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감에 대하여
장미숙
빵집의 하루는 냄새로부터 시작된다. 지난밤 잘 발효된 반죽이 오븐에서 노릇하게 익어 가면 고소함은 슬금슬금 공기 속에 섞여든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존재의 함성이 매장을 빠져나가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스민다. 빵집 앞을 지날 때 냄새가 건드리는 건 식욕보다 감성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잠시 머뭇거리는 그 찰나로 감성은 드나든다.
비가 오는 날, 빵집 앞에 서면 누군가가 흘린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남긴 흔적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남겨놓고 간 생각이 발효되어 또 다른 이야기가 탄생한다. 돌고 도는 생각처럼 돌고 도는 기운들, 감성을 자극하는 맛이 서사적일 수밖에 없는 건 냄새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밀가루 반죽에 불과한 빵이 뜨거운 오븐 안에서 부풀어 오른다. 열과 함께 최대치가 되었다가 살포시 가라앉으면서 제 모양을 찾는다. 처음과 전혀 다르게 변하는 빵의 세계는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의 다양성을 담는다. 발효라는 독특한 과정을 거쳐 원래의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움으로 거듭나는 빵이 단순할 수는 없다.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음식과는 다른, 시간을 함축한 맛은 빵의 본질이다. 다양한 종류의 빵은 세월을 따라잡으려는 듯 진화한다. 고유한 맛을 지키며 오래도록 유지해 온 것도 있지만 새로운 맛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변화를 거듭했다. 견과류가 토핑으로 올라간 게 있는가 하면 각종 채소나 과일을 다져 넣은 것도 있다. 소시지나 치즈, 초콜릿이나 시나몬, 혹은 커피 등을 첨가한 것들은 진한 맛을 낸다. 모양과 재료에 따라 냄새는 약간씩 다르지만 익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익어가는 것들은 뚝기를 담고 있다. 절정을 이루는 꽃이 그렇고, 마지막 색을 모아 한꺼번에 터트리는 과일이 그렇다. 색이 팽팽하게 부풀었을 때 꽃은 미련 없이 허공에 몸을 던진다. 익는다는 건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소멸과 생성의 경계이며 교류의 시간이기도 하다. 색의 채도가 원색에 가까워지면 과일은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다. 모든 익어가는 것들의 함성이다.
밥 냄새는 오감보다 가슴속으로 먼저 들어온다. 빵의 익음도 절정을 생각하게 한다. 그 속에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시간이 담겨 있다. 혹은 거칠고 투박한 생의 껍질도 숨어있다. 잊힌 얼굴들이 있고 붙잡지 못한 시간이 있다. 어딘가에 멈추어 섰던 기억,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간절함이 녹아 있다. 익어야만 존재가 뚜렷해지는 것들은 고유한 색이나 냄새를 품는다.
한때 가장 강렬하게 현실을 일깨워주던 게 있었다. 밥이 익어가는 냄새였다. 구황작물에 질려 뱃속이 가라앉아 있을 때 보글보글 가마솥에서 끓어 넘치던 밥물은 기운을 솟게 했다. 숫제 모든 냄새의 대명사 같았다. 가난이 허술한 집안을 무시로 드나든 때였으니 절망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냄새라고 하기조차 밋밋하지만 풀기의 따뜻함과 물큰함은 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눔으로 묶인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좋은 사람들까지 밥 냄새는 슬프고 나쁜 감정을 쓸어내는 힘이 있다. 자식을 위해 밥이 익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은 그 절실함이 하나의 문장으로 일단락된다. “밥 먹었느냐?”라는 짧은 문구가 함의한 지극한 사랑과 간절한 염원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냄새가 가진 강렬한 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데도 인색하지 않다.
잔잔하게 물결처럼 스며드는 밥 냄새에 비하면 빵 냄새는 좀 더 자극적이다. 여러 가지 재료가 섞여서 조화를 이루는 그 접점이 맛의 결정을 이룬다. 구수하고 달콤하고 담백하다는 걸 통틀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저 ‘아, 이 냄새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통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맛이라니, 익어가는 것들이 가진 따스함이다.
진열된 제품만 보다가 빵이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지 십 년이 되어간다. 진한 갈색 옷을 입은, 겉이 반질반질한 단팥빵은 단박에 여러 이미지를 불러온다. 겹겹이 쌓인 지난 기억을 들추기가 무섭게 달콤함이 먼저 비어져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정겨움으로 정의되는 행위의 순간이 가슴에 머물렀다 사라지곤 한다.
열두어 살 적, 기억의 한편에 외할머니가 존재한다. 오일장에서 콩나물을 팔았던 할머니의 시간이 단팥빵 속에 꽉 차 있다. 웃음만큼이나 푼푼한 고쟁이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돈은 단팥빵을 사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콩나물 한 소쿠리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단팥빵 맛은 신세계였다. 모양이 똑같지는 않아도 그때의 감성이 변하지 않는 건 빵이 정을 타고 세대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유난히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곰보빵은 80년대의 산업현장과 공장의 칙칙한 환경을 재생한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시간에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 생산품의 불량을 고를 때 시간은 더디게도 흘렀다. 꼼짝 않고 사물을 들여다보면 어지럼증이 일고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 배가 자주 고팠다. 열 시간이 넘는 노동에 몸은 환한 햇빛에 대한 갈망으로 비칠거렸다.
권리는 약하고 의무는 강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길 만큼 세뇌의 힘에 끌려 다녔다. ‘산업일꾼’이라는 번지르르한 단어에 속아 생산성 향상에 열을 올렸다. 말을 제한당하고 꿈을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간식으로 주어지던 곰보빵 하나가 허기를 채워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 구수한 맛은 어두웠던 서사의 중심으로 남았다. 불합리함에도 저항을 꿈꾸지 못했던, 개인의 개성이 통하지 않던 획일화된 시대의 앙금이다.
꾹 누르면 납작해지던 단팥빵의 속은 부드러웠으나 곰보빵은 시간이 지날수록 퍽퍽해졌다. 그래도 단맛은 변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견뎌야 할 때 단맛은 퍽퍽함을 뛰어넘는 위로가 돼주었다. 이제는 소보로빵으로 더 친숙한 곰보빵 맛은 예나 지금이나 어금지금하다. 단지 곰보빵이 오븐에서 갓 나왔을 때의 강렬한 냄새에 끌려 익어감의 의미를 인식한다. 그때의 허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야기는 남아 줄곧 감성을 건드린다.
빵이 익어가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서 익어가는 것일까. 변해가는 것과 익어가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익어간다는 말에 무게가 실린다. 빵이 삶의 한 지축이 되면서 새로운 서사가 다시 이어짐을 느낀다. 단순한 물질이 아닌 정신, 영혼의 익어감, 그건 결국 사람다움이다. 노릇하게 잘 익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울 수가 없다.
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은 빵은 마틀마틀하다. 결이 가지런히 흐르지 않고 뭉쳐서 진득하다.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식으면 쉬이 딱딱해지고 모양도 볼품없다. 빵을 보며 사람도 발효의 시간을 잘 거쳐야 각을 세우지 않고 동글동글해짐을 알 수 있겠다. 반죽 자체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빵처럼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내면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익어야 비로소 냄새를 풍기고 모양이 완성되는 세상의 모든 것들, 그 중심에 시간이라는 비밀이 고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