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히브 2,5-12; 마르 1,21-28 / 연중 제1주간 화요일; 2025.1.14.
주님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연중시기로 넘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그 은총으로 세상을 향하여 그분을 공현해 드려야 하는 때입니다. 이사야가 내다보았던 대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영을 받은 우리는 공정한 세상이 이룩되도록 노력하되 겸손해야 할 것이며, 부러진 갈대나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생명도 존중할 수 있는 생명 경외의 마음을 지녀야 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어 진리를 구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세례의 실존을 사는 것입니다.
제임스 티소트(James Tissot), 1886-94,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예수>
그런데 이러한 미래는 사랑의 문명을 키우는 싹이 될 것인데, 오늘 복음에서 이 위대한 시작을 하신 예수님께 대해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더러운 영 즉 마귀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사랑의 문명이라는 모습으로 현실에서 구현되기 시작하면 저들은 멸망당하고 적어도 쫒겨날 수밖에 없으므로 반응을 예민하게 보이는 것인데, 그 반응이 거의 발악에 가깝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이렇게 영적인 대결이 펼쳐지는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 의해 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존재, 즉 자유를 온전히 선용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 줄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인간 해방은 자유를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며, 또한 마귀의 유혹과 억압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의 저자가 인용한 시편은 제8장입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꺾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통틀어 양떼와 소들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며 바다 속 지름길을 두루 다니는 것들이오이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최민순 역).
이 시편은 지은 이가 다윗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 교부들이 주석해 놓은 바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먼저 경탄하올 하느님을 부르며, 그분의 놀라우신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의 뒷모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원수들을 비웃으시기 위하여 신앙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찬미를 나누어 주십니다. 어디에도 담을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은 힘들이지 않은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우주의 질서를 정립하시고, 당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를 주시며, 철학자들의 오류를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상적 관점으로 보나 천상적 관점으로 보나 인간에게 특별한 영예를 주십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감탄합니다. 우리는 비천하지만 고귀하고, 육이면서 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광은 겸손한 영광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비천한 이를 높이시고, 당신의 힘을 하늘 위에 펼치십니다. 찬양받으실 성부와 성자를 제외하고는 이 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죽어 버릴 동물이지만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면 참된 인간이 됩니다. 오직 눈먼 자만이 그분께 복종하기를 거부합니다.”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인간의 자유에 대해 논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더 많은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가 현대인입니다. 이를 두고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늘 복음에 나온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데 있고, 오늘 독서에 인용된 시편 저자가 알려주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예수님처럼 인간 자유를 선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에 자신의 삶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주석하여 가르쳐 주는 대로,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며 진정으로 자신을 존귀하여 여기게 되는 자존감입니다.
교우 여러분! 새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덕담을 나누며 우리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더 많이 가지기를 축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경험에 따르면 그런 덕담은 듣기에는 좋지만 비현실적입니다. 올해에도 궂은 일은 찾아올 것이고 고난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게 정상이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혹시 찾아올 수도 있는 고난을 우리의 자유를 선용하여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덕담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더 많이 가질 수도 없거니와 마치 온실 속에서 살 듯이 그 어떠한 고난도 없으면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부족한 듯한 처지가, 그리고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고난이 우리의 자유를 단련시켜줍니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여 생기있는 영혼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토록 돌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드맑은 자존감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