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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ㄴ
🍎 南谷和尙의 保任.
道(適)란 깨닫기도 어렵지만 깨달은 뒤에 그것을 지켜 나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옛날 南谷 큰스님이 智異山 泉隱寺에 살고 있었다.
일찍이 出家한 所聞난 스님으로 늘 實相寺를 왔다 갔다 하면서 工夫를 하고 있었다.
한 番은 實相寺를 갔다가 안팎으로 거의 百 里가 넘는 碧少嶺을 넘어가다가 偶然히 소금 한 가마니를 짊어진 소금장수 老人과 同行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山은 높이가 1千m가 넘는 곳이라 소금장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그렇다고 소금장수를 뒤로하고 스님혼자 훌쩍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妻子息을 먹여 살리기가 이렇게도 힘이 드는구나.'라며 안스러운 마음에 스님이 말門을 열었다.
"老人丈, 짐이 무거우신 것 같은데 내가 좀 지고 갈까요?"
"이 놈의 소금이 팔아봐야 몇푼어치 되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의 등骨을 휘게합니다. 그렇게 하여 주신다면야 저는 感之德之지요."
"고맙기는 뭐가 그리 고마울게 있습니까. 於此彼 나는 빈 몸으로 가는 사람인데."
"그러면 알아서 하시구려."
스님이 지게를 지고 길을 나서자,
"스님 未安합니다."
"別말씀 다 하십니다. 내가 老人丈 보다야 나이로 보나 氣運으로 보나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얼마쯤 山을 오르니 스님의 온 몸은 땀 범벅이 되었으며, 코에는 단 냄새가 나고 입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스님은 물이 있는 곳 까지는 죽기살기로 가야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하다 그만 돌부리에 발가락이 채여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소금 가마니가 언덕배기로 굴러 내려갔다.
그를 본 소금장수가, "앗, 이런 變故가 다 있나"라며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그러자 스님은 未安한 마음에 아픔도 잊고 바로 일어나 소금섬이 멈춘 곳까지 急히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소금섬이 풀어지면서 흩어졌던 소금도 옷자락에 쓸어 담아 힘겹게 山 비탈을 올라왔다.
그런데 老人의 反應은 참으로 多血的이고 고약했다.
"여보, 大師. 그 좀 操心하시지. 소금섬이 그만하기 多幸이지 아주 쏟아져 버렸더라면 어찌 할 뻔하였겠소?"라며 아주 못마땅해 했다.
"未安합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그리되었으니 容恕하여 주십시오. 소금섬이 아주 터지지 않았으니 그나마 不幸中 多幸입니다."
"大師, 只今 무어라 하셨소? 不幸 中 多幸이라니. 남의 物件을 짊어졌으면 操心을 해야 할 일이지 말이야."
좋은 일 하다 피박쓴 꼴이 되어 스님은 참으로 難堪하고 한便 野俗하기도 했다.
自己의 소금만 貴한 줄 알았지 사람 重한 것은 眼中에도 없는 老人은 繼續 스님에게 是非를 걸며 악다구니를 피웠다.
"어디서 굴러먹다온 중놈이여, 그래도 辨明을 하고 대들어!"
"고마워 할 때는 언제고, 좋은 일하려다 失手한것을 그렇게 甚하게 타박하시면 어찌합니까? 그만 고정하시고 길을 가시지요."
그런데 그 老人은 끝끝내 固執을 부리며 甚하게 火를 냈다.
"老人丈, 容恕하세요. 繼續 火만 내시면 彼此間 좋은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理解하시고 서둘러 떠납시다."
"뭣이야, 이 건방진 중놈보소. 너 이놈, 맛좀 보아라."
하면서 느닷없이 뺨을 후려 갈겼다.
"아이쿠!"
하고 스님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자 소금장수는 더욱 火를 내며 兩쪽 뺨을 후려치며 발길질을 했다.
南谷스님은 老人을 밀쳐내며 하도 어이가 없어 그져 防禦만 하고 있자, 아주 바보 取扱을 하며 이제는 큰 돌멩이를 들어서 머리에 치려고 달려들었다.
實際 스님의 힘은 엄청난 壯士였지만 꾹 참고 老人의 兩손을 잡은채 놓아주지 않자, 돌맹이는 저절로 땅으로 떨어졌다.
스님이 老人을 바라보며
"彼此 이러다가는 갈 길도 늦어지고 苦生만 할 것 같으니 이제 鎭靜하시고 山을 오릅시다 ."
스님이 손을 놓아주자 令監은 씩씩거리면서 짐을 지고 고개 길을 오르기 始作했다.
스님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하였다.
'참으로 可憐한 人生이로고, 저런 人生과 같이 사는 妻子息이 얼마나 따분하고 속傷할까.'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그런데 소금장수는 또 얼마를 올라가지 아니하여서 비지땀을 흘리며 끙끙거리기 始作하였다.
"힘드시죠?"
"힘듭니다."
"아까는 내가 失手를 하여 넘어졌지만 이番에는 操心操心하여 짐을 져다 드리리다."
하자, 소금장수는 말없이 소금짐을 내려 놓고 스님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스님은 조금도 不快한 마음이 없이 지게를 지고 천천히 길을 걷기 始作하였다.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걸음에 맞춰 念佛을 외면서.
얼마쯤 가다보니 헤어질 곳이 되었다. 스님은 지게를 벗으며
"이곳에서 헤어져야 겠습니다. 操心해 가세요."
合掌하며 人事를 건네자, 그때서야 老人이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시오."
"예. 泉隱寺에 있습니다."
