준다. 그런데 이 집 솥밥은 콩 몇 쪽 올라간 흔한 솥밥이 아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풍성하고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온다. 특히 대표메뉴인 ‘조금솥밥’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와 굴, 관자, 양송이, 맛살, 대추, 은행, 죽순, 당근, 우엉 등 갖은 재료가 비벼 먹기 아까울 정도로 정갈하게 올라가 있다. 화려한 색감에 눈이 먼저 즐겁고 고소한 향기에 군침이 싹 돈다.
우선 뜨거운 밥만 한술 떠서 후후 불면서 맛보면 해물과 채소에서 나온 감칠맛이 밥알 하나하나에 폭 배어 달고 맛깔스럽다. 되거나 질지 않은, 촉촉하고 폭신한 밥맛이 혀에 착 감긴다. 탱글탱글한 식감의 새우나 굴, 관자 등을 밥과 조금씩 비벼 먹으면 재료별로 고유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찬다. 비비지 않고 재료를 하나씩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 밥에 올려 먹는 맛도 좋다. 밥 자체가 심심해 양념장을 곁들여도 좋지만 반찬으로 나오는 한치 젓갈, 단무지, 짠지 등 짭짤한 일본식 밑반찬을 밥에 조금씩 올려 먹어도 깔끔하다.
보통의 솥밥은 밥을 덜어낸 뒤 돌솥 안에 뜨거운 물을 부어 숭늉을 만들어 먹는다. 하지만 이 집 솥밥은 밥을 덜어내지 않고 솥째로 비벼 먹기 때문에 숭늉을 따로 만들어 먹을 수 없다. 바닥 쪽 밥이 타지 않도록 숟가락을 깊숙이 넣어 바닥을 조금씩 긁어가면서 먹는 것이 좋다. 마지막에 누룽지처럼 바삭한 밥을 원한다면 조금 오래 둔 뒤 긁어 주면 된다.
37년 전 맛과 모습 그대로
‘조금’의 솥밥을 먹고 싶은데 해물이 별로이다 할 때는 양송이 솥밥이 제격이다. 해물 대신 팽이버섯과 양송이버섯이 가득 들어가 있고 은행과 밤, 죽순, 대추 등이 더해져 있는데, 밥알에 버섯 향이 은근히 녹아 있어 먹을수록 당기는 맛이다. 큰 전복과 굴, 채소 등을 푸짐하게 올린 전복솥밥은 몸보신용으로 인기가 좋다. 사실 어떤 걸 먹어도 정성 가득한 따듯한 밥, 몸에 좋은 건강영양식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특히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먹고 난 뒤 속이 편하다.
1980년 일본식 솥밥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최희자(75)씨는 ‘조금’의 문을 열었다. 여섯 살 때 일본인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최씨는 한국인으로 귀화해 한국인 남편과 결혼했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결혼 후에도 일을 원했던 최씨에게 친정어머니는 일본식 솥밥의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거기에 최씨만의 연구를 접목해 ‘조금’의 솥밥들이 탄생했다.
일본식 솥밥은 재료를 잘게 썰어 철냄비에 짓지만 최씨는 우리의 뚝배기에 재료를 큼직하게 썰어 올려 먹음직스럽게 밥을 짓는다. 철냄비보다 뚝배기에 밥을 지었을 때 더 맛있고 온기도 오래 유지되어 끝까지 따듯하게 먹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일본 손님들이 찾아와 일본에서 먹던 것보다 더 맛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솜씨가 좋았지만, 당시 일본식 솥밥이 알려지지 않아 처음 2년간은 손님이 별로 없었다. 때마침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형부 김병수씨(작고)가 손님들을 모시고 오면서 차츰 입소문이 났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심 피크타임에는 예약 없이는 자리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본관 옆 별관 1층과 룸으로 된 2층은 예약손님만 받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은 주로 별관을 찾아 식사를 하곤 했다.
오래된 음식 명가들이 그러하듯 이 집도 부모님과 함께 오던 자녀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 긴 세월 단골들의 말은 언제나 한결같다.
“주인도, 분위기도 안 바뀌고 음식 맛도 그대로라고들 해요. 그런 말 들을 때 가장 뿌듯하지요.”
최씨는 37년 전 가게 인테리어를 할 때 벽지 등 자재를 일부러 넉넉히 구비해두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보수만 하면서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기에 언제 가 보아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되찾게 해준다.
최씨는 종업원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하라는 친정어머니의 당부대로 매일 이른 아침 일찍 나와 장을 본다. 남대문시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 재료들과 여수에서 직송한 신선한 해물을 뚝배기에 안치고 15분에서 20분 정도 정성껏 밥을 짓는다. 센불에서 밥을 짓다가 밥물이 끓으면 온갖 재료들에서 감칠맛이 우러나오고 은근한 불로 뜸을 들이면 밥알 하나하나에 재료의 맛이 깊게 밴 내공의 솥밥이 완성된다. 상에 나갈 때 참기름과 통깨를 뿌려주는데, 참기름 하나도 직접 방앗간에서 짜올 만큼 정성을 들인다. 양념장은 다싯물을 내어 간장에 섞어 감칠맛을 더하고 된장국은 밍밍하지 않도록 일본된장에 조선된장을 섞는다.
한국인 입맛에 어느 정도 맞춘 일본식 솥밥이지만 김치만큼은 내지 않고 있다.
“김치는 양념 맛이 강해서 우리 집 솥밥의 은은한 맛을 방해해요.”
손님이 아무리 김치를 찾아도 최씨가 일본식 절임반찬만 고집하는 이유이다. 추석과 설 명절 당일만 쉬고 연중무휴라 최씨는 그간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가 봤다. ‘조금’에 청춘을 바쳤지만 잊지 않고 찾아주는 손님들 덕분에 후회 없이 행복하다. 2년 전부터는 아들 이진수(47)씨가 나와 본관을 책임지기에 최씨는 이제 매일같이 별관 카운터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