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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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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공양의 의미
질문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육법공양을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스님께 그 의미에 대해서 여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려는 보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보리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화엄경』에도 쓰여 있다고 하시면서 제일가는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등, 향, 차, 꽃, 과일, 쌀은 일반 서민들도 접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물건들인데 어떻게 이것이 그렇듯 귀중한 공양물이 되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큰스님 말씀
공양을 올린다고 할 때 초공양, 향공양 이거를 제일 먼저 하죠. 그래서 초공양을 할 때 이 초에 불을 켜고 자기 모습을 태우듯이 태우고 가죠. 그렇게 자기 모습을 태우듯이 촛불을, 마음의 불을 켜기 때문에 모든 업보와 또는 인과성, 유전성 또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다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이 불을 켜듯이 내 몸을 태운다. 이것은 무명도 벗기고 모든 욕심, 집착, 관습 이런 것을 모두 태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우리가 초를 켜는 거와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을,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을 방편상 보이게끔 이렇게 초를 켜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초 켜는 거와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거와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렇게 초를 켜서 무명을 다 사르고 나면은 향공양을 올리시죠. 향을 공양을 올려서 그게 두루 향내음이 날 때 비로소 그것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이 모든 향내음으로서 공식을 삼는다. 즉, 양식을 삼는다. 그런데 공식이란 건 전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양식을 삼는다 하는 소립니다. 이것을 우리가 공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올리는 것이 꽃공양입니다. 마음의 꽃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꽃을 예뻐서 갖다 놓는 게 아니라 마음의 꽃을 올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서 상징이 되는 것이 꽃입니다. 가섭 존자도 꽃을 드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얼굴로서 꽃을 피웠다고 하는 얘깁니다. 그거와 다름없는 꽃공양. 꽃을 그냥 올리는 게 아니라 꽃공양이라고 그랬습니다. 두루 한다는 뜻이죠. 꽃공양을 올리게 되면은 마음의 그 꽃을 피워서 이 한 단계가 넘어가면은 열매가 맺는다.
그 뒤에는 과일공양이 올라갑니다. 과일. 그래서 그 마음의 꽃이 피는 데에 그 단계가 올라가면은 열매가 맺어서, 이 모습을 나무라고 한다면 제 나무에서 스스로서 무르익은 과실은 일체 중생이 먹고도 남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갖은 각색의 과일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꽃과 과일을 공양 올리는 것은 그러한 뜻에 있는 것입니다. 이거 그냥 무턱대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또 떡공양을 올립니다. 모가 나지 않게 둥근 떡을 올릴 때는 떡이 떡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지구의 공기주머니에 들어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듯이 둥글게 그냥 떡 하나입니다. 떡공양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느냐. 둘로 보지 말라. 너의 생명같이 생각하라. 너의 모습같이 생각하라. 너의 아픔같이 생각하라. 네가 배고픈 것같이 생각하라. 또 내 부모와 같이 생각하라. 내 자식과 같이 생각하라. 내 형제와 같이 생각하라. 이 전부 둘 아닌 도리, 즉 말하자면 공생이며 공심이며 공체며 공용이니 공식으로써 이렇게 전부 두루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떡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다.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꾸려도 바꿀 수 없는 떡 하나다. 이 떡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도 방편이다 이겁니다. '한 점'이라고 해도 되고 '한 떡'이라고 해도 되고 '한 꽃'이라고 해도 되고 '한 물'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것은 뭐, 이름은 이름이지 그거는 진실한 실천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 놓는 겁니다. 떡은 표현, 방편을 여러분이 잘 알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마는, 우리 지구를 볼 때도 이게 떡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그 떡 안에 우리가 다 살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가 그 떡을 지금 공양 올리는 건 모두가 같이 하고 있다는…. 그렇기 때문에 떡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다기 올리죠. 맨 마지막이 다기예요. 모두들 그저 먼저 올리고 나중 올리고 그러지마는 이 뜻으로 볼 땐 그렇단 말입니다. 다기는 이 큰 바다와 같은 겁니다. 이렇게 다기, 조그마한 그릇의 물 하나지마는 큰 바다로 비유합니다. 부처님한테 올리는 다기는 그렇게 크단 얘기죠. 그래서 이 다기공양을 올린 때 이것이 바다에 구정물 흙물 고름물 송장물 뭐, 별의별 것이 바다에 다, 고기 썩는 물 다 들어가도 여여하게 아무 지탄 없이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바다에서는. 싫다 좋다 말 없이 말입니다. 지금 시쳇말로 하면 다 받아들여서 수증기로 올린다 하죠. 그 요만한 그릇의 다기 하나가 큰 바다로, 바다가 돼서, 바닷물이 돼서 어떠한 물이든지 모두 다 바다에 한데 합쳐져서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를 해서 다시 내려온다면 요만한 풀 한 포기도 안 먹여 살리는 게 없다. 생각해 보세요. 바닷물이 수증기로 정화돼서 다시금 내려올 때는, 풀 한 포기도 물 안 먹고 못 견디죠. 작은 건 작은 것대로 먹고 큰 건 큰 것대로 먹고 양껏 먹죠, 모두.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렇게 먹일 수 있느니라 한 뜻입니다.
그래서 다기공양을 올리고 떡공양을 올리고, 밥공양도 마찬가집니다. 밥을 해서 공양을 올리는데, 공양미로 올리는데도 한 공양입니다. 한 그릇의 공양. 떡 하나를 가지고 지구 하나다 이래도 되고,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지구 하나다, 우주 하나다 이렇게 해도 됩니다.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생명들이 다 살고 있으니까요. 그곳에 다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는 허공중에 공 하나가 둥둥 떠 있는데 그 공 속에서 우리는 갇혀서 살고 있어요. 갇혀서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 육법공양을 올리는 원인은 '이 공 속에서 좀 벗어나게 해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