"나는 只今까지 世上에 道僧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直接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부디 저의 無禮를 容恕해 주십시요. 行悖를 부러 正말 큰 罪를 犯했습니다."
"내가 失手한 것이 잘못이지 老人丈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제가 原因을 提供했던게지요."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님 같은 道人에게 못된짓을 했으니 다음 果報가 두렵습니다."
"내가 무슨 道僧입니까. 이렇게 함께 길을 걸어 온 道伴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慈悲를 베풀어라 하셨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마음도 없이 하였으니 뒤에 果報 또한 걱정할 必要는 없습니다."
"스님, 罪悚하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고 서로 웃는 낯으로 헤어졌다.
老人은 歸家하여 집에 妻子息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나는 오늘 부처님을 보았다. 2千如 年 前 부처님이 印度에서 나섰다 하더니 그가 죽어 우리나라에서 다시 태어나신걸 보았다."
라며 오늘 있었던 일을 說明하고 스님을 모두 찾아가 뵙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온 家族이 함께 떡과 엿을 精誠드려 빚어 스님이 계시는 泉隱寺를 찾아갔다.
스님은 똥통을 지고 밭에 나가 菜蔬를 돌보고 있었다.
"어허, 소금장수 老人丈이 여긴 웬일입니까?"
하고 반겨 맞아 주자, 老人과 그의 家族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敬虔하게 절을 올렸다.
이윽고 法堂으로 들어가 供養을 한 뒤, 며칠間 절에 머물며 온갖 일들을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後에서야 사람들은 泉隱寺에 隱居해 있던 眞正한 道人 南谷和尙을 알아보고 큰 스님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 南冥과 相思 구렁이
(慶尙南道 晉州市 井村面에 傳해오는 南冥 曺植의 外道 이야기)
晉州 德山에 살던 曺植이 서울로 遊覽을 떠났다. 가는 길에 해가 져 한 旅館에 들어가니 處女가 맞았다. 南冥이 父母님은 계시지 않으냐며 묻자, 外家에 祭祀가 있어 갔다고 答했다. 이렇게 房을 잡은 南冥은 어찌어찌하다보니 處女와 눈이맞아 잠자리를 함께했다.
이튿날 南冥은 處女의 물음에 한 보름쯤 서울에 머물다 돌아오리란 말을 남기고 서울로 向했다.
이렇게 보름이 지난 後 南冥은 서울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그 旅館을 건너뛰고 本家로 돌아가버렸다.
以後 處女는 相思病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그女의 父母는 딸이 南冥과의 同寢이 原因임을 알고 그를 찾아가 함께 旅館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南冥은 處女와 同寢에 들어갔는데, 깨어보니 큰 구렁이가 그의 몸을 칭칭감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南冥은 구렁이가 든 큰 櫃를 짊어지고 歸家한 뒤 壁欌에 넣어 두었다.
南冥先生의 門下에 工夫하는 弟子가 셋이 있었는데, 어느 날 先生이 볼일이 있어 다녀오겠다고 떠나며 弟子들도 하루를 놀다오라고 일렀다.
以後 두 사람은 밖으로 놀러가고 한 사람만 房에 남아있었다.
그는 壁欌의 櫃안에 구렁이가 있음을 생각해 내고, 바로 끌어내어 때려 죽인 뒤 땅에 묻어버렸다.
弟子로 부터 구렁이를 죽이게 된 理由를 들은 南冥은 큰 災殃이 내릴것을 두려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歸家했던 그 弟子와 그의 일여덟 家族은 벼락으로 집이 全燒되며 모두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 說話도 韓國의 全域에 많이 傳承되는 '구렁이 처녀와 선비'의 民談 中의 하나이다. 南冥先生같은 훌륭한 선비도 때로는 逸脫하는 한 凡夫의 裏面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後學 선비들에게도 示唆하는바가 큰 敎訓的인 說話이다)
🍎 南門 안 酒店
(出典 : 編者, 編纂年代 未詳의 漢文野談集 醒睡稗鐸)
南大門 안 어느 濁酒장수가 開店한 첫날 해장국을 끓여서 罷漏 卽時 가게門을 열고 燈불을 걸었다.
그때 한 喪主가 혼자 들어와 해장국에 술 한 盞을 請해 마신 後, 한 盞을 더 請해 마셨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내래 돈이 없오. 이담에 갚으리다." 라는 것이다.
"아무렴 어떻겠수." 라며 돌려 보내자, 그 喪主가 나간 後에 술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盡終日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술을 팔았다.
이튿날도 새벽에 가게門을 열고 等불을 내걸자, 그 喪主가 또 들어와서 어제와 똑같이 行動했다.
"아무렴 어떻겠수."
또 다시 술꾼이 들이 몰려왔다.
며칠을 이런 날이 繼續 되었다.
'아니, 어쩌면 工巧롭게도 이럴 수가 있을까. 或是 도깨비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濁酒장수는 그 以後부터 더욱 恪別히 待接을 했다.
그 喪主가 어느 날 밤 돈 200냥을 내 놓으며 "이게 내 外上 술값이오." 라는 것이다.
種種 이렇게 外上도 갚았으며, 1年만에 數萬金을 벌었다.
어느날, 술장수가 喪主에게
"저, 술장사는 접고 달리 計劃을 세워보는 게 어떨런지요?" 묻자,
"생각대로 하시지요." 란 答이 왔다.
가게를 내놓기가 무섭게 平素 장사가 잘 되는것을 눈毒 드려온 한 宣惠廳 使令이 잽싸게 찾아와 집값을 두둑히 支拂하고 器皿釜鼎 等도 厚한 값으로 買收하였다.
