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서울 거암교회 입당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새롭게 지어질 우리 교회를 떠올리며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잘 지어진 예배당 건물을 보며
이를 위한 사람의 헌신과 희생과 수고에 박수를 보냈지만
모든 것은 진실로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거암교회가 오직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로서 주님의 기쁨이 되길 기도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본문 주해)
1~3절 : 히브리서 11장에서 온갖 핍박과 유혹과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이겨낸 그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한다.
이들처럼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기 위해서 거리낌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것들-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1절)
그리고 믿음의 창시자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예수님이 믿음을 주신 분이요, 또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고 그에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2a절)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다 완성하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을 통하여 즐거워하신 것이다. 그 뜻을 이루심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자기 백성들도 함께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즐거움이었다.(2b~3절)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3절)
4~11절 :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계속되는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징계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4절. 새번역)
더 좋아질 소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주춤거리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자는 믿음 때문에 피흘린 일이 없음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징계의 올바른 뜻을 이해시키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를 아들로 대접하시는 것이다.
징계는 부모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는 자녀를 징계하되 자기의 뜻대로 징계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는 성도를 거룩함에 참예하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을 잘못해서 징계가 올 수도 있지만, 성도를 거룩함에 참예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훈련의 차원에서도 징계를 하시는 것이다.
징계는 다 힘들고 어렵고,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
그러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이 된 자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는 고진감래의 이야기, 세상의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묵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a절)
나의 믿음의 창시자이시오, 나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바라보자는 말씀이다.
내 믿음의 처음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과는 너무도 다른 그분의 뜻을 보고 매일 매일 놀라서, 그분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해 또 매일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입버릇으로 ‘주여’를 외치는 것도 아니요, 교회 중심의 여러 가지 사역을 잘 해내면서 주님께서 주실 복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요, 세상 속에서 선행을 주님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잘 해내고도, 주님을 알지 못하면 이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을 것 같다.
말씀이 아니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내게 믿음을 주시고 또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이루어내시는 예수-를 무슨 수로 알겠는가?
말씀이 아니면, 그분이 십자가를 참으신 이유가 그 앞에 있는 기쁨-십자가로 죄인들을 구원하여 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말씀이 아니면,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참뜻-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고난의 순간에도 변함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분명한 확신 가운데 거하길 강조한다.
그 확신의 대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내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확신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흐려지고 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영적 답답함과 어두움이 어떠할 것인가..........생각도 하기 싫다.
매일 주님을 알아감으로 내게 기쁨이 넘치는 것은 성령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요, 또 그분과 교제함으로 진짜로 주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을 날마다 진짜로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만 믿습니다!” 하는 나의 고백에 진짜 무게가 실립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의와 평강의 열매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성령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장차도 늘 아버지 품속에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