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에이모 토울스
이것이 바로 젠틀맨, 신사의 품격!
눈을 뜨면 향기 나는 커피 한잔과 비스킷, 그날의 과일 몇 조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품격 있는 남자가 있다. 키 190cm의 장대한 골격에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면서,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귀족인데 아침이 너무 단출한 거 아니냐고?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과거의 빛나던 시절은 끝이 났다. 신분제도는 사라졌고, 백작이라는 신분은 우리로 치면 옛날 조선시대의 양반 계급처럼 구닥다리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혁명이 일어난 시절 그는 프랑스에 있었지만, 혁명이 끝난 후 제 발로 러시아로 들어왔다. 구시대의 유물은 모두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던 시절이라 당국이 보기엔 그가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가 지은 시 한편 때문에 혁명 반동분자가 아닌듯하니 봐주겠다는 판결을 내렸고, 대신 백작은 평생을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구석의 작은 찬장에서 조그만 크림 주전자와 영국제 비스킷 두 조각, 그리고 과일 하나(오늘은 사과였다)를 꺼냈다. 백작은 커피를 따른 다음 아침의 감각이 온전히 살아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삭아삭한 사과의 새콤함....
뜨거운 커피의 쌉쌀함...
약간 맛이 간 듯한 버터의 풍미를 내는 향긋한 비스킷의 달콤함....
그것은 너무나 완벽한 조합이어서 백작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커피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돌리고, 사과를 네 조각으로 자르고, 비스킷을 덜어 식사를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
< 모스크바의 신사 p. 276>
판결을 받기 전 화려한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지내던 백작은 판결과 함께 호텔의 꼭대기, 좁은 다락방에서 지내게 된다. 평생을 대저택에서 수많은 시종들의 수발을 받으며 살아왔던 귀족으로서는 처음 맛보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욕에 굴복하지 않는다. 옛날 선비들이 곧 죽어도 밖에서 일은 못한다고 책만 읽겠다고 버텼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해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이프 성에 갇힌 에드몽 당테스의 경우, 그의 정신을 말짱하게 유지해준 것은 복수에 대한 생각이었다. 부당하게 갇혀 사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복수할 계획을 설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켜나갔다. 세르반테스는 해적들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노예가 되었지만, 그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자극제가 된 것은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중략..)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 백작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인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억류자일 터였다. 그것은 바로 해안으로 떠밀려 온 영국 국교도였다. 배가 난파되어 '절망의 섬'에서 살게 된 로빈슨 크루소처럼 백작은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해나가야 하리라. 」
<모스크바의 신사 p.53>
침대 하나와 책상, 옷장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들일 수 없는 작은 다락방에서 그는 스스로 또 하나의 비밀공간을 개척해낸다. 옷장과 붙은 벽을 뚫어 옆방의 짐이 가득 들어있던 방을 자신만의 비밀 서재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어떤 환경이 닥쳐와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의자를 뒤로 기울여 두 다리만으로 의지한 채 까딱까딱하며 책을 읽는다. 분명 호텔 안에 감금당한 자의 답답한 심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읽으면서 '근데 왜 부럽지?' 하는 생각이 든다. 로스토프 백작은 귀족 특유의 거만함보다는 잘 다듬어진 매너와 친절함, 특유의 쾌활함을 지녔다. 그는 호텔 직원들과도 격없는 사이를 유지하면서,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9살 꼬마 니나와도 친구가 되어 호텔 곳곳을 탐험하는 모험 기질도 있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로스토프 백작이 호텔에서 지내는 32년의 세월을 연대기처럼 차례차례 설명하는 책이다. 우리네 대부분의 인생처럼 소설은 특별한 극적인 사건 없이 잔잔하게 백작의 삶을 보여준다. 근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러시아 역사를 전혀 몰라도, 두꺼운 책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나는, 그의 소탈하고 솔직한 일상이 좋았다.
「나이 든 잡역부가 커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백작은 지금 노인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끝내는 것일까,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한 잔의 커피가 딱 좋은 시점일 거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커피 한 잔보다 더 많은 쓰임새가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우아한 리모주 도자기 컵에 마시든 집에서 양철 컵으로 마시든 간에 커피는 새벽녘에 부지런한 사람의 기운을 복 돋우고, 정오에는 생각에 잠긴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밤중에는 괴로운 사람의 정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커피 맛, 정말 좋네요!" 백작이 말했다.
노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결은 원두를 가는 데 있습니다." 그가 L자형 금속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목제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끓이기 직전에 가는 거죠"」
< 모스크바의 신사 p.204>
백작은 호텔에서 일하는 나이 든 잡역부와도 허물없이 친구가 되어 커피를 얻어마실 줄 아는 사람이다. 유일하게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호텔의 옥상에서 판자에 걸터앉아 바람을 느끼며 노인과 함께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런 무심한 듯 일상적인 묘사가 너무 좋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은 어쩌면 작가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까? 역자 후기를 읽다가 이런 부분을 봤다.
「번역에 참고하거나 유념해야 할 사항들을 10여 쪽 분량으로 정리하여 번역자에게 보내준 작가는 내 경우에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메일의 끝부분에는 혹시 뉴욕에 올 일이 있으면 기꺼이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말도 덧붙여 놓았으니.... 흠, 이런 로스토프적 인간이라니. 성공한 비즈니스맨 출신 작가의 교양과 세련된 태도가 얼마간 이 작품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의 몸에 밴 귀족적 품격과 겹쳐 보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 역자 후기 중에서 p. 720>
작가마저도 참 젠틀맨이다. 신사의 품격, 귀족의 품격이 어디 별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과 교양을 가져야만 진정한 귀족이요, 신사 아닐까. 우리나라의 소위 귀족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더러운 갑질 행태나 보다가 이런 품격 있는 귀족 이야기를 읽었더니 처음엔 어색하다가 나중엔 부럽고, 결국엔 좀 슬퍼진다.
신사의 품격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몸에 밴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