使令은 술 數十 항아리를 빚은 後에 해장국을 끓이고 罷漏 卽時 가게를 열고 燈불을 달았다.
한 喪主가 혼자 들어오더니,
해장국에 술 한 盞을 請하고, 거듭 한 盞을 더 請했다. 그런 後
"내래 돈이 없어 來日 갚으리다."라는 것이다.
술장수는 잔뜩 火를 내며 "남의 새로 낸 가게에 마수걸인데 外上술이라니. 빨리 돈을 내시오."
"돈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돈이 없거든 喪服이라도 잡히고 가시오."
"喪服을 꼴난 서 푼 술값에 잡힌단 말이오?"
이 말에 바짝 毒이 오른 술장수가 맨발로 마루를 뛰어내려 喪主의 뺨을 후려치러하자, 喪主는 辱說을 퍼부으며 달아났다. 술장수가 그를 뒤쫓았다.
한 모퉁이를 돌다말고 한 喪主를 붙잡은 술장수는 다짜고짜 方笠을 벗기고 兩손을 번갈아 가며 뺨을 때리며 辱을 퍼부었다.
"外上술에 辱까지 하며 逃亡을 치다니. 이런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喪服을 벗기고 方笠도 빼앗아 가버렸다.
이 喪主는 다름 아닌 벼슬아치 兩班으로, 큰집 忌祭에 參禮 後 歸家하다가 뜻밖에 罔測한 變을 當한 것이다. 뺨은 얼얼할 뿐 아니라 憤氣撑天하여 다시 큰집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大驚失色하며 어찌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어떤 놈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뺨을 후려쳤다."라 하자
모두들 "술장수놈 所行이 틀림없다."
며 下人들을 앞세워 方笠과 喪服을 찾고 술장수를 잡아왔다.
于先 단단히 憤풀이를 하고 날이 밝자 刑曹로 끌고갔다. 刑曹에서는 法에 따라 그를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結局 술장수는 家産만 蕩盡하고 苦役을 치뤄야만 했다.
(*朝鮮時代에 說話로 推定되고 編者나 編纂 年代 不詳이며, '醒睡稗說' 이라는 冊 속에 '每事從寬'이라는 題目으로 실려 傳하고 있다.
도깨비를 通하여 '善人엔 福을, 惡人은 禍를 입는다.'는 民衆 意識이 짙다.
🍎 南師古 說話
南師古는 朝鮮 中期의 學者이며 道人으로, 天文과 地理에 精通하고 道術을 부려 神異한 行跡이 많다.
南師古는 宣祖 때에 天文敎授를 지냈다는 것 外에 뚜렷한 經歷은 없는데, 當代부터 여러 文獻에 많은 說話를 남겼다.
'東野彙輯' '大東奇聞'에 各 7篇, '鷄山談藪'에 3篇, '松窩雜說' 芝峰類說' '於于野譚' '靑丘野談'에 各各 1篇씩 傳해지고 있다.
口傳設話는 南師古의 故鄕인 慶尙北道 蔚珍郡에 많이 傳해지며, 그밖의 地域에서도 傳해지고 있다.
文獻說話에서는 南師古가 宣祖의 登極과 東西 黨爭의 始作을 豫言하였다고 하는 內容이 많다.
壬辰倭亂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丁酉再亂 때는 倭軍이 漢江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豫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口傳說話에서는 倭將 헤이(平秀吉)가 중으로 變裝하여 偵探을 하러 와 朝鮮 地圖를 그리는 것을 알고, 地圖를 못 쓰게 만들고 헤이가 魂이 나서 逃亡치게 했다고 한다.
文獻에서와 같이 앞일을 豫言하는데 그치지 않고 積極的인 防備策까지 講究했다는 것이다. 口傳되는 이 類型은 異人이 外賊을 退治한 이야기의 좋은 例가 된다.
說話 속에 나타나는 南師古의 道術은 반드시 肯定的인 意味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山寺에 들어가 異常스러운 중에게 道術을 배웠다는 것은 그가 지닌 道術의 出處가 疑心스럽다는 생각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平素에는 할 일이 없어 집에 든 도둑이나 골려 주고, 참외 장수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邪術을 부리다가 李滉에게 制止當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風水地理에 아주 精通하면서도 自己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는 慾心에 눈이 어두워 아홉 番 移葬하고 열 番 무덤을 쓴 九遷十葬을 하다가 亡하고 말았다 한다. 無理한 짓을 한 탓에 子孫도 없다고 한다.
道家的 術法을 選擇했으므로 儒家的인 觀點에서 보면 異端的인 人物이라는 點을 들어서 一部 文獻說話에서처럼 口傳說話에서도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 南師古의 三虞發福.
(慶尙南道 河東郡 河東邑 興龍里에서 南師古와 關聯하여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
南師古(1509~1571)의 三虞發福은 朝鮮中期의 易術家로 有名한 南師古에 얽힌 風水傳說로서 河東邑 興龍里에서 머슴살이 三十 年 만에 三虞發福 할 자리에 어머니를 묻고 千石꾼 寡婦 富者와 婚姻을 하여 幸福하게 살았다는 明堂發福談이다.
風水地理에 能한 南師古는 미리 보아둔 묏자리 中에 三虞發福 자리가 하나 있었다. 三虞發福이라 하면 三虞(葬事를 지낸 後 세 番째 지내는 祭祀)에 福이 오기 때문에, 그때 墓를 잘 쓰고 나면 三虞에 富者가 되는 자리를 말한다.
