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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맹산(誓海盟山)
백범 김구 선생 친필시비
조국 언급한 ‘서해맹산’…
이순신, 김구가 남긴 맹세
‘봉오동전투’ 거론
“한일병합이 합법이면
독립군은 불법반도, 친일파는 애국자냐”
▲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적선동 현대빌딩에 마련한 사무실로 출근해 기자들에게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된다면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국 후보자는 이날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동
적선현대빌딩으로 출근하면서
“이제 뙤약볕을 꺼리지 않는
8월 농부의 마음으로
다시 땀 흘릴 기회를 구하고자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조국 후보자는
“대한민국의 국무위원이 된다면,
헌법정신 구현과 주권수호,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서해맹산의 정신”을 강조했다.
또 “동시에,
품 넓은 강물이 되고자 한다”며
“세상 여러 물과 만나고,
내리는 비와 눈도 함께 하며
멀리 가는 강물이 되고자 한다”고
각오를 밝혔다.
조 후보자가 언급한 ‘서해맹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귀절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의
줄임말이다.
진중음은
충무공이 선조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지은 우국한시이다.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경남 진해를 방문했을 때
해당 구절을 친필로 남겼다.
진해구 남원로터리에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대한민국 29년 8월15일
김구 근제’라고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진해는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의 주둔지이자
대표적 근대 계획도시로 건설됐다.
때문에 이같은 비석은
충무공에 이어
백범 김구 선생이
후대들에게
‘다시는 일제의 흔들리지 말라’고 한
경고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에 앞서 조국 후보자는
페이스북에
독립군 최초의 승리를 담은 영화
‘봉오동전투’의 포스터를 공유하며
역사 왜곡 주장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정신나간 일부 한국인들이
한일병합이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고 주장한다”면서
“그러면 독립군들은
불법반도(叛徒),
‘친일파’들은
‘준법’을 잘하는 ‘애국자’가 되고,
임시정부는
‘반국가단체’가 된다.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서해맹산(誓海盟山)
충무공 이순신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를
줄인 말로,
충무공이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애국의 마음을 담아 지은 한시이다.
서해맹산은
충무공 이순신(1554∼1611)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를
줄인 말이다.
이는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라는 뜻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왕(선조)의 피난 소식을 접한 뒤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애국의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다.
충무공의 진중음은 오언율시로,
충무공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담고 있다.
이 중 ‘서해맹산’이 담겨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
왕의 행차는 서쪽으로 멀어져 가고
東宮北地危(동궁북지위) :
왕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다.
孤臣憂國日(고신우국일) :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
壯士樹勳時(장사수훈시) :
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
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충무공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해상에서 연승을 거두고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키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충무공은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했고(옥포대첩),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이 후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에는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시켰고,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에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고
92척을 파손 및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면서(명량대첩),
조선의 빼앗긴 해상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1598년(선조 31)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노량해전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서울의 봄 풍경
‘남산 둘레길’ 랜선 산책
서울시민기자가 사진으로 담아 낸
‘서울의 봄’
1. 파리
카페 왕조(987∼1328)가
초기에 파리 주변 지역만
영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파리는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다.
2. 베르사유
고급 주택지가 늘어선 관광 도시.
17~18세기에 건축된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
3. 칼레
도버 해협에 면한 항만 도시.
칼레에서 영국의 도버까지
유로 터널이 바다 밑으로 연결되어 있다.
4. 몽블랑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따라
뻗어 있는 알프스 산맥의 산군.
서유럽의 최고봉(4,807m)도 이 산군에 있다.
유럽 남서부에 위치한
‘유럽의 미녀’ 프랑스.
백년 전쟁,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 빈 회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등
고난의 성형 수술을 거치며
프랑스는 ‘육각형 미녀’가 되었다.
아름다움에 목마른 미녀의 주변에는
누가 있을까?
북서쪽에는 영국 해협이,
북동쪽에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이 있다.
서쪽에는 대서양이 있고
동쪽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있으며,
남서쪽에는 에스파냐(스페인)가,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남동쪽에는 몽블랑(4,807m)이
솟아 있는 알프스 산맥이 뻗어 있고,
남서쪽에는 피레네 산맥이
에스파냐와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에는
프랑스 평원이 펼쳐져 있다.
프랑스는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기후가 온화할 뿐 아니라
역사적 명소도 많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나라가 되었다.
