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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믿음
사도행전 17:22-3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절기이다. 요즘 유럽은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온 현상으로 일상이 전쟁 중이다. 오메가 열돔 때문이라고 하는데, 뜨거운 공기가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한 현상이라고 한다. 평소 에어콘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비상사태다.
프랑스에서는 ‘열’받는 날씨에 대해 좌파와 우파의 입장이 대립한다고 한다. 좌파는 기후 위기 시대에 에어콘을 자제해야 한다고 하고, 또 우파는 에어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같은 현상을 겪으면서도 서로 눈높이가 다르다. 이게 갈등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직 에어콘 없이 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요즘 대한민국은 열이 오른다. 지난 주간 우리나라 국민은 월드컵 32강 진출 ‘경우의 수’에 촉각을 기울였다. 오늘 중으로 결론이 난다는데, 이젠 기대를 접는 분위기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민의 축구에 대한 눈높이가 높은데, 이를 운영하는 축협회나 지도자들이 국민의 기대를 못 따른다. 국민은 예전처럼 한판 승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멀리 내다보면서 한국축구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쓴소리를 한다.
모두가 감독의 눈높이 수준이다. 웬만하면 선수 개인의 능력과 포지션, 경기운영 시스템을 감독의 시선으로 경기를 본다.
눈높이는 신앙생활에도 적용된다. 이젠 교회도, 목회자도, 그리스도인도 누구나 그런 성숙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1)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방인 철학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눈높이 전도’의 사례를 보여준다. 믿음의 눈높이는 믿음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대상자인 그들의 이해, 관심, 문화적 코드에 맞추려는 노력이며, 공감대의 채널을 맞추는 것이다.
당시 전도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지중해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바울을 가리켜 위험한 복음을 전염시키는 자로 평가하며, 경계하였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행 24:5).
바울은 같은 동족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위험한 인물이요, 외국인의 입장에서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그리스 심장부 아테네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철학자들과 상대한다. 사람들은 바울을 유명한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본문은 그곳에서 한 바울의 전도설교이다. 그리스인은 철학과 신화로 유명하다. 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신전과 광장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바울은 그들과 우상문제로 논쟁하거나, 비난하기보다 관심을 보인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
믿는 사람이든, 믿음 없이 살아온 사람이든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인류에게 아주 뜨거운 이슈였다. 모든 나라, 민족, 언어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름이 있다. 인식의 눈높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 사람들은 종교성이 대단하였다.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책을 보면 그 종교성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올림푸스 산을 배경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의 경우 얼마나 종교성이 과도하던지, 알려진 신들의 이름은 물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23)의 형상까지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렸다.
그 이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경배받을 수 없는 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행여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받게 될 신의 분노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 지내는 것을 보면, 당시 그리스인의 신심이 얼마나 깊은가 보다는 그 신심이 얼마나 계산적이고, 허구적인가를 느끼게 한다.
바울은 눈높이를 낮추어 이것조차 호의적으로 이해하고, 또 이를 교정해 주려고 한다. 오히려 바울은 참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미신조차 토론의 주제로 삼는다. 전도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있다. 공감하고, 필요를 나누고, 채널을 맞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친밀한 하나님을 모른다.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딴 세계의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가 그 사랑을 전하고 싶다면 위로자로, 공감하는 자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세계적인 심리학자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하였다. 그는 평생 사람의 심층심리에 대한 연구자였고, 누구보다 인간 이해를 그 사람의 심층 깊이 존재하는 무의식으로부터 찾으려고 하였다.
기자가 칼 융에게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수많은 시청자가 그의 대답을 궁금해 하였다. 그런 대단한 심리학자에게 신의 존재란 어떤 것일까, 궁금했을 것이다. 평소 그의 눈높이를 높이 평가하던 사람들이었다. 융은 천천히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오스트리아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비록 교회와 거리를 유지하고 살았지만, 그는 평생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자기 자신 속에서 겹겹이 감춰진, 신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위대한 위험’인 신의 언저리를 기웃거린 셈이다.
<융의 생애와 사상>이란 자서전 뒷 표지에는 그의 집 현관문을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부르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은 거기 계시다”라고 쓰여 있다.
2)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통해, 오히려 유일하고 참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였다.