南師古는 明堂을 빼앗기기 싫어 자리를 지키느라 설날 祭祀 參席까지도 걱정을 했는데, ‘섣달 그믐날 저녁엔 人跡이 없을 것이다’라고 判斷을 하고 그믐날 밤에 집에 가서 祖上 祭祀를 지내고 親舊와 明堂자리를 찾았더니 누군가가 한 屍身을 옆에 두고 땅을 파고 있었다.
하도 異常해서 이 사람이 어찌 이 자리를 알았을까 싶어 물었더니 그 사람이 對答했다.
“저는 이 밑의 마을에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三十 年째 千石꾼 집안에 일을 돕고 사는 머슴입니다.
그런데 어제 섣달 그믐날 밤 어머니가 老患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설날이라 初喪을 치러 올 사람도 없고하여 저 혼자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埋葬을 하려고 땅을 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어찌 埋葬하려 하오?”
“내가 나무하러 오면 여기가 따뜻해서 우리 어머니 墓자리로 쓰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福은 저런 福이 참 福이로다. 남의 福은 앗을 수가 없구나'란 생각이 마치자 “참으로 福된 일이오. 내가 風水를 좀 아니 이곳의 坐나 바르게 봐 드리리다."라며 두 老人이 머슴을 도와 墓를 함께 써 주었다.
그리고 三虞發福을 確認하고 싶어 머슴의 諒解를 求하고 그를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그의 집은 보잘것없는 수숫대 움幕집이었다. 喪主는 묏자리를 봐준 老人들을 房에 모시고 밥을 지으려 했으나 雜穀 뿐이고 쌀이 없었다.
갈곳이라고는 主人집 뿐이라 발걸음을 했었지만 初하루부터 쌀을 求하기 悚懼스러워 大門앞을 서성거렸다.
때 마침 大門이 열리며 안主人이 나왔다. “예서 뭐하고 있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마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暫時 망서리다 말을 이어갔다.
"어제 밤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初喪을 치렀는데 그때 두 老人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 분들이 고마워 집에 모셨으나 쌀이 떨어지고 없기에 찾아왔습니다. 하오나 喪主 몸으로 初하루부터 大門을 들어서는것은 禮儀가 아니란 생각에 쉽게 발을 드리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안主人은 그런 걱정은 말고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그 成火에 못이겨 집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飮食을 차려 주면서 많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머슴은 집에 두고 온 老人들을 걱정하며 빨리 돌아가 쌀밥이라도 한 그릇 지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에 안主人은, 그 일이라면 걱정 말고 많이 먹기나 하라고 하며 집에 계시는 손님은 섭섭치 않게 이미 많은 飮食을 실어 보냈다고 했다.
수숫대 움幕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南師古는 보내 온 飮食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면서 “저 놈 이제 큰 富者가 되었어!”라며 感歎했다.
그 머슴의 안主人은 三十 歲 때 寡婦가 된 千石꾼 富者였던 것이다.
平素 誠實하고 禮를 아는 머슴에 마음을 두고있던 안主人인지라 좋은 機會라 생각하며, 큰床을 차린 자리에서 請婚을 했다.
그래서 머슴은 어머니를 葬事한 지 3日 만에 千石꾼이 되어 버린 것이다. 南師古는 이렇게 일이 이루어 지리란 것을 미리 알아차린 것이었다. 예前부터 三虞發福 묏자리가 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닌 성 싶다.
(* 南師古의 三虞發福은 實際 人物인 南師古와 關聯한 傳說로서, 喪을 치르고 三虞가 되어 바로 福을 얻는 자리에 墓를 써서 福을 받은 이야기이다. 이 傳說의 焦點은 明堂을 찾아낸 南師古에 中心이 있지 않고 이런 明堂을 얻을 만한 사람이 福을 얻었다는 데에 있다. 三虞發福의 明堂을 얻은 사람은 三十 年 間 머슴살이를 한 사람으로 수숫대로 세운 움幕에 살고 있다. 또 손님이 찾아와도 밥을 待接할 수 없을 程度로 가난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묻어 드릴 곳을 미리 봐 두는데, 明堂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하게 便히 쉴 수 있는 곳을 點찍어 두는 素朴한 孝誠을 지니고 있다. 또 喪을 當하여 主人집에 설날인 正月 初하루에 들어갈 수 없다며 大門을 들어서지 않는 禮를 갖춘 사람이다. 안主人이 좋은 飮食을 待接하여도 自身만 배부르게 먹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卽 南師古가 ‘福 받을 사람은 福을 받는다’는 評價는 그 사람의 됨됨이에 있었다. 三十 年間 일해 온 誠實性, 父母님의 묏자리를 생각하는 素朴한 孝心, 主人에게 禮를 다하는 마음, 自己만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三虞發福하는 明堂을 얻는 資質이다.
아무리 明堂이라도 그 자리에 그 福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간다는 類型의 이야기들은 明堂傳說에서 普遍的으로 드러난다. 훌륭한 人物의 境遇에 祖上의 묏자리를 잘 써서 그만한 人物이 되었다는 類型이지만, 一般 百姓들의 境遇 明堂을 받을 만한 善行을 하거나 人品을 갖추고 있어야 明堂을 얻는다.