국제 연합 세계 관광 기구
(UNWTO)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외국인 관광객을
가장 많이 유치한 국가는
프랑스이고
미국, 에스파냐, 중국, 이탈리아가
그 뒤를 잇는다.
프랑스는 20여 년 동안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리적 위치와 오랜 역사 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을 대표하는
나라로 여겨진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파리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서 역사가 전개된다.”라고
말했다.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도시 곳곳이
역사의 현장이자 박물관이다.
프랑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유적은 물론 산업이나
예술, 심지어 문학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의 약사(略史)나 다름없는
프랑스 역사를 살펴보지 않고
프랑스에 갔다 오면
껍데기만 보고 올지도 모른다.
아래 내용을 골격으로 삼아
살을 붙여나가면 편리할 것이다.
할아버지였던 메로베히에서 유래한
메로빙거 왕조(481~751)를
15세에 이어받은 클로비스 1세는
갈리아 전체를 통합하고
현재의 전 독일 지역과
피레네 산맥 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알라마니 족과의 싸움에서
고군분투하던 클로비스 1세는
부르군트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의 조언에 따라
가톨릭교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나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496년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교로 개종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공인을 받은
이방인 왕이 된 것이다.
732년 메로빙거 왕조
최고 궁정직인 궁재(宮宰)를 맡았던
샤를 마르텔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이슬람 군대를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물리쳤다.
751년
아버지 샤를의 뒤를 이어
궁재가 된 피핀은
왕을 수도원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어
카롤링거 왕조(751∼987)를 세웠다.
‘샤를’은 라틴어로 읽으면
‘카롤루스’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핀을 후원자로 삼았다.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에 걸친
왕국을 건설하여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이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후계자
루트비히 1세가 죽은 후
서로 다투던 루트비히 1세의 세 아들은
843년 전쟁을 끝내고
베르됭 조약을 맺어
프랑크 왕국을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분할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3개로
분할된 프랑크 왕국
869년
중프랑크의 국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870년 메르센에서 조약을 체결해
중프랑크에서
이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가 된 까닭은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권을 장악하여
카페 왕조(987∼1328)를 창시했다.
위그 카페는 죽기 전
자신의 아들에게
프랑스 왕위 세습을 선언하는
대관식을 미리 올려
왕조 혈통이 원활하게
계승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후 관례가 되어
왕조의 존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파리 주변 지역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었던 카페 왕조는
파리를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
12세기 초부터 왕권이 점점 안정화되면서
파리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300년 이상 지속된
카페 왕조가 없었다면
파리는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한 교황청.
필리프 4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청을
이곳으로 이전해 교황들을 체류시켰다.
13세기 십자군 전쟁이
유럽의 패배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이 세금 부과에 반발하자
급기야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교황이 아비뇽에 체류하던
‘아비뇽 유수’ 시절
필리프 4세의 아들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었고,
샤를 4세의 사촌형인
필리프 6세(발루아 백작)가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1328~1589)를 열었다.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에게는
잉글랜드 제6대 왕
에드워드 2세와
정략 결혼을 해 낳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있었다.
즉 필리프 4세의 손자이자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1337~1453)을 시작했다.
1348년 흑사병이 퍼져
유럽인의 30%가 죽었는데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있다.
바스티유 습격은
정부군과 민중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홍역과 볼거리처럼
혁명도 전염성이 강하다.
아메리카 정착민들이
영국 왕 조지 3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본 프랑스 시민들은
구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루이 16세가
국민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파리를 점령했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결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1792년 제1공화정이 들어섰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왕정보다 무서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폭력이 결여된 덕은
무능한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부르주아 공화파의 반격으로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1795년 총재 정부가 들어섰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패배로
폐위된 1814년,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가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를 주도했다.
회의 결과 구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빈 체제’가 등장했고,
프랑스의 영토도
혁명 이전으로 돌아갔다.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리하여 이전 부르봉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차례대로 왕이 되었다.
1830년 파리 시민들은
반동 정치를 노골적으로 실시한
샤를 10세를 7월 혁명으로 끌어내렸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혁명이 아닌
7월 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7월 혁명으로 세워진
루이 필리프의 왕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은
1832년 6월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6월 봉기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다.
1848년
선거권 확대 문제를 계기로
다시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제2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삼촌처럼 황제가 되길 원했던
루이 나폴레옹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정을 폐지시켰다.
1852년 그는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는 1853년
크림 전쟁에 참가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여
명성을 얻었다.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가
철혈 정책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결국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 완패를 당해
쫓겨나다시피 영국으로 도망쳤다.