먼저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피조물인 우리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예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창조주이신 분을 네 필요에 따라 끌어 들이고, 흥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 신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에 매여있는 존재가 아님을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제사 음식이나 얻어 잡숫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공급받는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만든 신적 존재가 어찌 참된 하나님일 수 있는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삶의 공간을 마련해 주시고, 연대와 경계를 정해 주시는 분이다.
바울은 우리가 마음먹고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고 증거하였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바울은 그 주장의 근거를 대기 위해 성경을 말하기보다, 오히려 그리스인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싯구를 인용하였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28-29).
바울은 철학과 신화로 무장된 그리스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였다.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여 공감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면,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작 신을 금, 은, 돌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든 신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철학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 철학과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이르기에는 눈높이가 너무 높아, 외려 벽이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바로 지식의 근원이 된다.
어거스틴은 “나는 믿기 위해 먼저 알기 보다는, 알기 위해 먼저 믿겠노라”고 하였다.
바울이 전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아무 차별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23)에게도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알지 못하던 시대”(30)를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사면이 내려진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한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마음과 삶에서 돌이키라는 뜻이다.
불신앙은 피조물로서 잘못된 삶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잘못된 삶,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하지 못했던 삶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이제부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겸손히 성경을 읽고 배우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3)
성경은 눈높이의 믿음을 말한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눈높이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입장은 한결같다. 하나님은 저마다 사람의 현실에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다. 사람의 신분이나 신앙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신다.
하나님은 ‘눈높이 사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시고, 희생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십자가가 대표적인 증거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고, 고백의 요약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진실한 눈높이 교육이다. 내 기준으로 믿음의 눈높이를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나와 눈높이와 맞추어 주셨음을 자랑하라.
눈높이를 맞추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진 작가 브레송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진을 찍는가? 그는 사진을 찍는데 한쪽 눈을 감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에 양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함이었다.
나는 눈높이 믿음을 위해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 한눈을 감는 일은 공감이요, 한 손을 내미는 일은 연대요, 나를 낮추고 비우는 일은 사랑일 것이다.
다음 주일은 여름철의 감사절 맥추감사절이다. 평소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이정표를 일깨워 주는 기회이다.
무엇보다 그 고비고비, 순간순간 마다 감사드리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감사하는 일은 가장 인간적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하나의 감사를 아는 사람은 열 가지 감사를 찾을 수 있고, 만 가지 감사로 이어진다.
교회의 전통이 감사절을 제정한 뜻은 내 마음의 지도에서 길을 잃지 말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일 년 365일, 날마다 감사절이 아닌가? 시간의 매듭을 기억하고 사는 일은 지혜로운 삶이다.
내가 가까이 지내는 한규준 목사가 있다. 그는 고향이 화성군 송산면인데, 어린 시절 차범근 선수와 송산감리교회를 다닌 동갑내기 친구였다.
어느 해 맥추절을 앞두고 교회에서 봉투를 나누어 주더란다. 선생님은 다음 주일이 감사절이니 이 봉투에 감사예물을 무엇이든 담아 오라는 것이었다. 가족이 교회를 다니는 차범근과 같은 친구들은 쌀을 담아갔는데, 자기는 어린 동생과 둘만 교회에 다녔기에 차마 엄마의 눈이 무서워 쌀을 가져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봉투에 얼마 전에 캐서 광에 쌓여있는 햇감자를 불룩 채워서 가져갔다. 그런데 얼마나 부끄러운지 헌금 시간에 내놓지도 못하고, 교회 다른 방에 몰래 꺼내놓고 왔다고 하였다. 어린 아이의 마음의 눈높이가 참 진실하였다.
한 목사님은 그런 자신을 목사로 이끌어 주셨음을 감사하였다. 하나님이 자기의 속마음을 전부 알아주셨다고 하였다.
흔히 ‘감사하면 감사한 일만 생기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만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행여 내 이유 없는 불평의 습관이 내 운명이 되지 않도록, 평소 감사하는 말과 습관으로 나를 길들여라. 이것이 사람 사는 원리이다. 감사는 내 앞에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눈높이 믿음을 연습하는 일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은 365일 날마다 감사절이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시선과 눈높이를 맞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