南師古의 三虞發福에서 特異한 點은 寡婦의 開嫁가 寡婦 스스로의 決定에 依해 이루어지며, 身分의 差異도 쉽게 克服한다는 點이다. 안主人이 三十 歲에 홀로 된 千石꾼 富者로 머슴에게 婚姻을 請하는 것을 보면 寡婦의 開嫁가 自然스럽고 身分의 差異도 아랑곳하지 않는 奔放함이 드러나는 傳說이다
| 🍎 南山里 立石과 階伯將軍 傳說 (忠淸南道 公州市 灘川面 南山里 一帶에 傳해지는 立石 說話이자 階伯將軍 傳說) 南山里 立石과 階伯將軍 傳說은 祈子信仰과 階伯의 異蹟을 對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南山里 立石은 바로 祈子石이므로 여기에다 致誠을 드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를 祈子精誠이라고도 하는데, 子息을 낳기를 바라고 精誠을 드리는 것을 意味한다. * 옛날 百濟의 階伯將軍이 黃山伐 戰鬪에 나가면서 灘川面 南山里에서 칼을 갈았다. 그는 칼을 다 간 뒤 부처모링이를 내리치자 돌은 무처럼 동강났다. 이를 지켜본 百濟의 兵士들이 士氣衝天하여 黃山伐에서 壯烈하게 戰鬪를 벌였다. 그러나 羅唐聯合軍의 數가 워낙 많아 敗하고 말았다. 이 戰鬪에서 살아남은 한 兵士가 將軍이 돌을 벤 場所를 잊지 못하고 찾아와 草幕을 짓고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家門의 代를 이을 생각으로 立石 앞에 무릎을 꿇고 階伯將軍에게 아들 점지를 祈禱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以後 祈子石으로 所聞이 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아들 얻기를 祈禱하고, 또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9代 獨子도 있었는데 이곳에 致誠을 다하여 아들 셋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傳해들은 이웃 마을의 젊은이가 부처모링이를 지나가다가 立石을 손가락질 하면서 비웃었다. “저까짓 돌덩어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일을 만든단 말이여. 다 말쟁이들의 장난이지.” 이런 일이 있은 後 그 젊은이는 손가락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겉은 멀쩡한데 아프기만 하였다. 醫員을 찾아갔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占쟁이가, “왜 부처님한테 손가락질을 하며 辱을 한 것이여.”라고 본 듯이 말하였다. 젊은이는 부처모링이 앞에 찾아가 告祀하고 自身의 無禮함을 뉘우쳤다. 그랬더니 손가락이 씻은 듯이 나았다. 以後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가 告祀를 지낸 正月 初이레부터 열나흘까지 個人別 告祀를 지냈다. 그리고 正月 보름에는 이곳 南山里 立石 앞에서 마을의 大同告祀를 지냈다. 🍎 남은 바위, 別稱 南原 바위, 남한 바위 傳說 (全羅北道 淳昌郡 金果面 防築里의 남은 바위와 關聯한 傳說) 남은 바위 傳說은 金城山城을 쌓는 過程과 關聯하여 傳承되는 두 가지의 築城說話이다. 하나는 山城을 쌓으러 가는 途中에 멈춰 선 바위가 南原 梁氏무덤의 고인돌이 되었다는 무덤 由來談이고, 다른 하나는 道人이 몰고 온 바위가 쓸모가 없어 남겨졌다고 하여 '남은 바위'로 불리웠다는 巖石 由來談이다. (1) 남은 바위 傳說 全南과 全北의 境界線에 남은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남한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智異山에 있던 바위가 南쪽을 向하여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바위를 보고 "너는 어디를 그렇게 가고 있는냐?"라고 물었다. 바위가 하는 말이 "나는 山城을 쌓으러 간다."라고 말하며 걸음을 繼續했다. 그렇게 자꾸만 가다가 金果面 防築里를 지날 즈음 아기를 가진 梁氏 夫人을 만났는데, 夫人이 대뜸 "아이고 別일이야. 바위가 다 걸어가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바위는 그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 바위가 南原 梁氏 무덤의 고인돌이 되어 그 자리를 그렇게 지키고 있게 되었다 한다. 日帝 强占期 때 日本人들이 이 바위를 깨려고 정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가서 "그 돌은 우리 마을의 重要한 돌이니 제발 그 돌만은 깨지 말라."라고 懇請하였다. 結局 마을 사람들의 請을 받아들여 바위를 깨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다. 只今도 그 바위에는 정으로 구멍을 뚫은 痕跡이 뚜렷이 남아 있다. (2) 남은 바위 傳說 (金城山城에 築城 說話) 金城山城은 全羅南道 潭陽郡 龍面 山城里와 金城面에 接해 있고, 北東쪽으로는 淳昌郡 八德面의 一部에 接하여 쌓아 올린 山城이다. 이 城은 百濟時代에 쌓은 城으로 推定되고 있으며, 그 規模나 朝鮮時代 5個 郡縣이 管掌하였던 것으로 보아 重要한 城으로 看做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城을 쌓을 當時 想像을 超越할 많은 人員과 資材가 動員되었음은 斟酌하고도 남는다. 많은 百濟人이 動員되어 周邊의 山에 흩어져 있는 돌까지 運搬하여 쌓아 올렸다. 이때 한 道人이 회초리를 들고 南原 쪽의 바위들을 몰아오고 있었다. 山城을 쌓는 데 쓸 돌이었다. 그런데 金果面 防築里 앞까지 몰아왔을 때쯤 金城山城이 完工되어 이 바위들은 더 以上 必要 없게 되었다. 