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문정희
의자를 조금 뒤로 밀치고
바닥에 떨어진 머플러를 집는다
조금 전까지 아내이던 그녀의 머플러를
조금 전까지 남편이던 그가 집어 준다
이혼 법정 차가운 타일 바닥에 떨어진
유실물 하나를
망각 하나를
반사적으로 집어 그가 그녀에게 돌려줄 때
그녀는 그것을 받아 자연스럽게
목에 두르고 있을 때
뭐야? 결혼 갖고 장난하는 거야
당신들 방금 이혼한 거 맞아
판사의 눈이 발끈하다가
이내 서류 쪽으로 넘어간다
욕설을 퍼붓고
서로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왜 죄인 취급이지
둘은 동시에
모처럼 동시에 감정에 합의하다
그것을 혀 밑에 넣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모든 게 끝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폐기 서류처럼 반쪽으로 찢어진다
한쪽이 뜯겨나간 몸이 일순 휘청한다
햇살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조금 절뚝이는 발걸음으로
일렁이는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은 각자 제 방향으로
일단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문정희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에서
영어 엑스(X)는 전 남편(ex-boyfriend), 또는 전 아내(ex-girlfriend)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한국어로는 가위표(X)가 되기도 한다. 문정희 시인의 [엑스]는 이제 마악 이혼 법정에서 이혼 판결을 받은 부부의 일화이며, 그 부부가 일심동체에서 영원한 타인으로 갈라서는 장면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문정희 시인의 [엑스]는 시극詩劇이며, 그는 의자를 조금 뒤로 밀치고 바닥에 떨어진 머풀러를 집는다. 머풀러의 주인은 조금 전까지 아내이던 그녀이고, 따라서 조금 전까지 남편이던 그가 바닥에 떨어진 머풀러를 집어 준 것이다. “이혼 법정 차가운 타일 바닥에 떨어진/ 유실물 하나를/ 망각 하나를/ 반사적으로 집어 그가 그녀에게 돌려줄 때” “그녀는 그것을 받아 자연스럽게/ 목에 두르”게 된다.
바로 그때, 부부의 이혼을 판결한 판사의 눈이 발끈해진다. “당신들 방금 이혼한 거 맞아”라는 놀란 표정이 그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습관은 만물의 근본 동력이듯이, 그 행위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한 이불 속에서 살며, 아들과 딸들을 낳아 키운 증거였기 때문이다.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며,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와 함께, 만인평등의 사상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고, 이 만인평등사상이 우리 인간들의 사회 질서와 공동체의 윤리 의식을 갈갈이 찢어 놓게 되었다. 부모형제와 자식들간의 서열 관계도 파괴되었고, 부부 사이와 직장 내에서의 서열 관계도 파괴되었다. 모든 것이 네것과 내것으로 나뉘어지고, 모든 사건들이 네탓과 내탓의 책임공방으로만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혼은 일상사가 되었고, 더 이상 “욕설을 퍼붓고/ 서로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고, 가정 파탄의 책임이나 불륜 남녀의 그것만도 아닌, 사소한 말다툼이나 성격 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차 한 잔 마시듯이, 유명 관광지에서 옷깃을 스치듯이, 너무도 쉽게 만나고, 너무도 쉽게 헤어진다.
모든 게 다 끝났다.
하지만, 그러나 문정희 시인의 [엑스]의 부부는 그 회한의 상처가 크고, 그 아픔이 온몸을 파고 든다. 진통제의 약효가 떨어지듯이, 법정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폐기 서류처럼 반쪽으로 찢어”지며, 둘 다 “한쪽이 뜯겨나간 몸”처럼 일순 휘청거린다. “햇살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 같고, 두 사람은 다같이 “절뚝이는 발걸음으로” “각자 제 방향으로/ 일단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이혼한 부부----. 모든 게 다 끝났다.
엑스(X)는 ‘아니다’, ‘틀렸다’이고, 엑스는 ‘갈라섰다’, ‘찢어졌다’이고, 엑스는 ‘가위표’이고, 엑스는 온갖 더럽고 추한 욕설이다.
부부란 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고 아들과 딸을 낳고 한평생 함께 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이혼한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 하는 그런 사이일 수도 있으며, 오히려, 거꾸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관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엑스]는 악연이며, 그들의 인생 전체가 엑스(X)로 잘려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