나폴레옹 1세의 제1제정,
2월 혁명 후의 제2공화정,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에 이어
제3공화정이 성립되었는데,
프랑스는 이 체제 하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다.
전후에 제4공화정이 성립되었으나
식민 정책의 실패로
1958년 드골이 이끄는
제5공화정이 들어섰다.
1950년부터 프랑스 주도로 구성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공동체는
지금의 유럽 연합(EU)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다.
하지만 거리상으로
두 나라는 약 33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두 나라 사이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는데,
이 바다를 영국에서는
‘영국 해협(English Channel)’이라고 하고,
프랑스에서는
‘라 망슈(La Manche)’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영 선수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1875년 영국의 수영 선수
매슈 웨브가 어떤 장비의
도움도 받지 않고
21시간 45분 동안 수영하여
최초로 해협을 건넜다.
1951년에는
미국 여자 수영 선수
플로렌스 채드윅이
16시간 22분 만에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
당시 남성 선수의 기록을
2시간이나 단축하였다.
영국 해협을 건널 때는
주로 영국의 도버에서 출발해
프랑스의 칼레로 들어간다.
그래서 영국은
이 좁은 구간의 해협을
‘도버 해협(Strait of Dover)’이라 하고,
프랑스는 ‘칼레 해협
(Pas de Calais)’이라 한다.
유로 터널 전용 자동차 수송 열차 내부.
도버와 칼레 사이의 바다는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뱃길이다.
길은 멀지 않지만
파도가 몹시 거센 편이라
꽤 긴 여정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1994년
도버 해협을 육로로 연결하기 위해
영국의 포크스턴과
프랑스의 칼레 구간에
해저 터널인 유로 터널을 건설했다.
이 터널을 통해
국제 특급 열차인
‘유로스타’가
런던, 파리, 브뤼셀을 연결하고 있다.
백년 전쟁 당시
칼레는 도버 시와 가장 가까워
잉글랜드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이나 자신을 괴롭힌
칼레의 시민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자비를 베풀어
“여섯 명의 시민을
대신 처형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때 칼레의 거부(巨富)
피에르를 비롯해
귀족, 부호, 법률가 등이
자루 옷을 입고
목에 밧줄을 맨 채 나타났다.
이에 감동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사형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귀스트 로댕은
이 사건을 소재로
칼레의 시민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 가면
칼레의 시민을 만날 수 있다.
로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
칼레의 시민.
프랑스 역사가 유럽의 약사(略史)라면
프랑스의 기후는
유럽 기후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기후는
위치와 지역에 따라
지중해성, 해양성, 대륙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에는
이 세 가지 기후가 모두 나타난다.
지중해 연안은
여름에는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으로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고위도 저압대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온화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남프랑스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평안북도 중강진과
거의 같은 위도에 있지만
따뜻하고 온화하다.
중강진보다 훨씬 더 높은
위도에 있는 파리도
평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별로 없다.
파리와 같은 유럽 내륙 지방의
기후가 따뜻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위도 고압대에서
고위도 저압대로
편서풍이 불고
북서쪽에서
북대서양 난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유럽에 도달하는 편서풍은
대서양에서 불어오기 때문에
북서 유럽 지역은
해양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바다가 육지보다
서서히 식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겨울에는 온난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강수는 연중 고르다.
게다가 유럽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해서
편서풍이
대륙성 기후에 속하는
동부 내륙까지
따뜻한 공기를 실어다 준다.
바로 이런 서안 해양성 기후 지역에서
잘 자라는 곡물이 밀이다.
밀은 고온에 약한 편이지만
생장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비가 적게 내리는 곳에서도 잘 자란다.
반면에 쌀은
고온다습한 계절풍이 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잘 자란다.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한반도의 기후는
육지와
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유럽의 기후와는 상이하다.
여름에는 남동 계절풍이
습하고 따뜻한 공기를 몰아오고,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이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를 몰아온다.
프랑스는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스위스․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에스파냐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북쪽과 서쪽에는
프랑스 평원이 펼쳐져 있다.
알프스 산맥은
남쪽의 아프리카 판과
북쪽의 유라시아 판이
부딪쳐 형성되었다.
중생대 말기 이후
판의 이동이 계속되고 있어
지금도 솟아오르고 있다.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은
스위스의 마터호른(4,478m),
융프라우(4,158m)와 함께
알프스 3대 명봉(名峰)으로 꼽힌다.