그래서 結局 이 바위들은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한다. 洞民들은 이 바위를 山城으로 가다 남게된 바위라 하여 '남은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南原에서 온 바위라 하여 '南原 바위'로 부르기도 하였다. 🍎 南怡將軍 說話 (朝鮮 前期의 武臣 南怡에 關한 說話) 非凡한 能力을 가졌으나 抑鬱한 죽음을 當한 名將 南怡(1441~ 1468. 武臣. 서울 出生. 本貫 宜寧. 奸臣 柳子光 謀陷으로 處刑됨)에 關한 人物傳說로, '燃藜室記述' '靑野謾輯' '大東奇聞'에 文獻 資料가 傳해지고 있으며, 口傳說話도 全國에 걸쳐 分布되어 있다. 南怡將軍 說話를 整理하면 出生과 婚姻, 立功과 死亡의 4段階로 要約할 수 있다. ① 出生에 對해서는 各 篇이 모두 南怡는 짐승의 怨魂이 還生한 것이라고 한다. 人身供犧를 받는 巨大한 지네 또는 뱀이 그 弊害를 없애려 한 어느 異人에 依하여 退治된 뒤 怨讐를 갚으려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非凡한 能力을 가지게 되었고, 몇 차례 스승 또는 아버지인 異人을 해치려는 試圖 끝에 怨恨이 解消되었다는 것이다. ② 婚姻에 關한 內容은 口傳이나 文獻說話나 같은데, 모두 南怡의 非凡性을 보여 준다. 南怡가 어렸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箱子를 싸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粉을 바른 女子 鬼神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異常히 여겨 그 뒤를 따라갔더니 權擥의 집으로 들어갔다. 暫時 뒤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主人집 娘子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므로, 南怡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許諾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許諾해 주었다. 南怡가 들어가니 娘子의 가슴을 타고 앉았던 鬼神이 곧 달아나고 娘子가 일어나 앉았다. 南怡가 나오니 娘子는 다시 죽었다가 南怡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南怡는 自己가 본 바를 이야기하고, 藥으로 治療하였다. 이 일로 南怡는 權擥의 사위가 되었다. ③ 立功 部分에는 濟州道 征伐과 豆滿江 征伐로 遼東 700里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濟州道를 征伐하였다는 것은 虛構이지만, 說話에서는 濟州道 征伐 때 南怡에게 죽은 濟州道 女王의 怨魂이 南怡의 抑鬱한 죽음의 原因이라는 各 篇도 더러 있다. ④ 死亡은, 그가 읊은 詩의 글句가 그에게 쫓겨난 粉 바른 厲鬼 또는 濟州道 女王이라는 厲鬼의 장난에 依하여 임금에게 ‘未平國’이 ‘未得國’으로 잘못 읽혀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 詩는 白頭山石磨刀盡 (白頭山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波飮馬無 (豆滿江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平靜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後世에 어느 누가 大丈夫라 이르리요) 여기에서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읽혀졌다. (이 詩는 南怡 將軍이 白頭山에 올라 지은 詩인데 雄壯하고 氣勢가 넘치는 詩이다. 그렇지만 이 詩가 나중에 큰 後患이 된다. 奸臣 柳子光은 이 詩의 한 句節을 이렇게 고치고 南怡를 逆謀罪로 몰아 斬首케 했다. 男兒 二十 未平國을 男兒 二十 未得國으로) 以上의 4段階는 모두 怨魂과 關係있는 것들이다. 實際로 南怡는 宜山尉 南暉의 아들이고 太宗의 外孫이라는 名門家에서 태어났음에도, 說話에서는 그같은 身分이 全혀 考慮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南怡의 죽음을 抑鬱한 것으로 認識해 온 說話 享有層의 同情에서 起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理由 때문에 그의 죽음을 納得할 수 없는 享有層은 그것을 怨鬼의 作用으로 解明하고자 한 것이다. 뒤에 民間 信仰에서 ‘南怡將軍神’으로 信仰의 對象으로 받들어져 오기도 한다. 🍎 南湖스님이 風瘡을 낫다. 佛敎通史에 보면, 南湖永奇 律師는 젊어서 大風瘡으로 苦生하다가 生命이 危殆로웠다. 그는 門前乞食하며 鐵原 寶蓋山에 들어가니 한 스님이 觀世音菩薩을 부르면 治癒가 되리라 勸했다. 그래서 房을 하나 빌려 晝夜로 觀世音菩薩에 精進을 했더니 하루는 꿈에 白衣를 걸친 女人이 찾아왔다. 仔細히 보니 自己의 큰 누님이었는데 손으로 온몸을 만져주니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律師가 깨어보니 고름이 빠져 나왔으며 病은 漸漸 나았다. 그로부터 發心 出家하여 特히 戒律을 嚴正히 지킴으로서 남들로부터 律師라는 尊稱을 듣게 되었다. (滅病苦二修에, 慶州 佛國寺 石窟庵에 있던 高德山도 젊어서 風病으로 손가락이 다 빠지고 다만 兩손 엄지만 남았다. 그는 乞食으로 彷徨하다 어느 여름 亭子나루 밑에서 한 老僧을 만났다. "이런 病도 고칠 수 있습니까?" "觀世音菩薩 娒陀羅尼를 10萬讀 외우면 낫는다." 그래서 그는 娒陀羅尼를 써 달라고 하여 어느 큰 洞里앞 河川으로 가서 잔돌 10萬個를 주워 한곳에 모아놓고 乞食으로 延命하며 娒陀羅尼 한篇을 외울때 마다 돌 하나를 빼면서 10萬讀을 외웠다. 