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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정말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실건가요?
무엇인가를 청하기 좋아하고 받기를 좋아하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희소식 한 가지를 건네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 ‘무엇이든지?’라는 표현에 의문 부호를 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고 주실 것인가요? 진짜? 확실한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손이 닳도록 빌면서 청하고 또 청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지난 세월은 어떡합니까? 누가 책임져 줄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보상해주실 건가요?
결국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인 듯합니다. 물론 세상에서의 성공과 승승장구, 건강, 합격, 승진, 화목, 평화...이런 것들, 당연히 청해야 마땅합니다. 우선 내가 건강하고, 내 가족이 평화로워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느님도 섬기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청하는 그런 요소들이 지닌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손에 움켜쥔 한줌 물과 같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멸성, 영원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 하신 것은 그런 작은 것,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영원한 대상, 보다 충만한 대상,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대상을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그 대상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청원기도 때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세월 흐르면 다 지나갈 별것 아닌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대상인 성령을 청해야겠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도록, 내 안에 머무시도록,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나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중간을 배제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임금이 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금에게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이에게 복을 줄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고 아버지께 은총을
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돈벌레라고 불리는 그리마가 또 한 마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징그러워서 휴지로 집어 변기통에 내렸는데, 이것이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벌레라고
하기에 그다음부터는 고이 잡아 창문 밖으로 놓아주었습니다.
돈벌레란 이름도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엔 책 표지 위에 그놈이 올라오게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몸집이 큰 놈이라 귀찮아서 손으로 집어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벌레는 저에게 잡힌 자신의 다리들을 자르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손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다리 몇 개 잃은 벌레를 책표지 위에 얹어서 내보내 주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는 마치 사람과 돈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너무 이해할 수 없어서 책 표지 위에 올라오는 조금의 부자유스러움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이용한 책 표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아버지께 청을 드려 무엇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대신 청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우리가 직접 청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면서 아버지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예수님은 소외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보화를 얻게 됩니다.
그 보화가 성령이십니다.
본당 신부를 잠깐 하며 보았더니 본당에서 수녀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여도 그것을 들어주면 수녀님 처지가 난처해지는
청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신부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울상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런 일들은 본당 신자들과 주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본당에 발령받아 온 사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임기도 안 끝났는데 바꿔 달라고 투서를 하면 주교님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조금 나은 신부님이 새로 부임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교님과 그 이전 신부님과의 사이를 안 좋게 만든 본당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자녀의 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까?
이는 마치 죄를 용서해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였는데 교회는 소외시키고 직접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성당에 나와 고해성사를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한 이를 먼저 소외시키지 않는 한에서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합니다.
그 청하는 것이 중간에 있는 이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이고
그러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23-28: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할머니를 말씀하시면서, 이 할머니는 신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훌륭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할머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할머니께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주셨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실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성모님은 (할머니는 자기 집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교황님은 할머니께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성모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대답에 교황님께서는 감탄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 가리키신 것이 성모님의 삶이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언제나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보다 세상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논리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즉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주 흔들리면서 세상의 뜻을 따르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그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즉,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쫓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거름 삼아 예쁜 꽃을 피우는 과정임을 배우는 것(하지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27)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첫새벽을
그분께 봉헌하러
성당으로 달려간다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칠 수 있다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담담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였으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오늘 복음에서 ‘청하다’는 표현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관계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거기에 응답을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한정으로 다 주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 주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실 수 없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채소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청할 수 없고
카페에 가서 채소를 달라고 청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게 카페에 가서
채소를 달라고 하거나
베스킨라빈스에 가서
채소를 달라고 하는 사람은 아닌지...
내가 지금 주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 사람인지부터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과
응답을 하는 내가
상호교감과 소통이 잘 될 때
얻어지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골수에
새기고
사무쳐야 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건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밝은
이정표가
됩니다.
사랑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도
새날을
맞이합니다.
사랑은
기도로 드러나고
진정한 사랑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한없는
삶의 진리
사랑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실천을 배웁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생명과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에서
만납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사랑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기쁨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16,23)
'무엇을 청해야 할까?'
오늘 복음(요한16,23ㄴ-28)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매일 아니 매순간 많은 것들을 청하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
무엇을 청해야 한다는 말씀인가?
누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는 말인가?
'성령'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청합시다!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가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총의 시작이요 출발인 성령을 청합시다!
이 성령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창고를 활짝 열어놓읍시다! 그래서 많은 은총을 받고,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부활이 됩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16,28)
예수님의 고향은 하느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내일은 주님승천대축일인데, 예수님께서 고향인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심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떠나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랑의 마음으로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도 예수님의 고향인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기뻐할 수 있도록, 성령을 청하고, 이 성령의 자리인 내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도록 합시다!
복음 말씀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