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제 18장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전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한 가정인 미가의 집에서 어떻게 우상을 숭배했는가를 소개했다면 본장은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피하여 북쪽으로 이주한 단 지파가 어떻게 가정의 우상을 자기 지파의 우상으로 숭배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17;6절에 이어 본장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고 시작하는데 또 다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앞장에서는 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면 본장에서는 자기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위해 왕정 제도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이로 인해 나라를 온전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1절에 단 지파는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다고 했는데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을 분배 받았었다. 그러나 초기에 분배 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나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했으며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일은 단 지파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삿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단 지파가 일시적으로 거주했던 소라와 에스다올은 삼손의 고향이었다. 이 지역은 원래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는데 훗날 기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 이곳에 계속해서 안주하지 못하고 결국 아모리 족속의 침입에 굴복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단 지파는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해 용맹한 사람 다섯 명을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 사람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탐꾼들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신당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레위 청년의 음성을 즉시 알았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첫째, 정탐꾼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있었을 때에 이미 레위 청년과의 만남이 있었던 경우와,
둘째, 에브라임 방언은 특색이 있는데 이 청년의 말은 유다 지파의 언어였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 청년을 만난 경우이다.
정탐꾼들이 청년을 만나서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얻었느냐.’고 질문했는데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청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레위 청년은 자신은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미가가 나를 고용하고 나를 대접하며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이는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레위 직분을 망각하고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을 자랑한 것은 천박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가는 길이 형통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어보도록 레위 청년에게 요청했는데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신탁을 구했지만 이 사람들은 ‘엘로힘’에게 신탁을 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레위 청년이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신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레위가 섬기는 신은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가나안 신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단 사람들과는 달리 레위 청년은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은 여호와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제사장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한 말 중에 ‘그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라는 말은 ‘그 길을 여호와께서 주장하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자신은 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 그 송아지 우상 신이 여호와라는 자부심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레위 청년의 축복을 받은 정탐꾼들은 미가의 집을 떠나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라이스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 외침을 받을 염려가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또한 요단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가 충분했기 때문에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더욱이 원주민들이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침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에 있었고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저들은 아무 염려가 없고, 시돈 사람처럼 평온하고 안전하며 부족한 것이 없고 부를 누리며 어떤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실 라이스 사람들은 천연적인 요새 덕분에 왕이나 독재자들이 없었고 많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강제적으로 징용에 이끌어 가는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시돈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시돈은 레바논 산맥으로 인해 라이스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정탐꾼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모든 정황을 보고했고 일어나 치러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그 이유는 그 땅은 평화로운 곳이요, 넓고,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난 후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동기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었지만 단 지파의 정탐꾼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외형적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앙이 없었으며 안목의 정욕에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평화로운 백성’을 만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방심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 때문에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여 안이한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정탐꾼들은 백성들을 부추기면서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고 하였다. 일반적인 성전의 구호에서는 ‘여호와’를 사용하지만 단 지파 사람들은 ‘엘로힘’을 사용하면서 성전 구호를 단순히 형식적으로 외쳤다. 다시 말하면 단 지파의 전쟁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자신들의 정욕을 좇아 행하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버렸고,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성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선동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2. 단 지파의 이주와 우상 숭배 (18:11-31절)
라이스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소라와 에스다올 땅을 출발하여 신개척지로 향하는 단 지파는 도중에 미가의 우상과 제사장을 취하였고 이어서 라이스를 정복하고 정착했다. 이는 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정복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후의 단 지파는 헤어날 수 없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훗날 여로보암 왕이 단 지파의 땅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또한 무자격자인 레위 청년은 단 지파가 내건 좋은 조건에 미혹되어 주인인 미가와의 계약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주인의 우상과 기물을 훔쳐내는 일에 동참했으며 이리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사람은 이제 단 지파 전체를 우상 숭배로 타락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는 타락한 성직자, 사이비 성직자는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타락시키는 악을 범하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단 지파의 가족 중에서 육백 명이 병기를 가지고 소라와 에스다올을 출발하여 유다의 기럇여아림에 진을 쳤는데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하네 단’이라 부른다. 즉 단의 진영이라는 뜻이다. 전체 백성은 약 3천 명 가량이었을 것이며 이는 과거 6만 명에 이르던 백성의 수효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든 숫자이다. 기럇여아림에서 미가의 집까지는 약 20km 정도이며 걸어서 5시간 정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미가의 집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이 집들에’라는 뜻이기 때문에 여러 건물로 구성된 집이었다. 그 중에 레위 청년이 머물고 있는 집은 미가의 신당이었을 것이며 그곳에는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정탐꾼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리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무기를 지닌 육백 명의 군사들은 문 입구에 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미가는 군사를 거느린 소부족의 부족장 정도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정탐꾼들이 신당에 들어갈 때에는 제사장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자기 주인의 우상을 다 집어내는 것을 보고는 그때에야 놀라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마 이전까지는 단 사람들이 미가의 신에게 경배하려고 들어간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제사장의 질문에 정탐꾼들은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고 한 후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청원했는데 17절과 18절에 단 지파 사람들은 이미 그를 ‘제사장’이라고 깍듯이 예우하고 있다. 레위 청년은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고 그들과 합류하여 길을 떠난다. 그는 처음 생계를 잇기 위하여 미가의 제안에 감격했고 한 개인의 제사장에 만족했지만 단 지파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을 받자 지금까지 아들과 같은 사랑과 대접을 받았던 은인의 은혜를 배신하고 더 나은 경제적 충족, 더 나은 명예를 따라 갔던 것이다.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과 가축을 앞에 두고 진행했는데 이는 미가와 그의 이웃이 뒤따라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조치였을 것이다. 미가는 제사장과 신상이 없어진 것을 알고 곧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이 장면은 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격했던 일과 흡사하다.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 도둑맞고 추격했기 때문이다. 미가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춘 단 지파는 왜 우리를 따라왔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미가의 추격의 이유를 잘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보여 준다. 미가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면서 제사장과 함께 도둑질했다고 항변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발로였다.
미가의 항의에 단 자손은 도리어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금방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며 힘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가의 소유물뿐만 아니라 미가와 그의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한 후 자기의 길을 당당하게 떠나자 미가도 자기의 힘의 부족함을 느끼고 돌이켰는데 우상을 만들어 복을 받겠다던 미가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단 지파가 라이스에 도착하여 라이스 거민들을 습격하고 칼날로 그들을 치며 성읍을 불살랐는데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수행하던 성전의 형태와 같이 철저하게 징벌하였다. 그러나 라이스 땅은 원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명분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본래 자기 기업은 빼앗기고 포기한 채 약한 민족을 침략하여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단 지파는 이곳에 성읍을 세우고 거주하면서 그곳 이름을 단이라 칭하였는데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 영토를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단 지파는 소라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분리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성경에서 단 지파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역대기 족보에서도 단 지파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며 요한계시록에서도 열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 족보에서도 사라진 것이다. 이들은 거족적인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 것이다.
단 지파가 라이스에 정착한 후에 독자적으로 우상을 숭배했는데 거기 제사장이 된 사람의 족보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제사장의 이름은 ‘요나단’이며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아들로서 모세의 손자이다. 이 사람은 원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후에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으며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그곳에 있었다.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많은 학자들이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까지 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실로의 회막은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사울 왕 때에는 놉에 있었고, 다윗 왕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 만약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있었다면 여로보암 왕이 다시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실로이며 온 이스라엘은 실로에 모여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지파가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