그때 꿈에 어떤 女人이 와서 그를 河川에서 沐浴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나니 病이 없어졌다 한다. 그래서 그 老僧을 恩人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番 뵙고자 절을 찾아다녔으나 만나지 못했다. 만나는 스님마다 말하기를 "그분은 반드시 觀世音菩薩의 化現이니 恩惠를 갚으려거든 중이 되라." 고 하여 그도 出家를 하였다.) (法苑珠林에, 將心餘가 中翰으로 있을 때다. 어떤 官卒이 請牒을 가지고 왔기에 그를 따라 어떤 神廟에 들어가 土馬를 타고 空中으로 날아갔다. 얼마 안 가서 帝王의 宮闕 같은 곳에 到着했다. 左便의 집에는 '極樂'이라고 써 붙였는데 매우 밝고, 右便의 집에는 '地獄'이라고 써 붙였는데 컴컴하였으며, 사람들이 우물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大王은 將心餘를 보고 "나는 任期가 다되어 가니 公이 이 자리를 代身하라." "저에겐 老母와 어린 子息이 있어 돌봐야 하옵니다." "公은 才名이 있으면서 어찌 그렇게 모르는가? 世上일은 마치면 마쳐지는 것이다. 내가 이미 上帝께 奏達하였으니 撤回하지는 못할 것이다." 將心餘는 火를 내다가 꿈을 깨니 땀으로 이불이 젖어 있었다. 일어나 앉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에 冥府에 들어가니, 다섯째 자리에 文簿가 山처럼 쌓여 있고 衙前이 그 자리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公의 자리다. 이제는 나와 다녀도 關與치 않는다."고 했다. 얼마 뒤에 警察에서 불러 묻기를 "어디 가서 그렇게 숨어 있었느냐?" 고 하여, 그는 這間의 事實을 말했더니 警官들도 놀라며 不思議에 歎服했다. 마침 恩師 風靜山을 만나 自己의 事情을 말했더니 그는 슬퍼하는 빛을 지으며, "나도 아내가 젊고 아들이 어려서 여기에 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여러 말 하지 말고 속히 後事나 整理하라."고 했다. 將心餘는 꿈을 깨어 王方伯 興五를 찾아 下直 人事를 告하니 興五는 깜짝 놀라 "그대의 얼굴이 검어지고 鬼氣가 풍기니 무슨 일인가."고 했다. 將心餘가 꿈이야기를 했더니 興五는 '大悲呪'를 외우라고 勸했다. 이에 온 집안이 齋戒하고 大悲呪를 외우니 顔色이 돌아오며 鬼氣가 煙氣처럼 사라졌다.) 🍎 浪伯스님이 죽어 巡察使가 되다. 奇聞異記에, 西紀 1719年 東萊 梵魚寺에서는 浪伯(法號는 樂安. 浪伯首座 或은 萬行首座)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戒行이 淸淨하였으며 行人은 勿論 金井山(802m) 周圍의 貧者들을 爲하여 物心으로 많은 布施를 行했다. 當時 朝鮮末葉에는 排佛政策을 폈는데, 이곳 東萊府使는 남달리 乖愎스러웠고 官權을 濫用하여 270如 種이나 되는 엄청난 雜役을 賦課하여 스님들을 마구 酷使시켰다. 절의 일도 많은데 每日같이 出役을 닦달하니 寺刹의 維持마져도 困難하게 되었다. 浪伯스님은 새벽 禮佛도 제대로 못할 形便에 있으면서 어찌 해서라도 스님들의 苦役을 免하도록 努力하였다. 남몰래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루라도 속히 이 生을 마치고 來生에는 큰 벼슬에 올라 修道僧들로 하여금 官權에 依한 拘束과 酷使 없이 佛道에 精進토록 보살피게 해 주시옵소서."라며 懇切한 祈禱를 드렸다. 그리고는 忽然히 절을 떠나 洞口밖의 山비탈을 開墾하여 오이와 감자를 심어 배고픈 者에 布施하였다. 또 한便 밤이면 짚신을 삼아서 발을 벗고 가는 行人들에게 나눠주었으며, 日沒 後엔 客들이 쉬어 갈 오두막을 마련하여 함께 머무르게 하고, 손수 밥을 지어 배고픔을 免하게 하였다. 그리고 如前히 새벽이면 일어나 西쪽에 있는 梵魚寺를 向하여 부처님께 精誠스레 祈禱를 올렸다. 이웃 마을 사람들도 浪伯스님이 지나가면 모두 合掌拜禮를 하였으며, 또한 일을 하게 되면 도와주곤 하였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난 初겨울 어느 날, 浪伯스님은 모든 것을 整理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梵魚寺로 올라갔다. 바로 그날 밤을 法堂에서 지새우더니 아침에 어느 行者를 만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몸은 주린 범에게 布施를 하고 떠나기로 하였다. 내가 간 後 24年이 되어 절의 雜役을 없애고 佛事를 爲해서 애쓰는 官吏가 있으면 그 사람이 나인 줄 알아라."란 말을 남기고 그 길로 山속으로 떠났다. 며칠 後 나뭇꾼에 依해 發見된 범이 먹고 남은 遺骨은 收拾되어 火葬하니 舍利와 靈骨이 나와 只今도 梵魚寺의 塔에 모셔져 있다. 그 後 果然 24歲의 나이 어린 慶尙道 巡察使 趙曮이 새로 赴任하여 各郡을 視察하게 되었다. 東萊郡에 들렀다가 때 마침 봄날이라 山川景槪가 좋기에 梵魚寺를 찾기로 하였다. 洞口밖에 이르러 開墾된 오이밭과 감자밭을 지나면서 어쩐지 鄕愁를 느끼며, 절에 이르러서는 마치 故鄕에 찾아온 듯한 感激으로 于先 金剛戒壇에 올라가 無數히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어떤 스님을 通하여 절의 事情을 묻더니, 여러 雜役으로 스님들이 苦生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單番에 免除하여주고 많은 佛事를 하기로 約束하였다. 그 스님은 感謝를 表하며 操心스레 趙 巡察使에게 나이를 물으니 24歲라 하였다. 그 스님은 浪伯스님을 떠올리며 스님이 남기신 말을 傳하고 오늘이 마침 浪伯스님의 忌日이라고 하자, 趙曮 巡察使는 그제서야 自己의 前生이 浪伯스님이었음을 깨닫고, 그 後부터는 平生을 通하여 많은 佛事를 하였다. 