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구할 충성
고전 4:1-13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고전 4:1-13 / [그리스도의 사도] 여러분은 아볼로와 내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일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나는 어땠습니까? 충실한 일꾼답게 일해 왔다고 여러분은 보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 또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 자신의 판단도 믿지 않습니다. 4) 내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다고 해서 내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내세울 생각도 없습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주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좋은 일꾼이냐 하는 것을 성급하게 결론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있는 그대로 속속들이 드러나 비로소 모든 사람이 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왔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한 일에 따라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6) 내가 지금까지 아볼로와 나를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여러분에게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치지 말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사들 가운데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치켜 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기록되어 있는 말씀만 잘 지키십시오. 7) 여러분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자만합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이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혼자 잘난 듯이 행동합니까? 그리고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나 달성한 것처럼 행세를 합니까? 8) 여러분은 이미 자기에게 필요한 음식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멀리 뒤에 제쳐놓고 돈 많은 왕이 되어 왕좌에 파묻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때가 이를 때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그 자리에 앉게 될 테니 말입니다. 9) 때때로 나는 이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곧 사형당할 죄인같이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도 맨 끝에 끌어내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10)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다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이야 물론 매우 현명하고 지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이겠지요!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판이 좋지만 우리는 조롱거리에 불과합니다. 11)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몸을 따뜻하게 해줄 옷조차 없습니다. 우리들은 집도 없이 어디를 가나 냉대만을 받고 12) 먹고 살고자 지치도록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였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에게는 인내로 대하였으며 13)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조용히 타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발밑의 먼지나 쓰레기 같은 취급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장 22-23절에 이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1-2) 바울은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주인과 일꾼(종)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종을 디아코노스 ‘섬기는 자’라는 의미의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휘페레타스 노예를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소신이나 주장은 없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맡은 자라는 의미로 오이코노무스,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 또는 ‘청지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주님의 일을 돌보는 청지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동역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권위는 없고 주님의 의지와 권위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이요 주님의 것을 지키는 청지기임을 말합니다. 이들이 갖추어야 할 것은 훌륭한 인격도, 지혜나 지식에 박식해야 함도, 능숙한 말솜씨도 필요하겠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충성뿐인 것입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3-5)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이유 중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라 하는 자들 간의 판단으로 누가 더 나은 일꾼인지를 가늠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도,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도 그래서 그 결과가 칭찬하는 것이든 정죄하는 것이든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정확하게 심판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분이시고 심판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 누구도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6-13)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배우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남달리 구별하여 세우신 것도, 때마다 부족함 없이 능력주시고 풍성히 채우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면 사도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사도들에 대하여 편 가르면서 분열하고 대적하는 교만함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과 함께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성도들이 참된 왕의 모습을 지니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을 환난, 핍박, 순교, 세상에 구경거리가 되고 만물의 찌꺼기가 되게 하셨으나 친히 손으로 일하고, 축복하고, 참고, 권면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만드심이었습니다.
적 용 :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부르심에 따라 살고 있는지요?
예수 그 분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 훈련에 주력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교회가 맡았습니다. 성령, 보혜사가 오셔서 그들의 증언에 능력을 부어주실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만 이 일에 지혜롭고 충성된 일군이 필요합니다.
< 설 교 >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린도전서 4:1-5
오늘부터 우리는 고린도전서 4장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1-3장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글로에의 집 편으로 전해 온 고린도 교회 내의 파당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파당 문제가 생긴 것은 다 자기 자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무엇이나 된 것인냥 자기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 내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분쟁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파당을 이루어 서로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아볼로가 무엇이며, 바울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3:5).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3:1,3). 그리고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3:6-7). 오직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3:6-7).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3:21).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3:23).
그런데 이런 교회로 모이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모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경쟁을 시키고 이기는 사람이나 구역에는 상을 줍니다. 이것을 통해 교인들로 하여금 더 열심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사람 앞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주면 잘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평소에 잘 하던 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곧 자기 자랑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고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파당이 생기고 서로 다른 파를 비난하고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서는 바울 사도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써 충성만 하면 될 텐데 왜 자신들을 알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바울 사도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알아달라고 한 것은 자기 자신들을 좀 알아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고자 한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이나 배경이나 학력을 보건데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4:1-12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의 심정이 바로 이와 같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들을 여러 가지 외모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6-9절에도 보면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도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고도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자신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전한 복음을 수호하는데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는 충성할 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충성한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꺼려하고 미련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람들의 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려면 사람들의 판단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1:18절에도 보면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려고 다툼으로 곧 경쟁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렇게 전하여도 그리스도가 전하여 지니 자신은 기쁘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을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많은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 파에게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아볼로 파나 베드로 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얼굴이 못 생겼다고, 말을 더듬는다고, 육신의 질병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에 대하여 자신은 자유 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자신에게 조금만 나쁘게 말해도 그것으로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지 않습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하게 된 사람입니까? 남의 판단에서 자유로운 사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시편 3편을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시편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하였겠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아들이 반역을 해서 맨발로 도망갔으니 다윗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자기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워 자고 깨었다는 것입니다. 곧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붙들어 주셨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이 여호와께 있기에 그렇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부끄러워서 자살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살은 무서우니 교회를 옮긴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숨기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모함하고 욕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바울 같은 경우에 보면 그러한 것들은 매우 작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알았기에 천만인이 나를 대적하여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8:32).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3b-4절을 보면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아! 나는 왜 이럴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어떻게 이런 자세를 가지게 된 것입니까?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완벽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자기를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였겠습니까? 자기의 잘못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롭다고 판단하실 이가 자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자책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의 판단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도 자책하지 아니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로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남의 판단이나 나의 판단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즉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두움에 감춰진 모든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판단이나 칭찬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만물을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시는 주님의 판단만이 진실하고 참되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권면의 말씀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왜 파당을 지어 서로 미워하고 다투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판단 앞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기 자랑이 나오고 시기와 질투가 나오고 다툼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판단 앞에 서게 될 때에 곧 그리스도의 판단 앞에서 살 때에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남의 판단 때문에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자기 양심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양심에 바르게 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자기 양심에 옳은 대로 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든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판단하실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오늘도 살아서 일하고 계시고,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판단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 가운데 모든 시기와 분쟁, 다툼이 떠나가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로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