‘하얀 산’이란 뜻을 지닌
몽블랑은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40km에 걸쳐 있는 산군(山群)이다.
몽블랑의 대부분은
프랑스 영토에 있고
일부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과 접해 있다.
에귀유 뒤 미디 전망대에서 바라본 몽블랑.
몽블랑에는 카르
(산정 부근에 빙하로 생긴
반원형 상의 오목한 지형),
U자곡(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U자형 계곡),
현곡(懸谷, U자곡이
더 큰 U자곡과 만나
폭포나 급류를 이룬 계곡) 등
빙식 지형이 곳곳에 남아 있다.
빙하호도 산재해 있고
알프(유럽 알프스의 고산 빙하와
삼림한계 사이에
띠 모양으로 전개되는 초원지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몽블랑 기슭에 있는
샤모니몽블랑
(Chamonix-Mont-Blanc)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30여분 올라가면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에귀유 뒤 미디
(Aiguille du Midi)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만년설과 빙하가 만든
알프스의 고산 풍경을 접하면
구름 속에서
설산 산책이라도 하는 듯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영국 시인 셸리
(Percy Shelley, 1792~1822)와 함께
몽블랑을 찾은
스코틀랜드 출신 시인
바이런
(Baron Byron, 1788~1824)은
그곳에서 ‘고독의 언어’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몽블랑에 바친 찬사를 들어보면
그 경외감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몽블랑은 산 중의 산, 왕 중의 왕
바위는 왕좌가 되고
구름은 대례복이 되니
새하얀 눈은 왕관이 되었도다.
(Mont Blanc is the Monarch of mountains;
They crowned him long ago,
On a throne of rocks – in a robe of clouds -
With a Diadem(크라운이 없는
밴드 형식의 왕관) of Snow)
프랑스의 아름다움을 만든 비결
프랑스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절대 왕정의 화려함은 그리워한다.
그래서인지 모자와 옷은 물론
요리와 예절 같은
일상에서도
세련된 화려함을 추구한다.
“과거 로마 제국의 시대처럼
18세기는 프랑스의 시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18세기에 세련된 프랑스 말과
우아한 풍습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몽블랑이 ‘산 중의 산’이듯이
프랑스는 ‘유럽 중의 유럽’이 되었다.
산업 혁명 이후
의복이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에 맞서
다양한 기성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성품은 패션 용어로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고 있다.
매년 봄·가을 파리에서 열리는
패션쇼인 ‘프레타포르테’에는
수십 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유명 디자이너와 바이어가
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최상류층을 위해 발표된
창작 의상이
일반인에게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면
상류층은 차별화를 위해
또 다른 창작 의상을 찾게 된다.
프레타포르테는
이런 소비 패턴을 파고들어
패션을 거대한 산업으로 끌어 올렸다.
밀라노, 뉴욕, 도쿄에서도
유명 패션쇼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사람들은 멋진 기성복을 입으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프랑스의 기성복 패션쇼
‘프레타포르테’는 해마다 성황이다.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중세 건축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그래서 성당과 고성은
동화 같은 꿈을 꾸는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포와 폭력에 의존했다.
그래서 선과 선이 싸우는
불합리가 내재할 수밖에 없었다.
레미제라블 속의 시민들은
자유를 원하면서
동시에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영웅이
자신들을 얽매는 것에
편안함을 느낀다.
인간이 불합리를 껴안고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발전해가는 곳이 세상일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문학이,
위대한 건축이,
위대한 예술이
불합리에서 움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틈을
악이 비집고 들어올 때
비로소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을 얻을 수 있다.
보완할 것이 없는 완전함,
혹은 악이 없는 선은
정체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유와 생명도
날마다 추구하는 자만이
그때그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연도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지 않는가.
신이 인간에게 해답을
주지 않은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어쩌면 프랑스는
부단한 보완을 통해 원하는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변심에 대한 보완’.
이것이 프랑스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세상 일도 다를 것 같지 않다.
글 박찬영 |지리, 역사 저술가
한국외국어 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한국판의
편집부장을 지냈다.
현재 (주)리베르스쿨과
리베르의 대표 이사로 있다.
청소년 부문 베스트셀러인
세계지리를 보다,
세계사를 보다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 답사 여행에서
확인한 역사와 지리의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담았다.
한국사를 보다를 토대로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2014년 적용)는
검정 심사에서
최고 득점(90~100점)으로
합격하였다.
한국 역사 논픽션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