🍎 朗智스님 구름을 타고 中國을 往來하다. 三國遺事에, 揷良州(慶南 梁山) 阿曲縣의 靈鷲山 庵子에 神異한 스님이 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隣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나타나지 않고 그 姓名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스님은 恒常 法華經을 講說하였는데, 神通力이 대단하였다. 龍朔 初年에 伊亮公의 家奴 智通(655~?)이 일곱살 때 까마귀가 날아와서, "靈鷲山으로 가서 朗智스님의 弟子가 되십시오."하였다. 智通이 그 말대로 出家하여 靈鷲山을 찾아가다 어느 마을 앞 나무 밑에 앉아서 쉬는데, 忽然히 異人이 나타나서, "나는 普賢大師인데 너에게 戒品을 주려고 왔다."하고 곧 戒를 주고는 사라졌다. 智通은 心身이 恍惚해지고 곧 知覺이 환히 트이었다. 다시 길을 가다가 또 한 스님을 만나 智通이 물었다. "朗智스님을 아시는지요?" "어째서 朗智스님을 찾느냐?" 智通이 까마귀의 하던 말을 說明하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朗智다. 오늘 堂앞에 까마귀가 와서, 聖兒가 將次 스님께 올 것이니 마땅히 나아가 맞으라고 하기에, 와서 너를 맞는다." 하고, 손을 잡고 歎息하며, "神靈스러운 새가 너를 깨우쳐 내게 오게 하고, 또 내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祥瑞로운 徵兆이냐 ? 아마도 山神靈의 도움인가 보다." 智通이 感激하여 땅에 엎드려 禮拜하였다. 暫時 後에 朗智스님이 戒를 주려고 하니까 智通이, "제가 오다가 어느 마을 앞 나무 밑에서 이미 普賢菩薩에게 正戒를 받았습니다."고 했다. 朗智스님은 感歎하여, "착하도다. 네가 이미 親히 普賢菩薩의 戒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나서부터 아침 저녁으로 慇懃히 至聖을 만나 뵙기를 願했지마는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只今 네가 이미 親히 戒를 받았으니 내가 네게 미치지 못함이 많을 것이다." 하며, 도리어 智通에게 敬禮하였다. 이리하여 智通이 戒를 받던 나무를 普賢樹라 일컬었다. 智通이 朗智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이 곳에 와 계신 지가 얼마나 되십니까?" "法興王 丁未年(王 14年, 西紀 527)에 처음으로 이곳에 왔으니 只今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고 朗智스님이 對答했다. 智通이 이 山에 온 것이 文武玉 元年 丁未年(西紀 661)이니 이미 134年이 지난 것이다. 뒤에 智通스님이 義湘大師의 處所에 가서 法華經의 奧妙한 뜻을 깨닫고 敎化에 많이 이바지하였는데, 그가 곧 錐洞記(義湘은 小白山 錐洞에서 90日 동안 3,000如 名에게 華嚴經을 講說하였는데, 이 때에 智通이 重要한 部分을 간추려 記錄한 冊)의 著者이다. 元曉大師가 盤高寺에 머물러 있을 때 자주 朗智스님을 찾아가 뵈었는데, 스님은 大師에게 初章觀文과 安身專心論을 짓게 하였다. 大師는 그 두 가지를 지어 惑士 文善으로 하여금 가져다 朗智스님에게 바치게 하였는데, 그 冊 끝에 다음과 같은 偈頌을 지어 붙였다. "西쪽 골짜기 沙彌는 머리 조아려 東쪽 메뿌리 上德 巖前께 절한다. 가는 티끌 불어 靈鷲山을 보태게 하고, 작은 물방울 날려 龍淵에 던진다." 靈鷲山 東쪽에 太和江이 있는데, 中國 大和渽의 龍의 椎訓을 爲해 베풀었던 것이므로 龍淵이라 하였다. 智通스님과 元曉大師는 다 大聖으로, 다같이 朗智스님께 師事하였으니, 道가 높고 뛰어남을 可히 斟酌할 수 있겠다. 朗智스님이 일찍이 구름을 타고 中國 淸凉山에 가서 여러 무리와 함께 經의 講說을 듣고는 곧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곳 스님들이 그들 이웃에 사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을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절에서 여러 스님에게, "本來부터 이 절에 있는 스님은 除外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스님들은 各其 自己가 있는 곳의 이름난 꽃과 珍奇한 植物을 가져와 道場에 바치도록 하라."라고 命하였다. 朗智스님은 이튿날 靈鷲山의 과일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가 바쳤다. 절의 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 나무의 梵名은 梅提伽인데, 여기서는 赫이라고 한다. 오직 西天竺(印度)과 海東(우리나라) 두 나라 靈鷲山에만 있는 것이다. 이 두 山은 다 第十 法雲地로서 菩薩이 사시는 곳이다."라며, 朗智스님의 行色을 仔細히 살펴보고는 海東 靈鷲山에 사는 聖者임을 알아보았다. 이로 因하여 스님의 이름이 中國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朗智스님이 居處하던 庵子를 赫木庵이라고 하였는데, 只今 赫木寺의 北쪽 언덕에 있는 옛 절터가 그 遺跡이다. 靈鷲寺記에는 이런 글句가 있다. '朗智스님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庵子자리는 迦葉佛 때의 절로 記錄 되어 있다. 元聖王 때에 이르러 高僧 緣會가 이 山中에 와 살면서 朗智 스님의 傳記를 엮어 世上에 傳해졌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