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학원 공자아카데미 2019년7월호(2021.10.31.)
중국이미지_청해의 푸른 하늘
브리핑
절기_2019년6월과 7월의 절기
망종(芒種): 24절기의 아홉 번째이다. 양력으로는 매년 6월5일에서 7일 사이이다. 망종은 여름의 세 번째 절기로, 망종이 되면 중국 강남지역은 매우(梅雨) 시절로 접어든다. 망종에는 입하 때보다 기온이 상승하고 강우량도 증가한다.
하지(夏至): 24절기의 열 번째이다. 양력으로는 매년 6월20일에서 22일 사이이다.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이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하지를 중요한 절기로 여겨, 신령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 재액의 소멸과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였다.
소서(小暑): 24절기의 열한 번째이다. 양력으로는 매년 7월6일에서 8일 사이이다. 소서는 작은 더위로 아주 무덥지는 않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나, 아직은 1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대서(代署): 24절기의 열 두 번째이다. 양력으로는 매년 7월22일에서 24일 사이이다. 대서는 말 그대로 1년 중 가장 무더운 절기이다. 중국에서는 대서에 약초를 달여 만든 양차를 마시는 풍속이 있다.
도서추천_중국 명화 깊이 읽기
특집
소통과 교류의 여정_중한대조판 공자아카데미 발간 10주년을 돌아보며
표지로 보는 10년 역정
공자아카데미 창간 10주년 기념 독자 좌담회
공자아카데미 독자들이 보낸 축하 엽서
공자아카데미 10주년 기념 설문조사
중국문학의 창_연못에서
중국인물_중국의 르네상스인 소동파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라고 했다. 군자는 학식과 덕성을 갖춘 인격자로서 이상 사회를 세상에 구현할 중임을 맡았으므로, 박학다식하고 다방면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 가지 용도만으로 쓰이는 기물처럼, 어떤 한 측면에만 그 쓰임이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말의 뜻이리라.
중국의 송나라는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문화적 성취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북송의 수도 개봉의 청명절 모습을 그린 청명상하도를 보면 당시 개봉에는 다리와 성문, 거리, 어느 곳 할 곳 없이 인파가 넘쳐난다. 송대의 경제적 호황을 바탕으로 사대부 계층은 정치와 사회, 문화를 주도하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들 송대 사대부들 가운데 단연 박학다식하고 다방면의 능력을 갖춘 불기의 인물을 꼽는다면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을 들 것이다. 그는 바로 동파거사 소식이다.
소식은 자가 자첨, 호가 동파거사, 철관도인 이다. 1037년1월8일 (송 인종 경우 3년), 사천 미주 미산에서 소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2년 뒤인 1039년에는 아우 소철이 태어났는데, 이 삼부자는 삼소라 불리며 당송팔대가에 포함된다.
소식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익히며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었다. 1057년(가우2년)소식은 아우 소철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였다. 이 과거에서 소식은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소식은 과거 시험장에서 형상충후지지론이라는 책론을 지었는데, 고관 매요신이 소식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주고관 구양수에게 추천하였다. 구양수 역시 소식의 책론을 높이 평가하여 장원으로 뽑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제자 증공이 쓴 것 같다는 생각에 괜한 시비가 될까 염려하여 2등으로 낮췄다. 그러나 시권을 열어본 결과, 소식의 답안임이 밝혀졌고 장원을 중공이었다고 한다.
구양수의 인정을 받으며 소식의 명성은 수도에 널리 퍼진다. 그러나 소식은 양친의 별세로 임관과 낙향을 반복해야 했다. 소식은 부친 소순의 상을 치른 뒤인 1069년에야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34세의 젊고 혈기왕성한 소식은 아마 자신의 기량과 포부를 펼칠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송의 중앙정계는 곧 거대한 정치적 풍파에 휘말려 들었다. 왕안석이 주도한 정치 개혁, 즉 희녕변법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왕안석은 신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신법을 전면적으로 시행했고, 이러한 개혁조치로 토지 면적이 증가했고,도시 상품경제도 발전했다. 그러나 신법은 너무도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폐단이 속출했고, 곧바로 사마광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의 맹렬한 반대를 불러왔다.결국, 조정은 구법당과 신법당으로 갈라져 당쟁을 벌였다. 소식은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신법당 인사들의 위선을 불신하여 구법당으로서 신법당의 일부 급진적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071년 소식은 신종에게 글을 올려 신법의 폐단을 논했다. 이에 분노한 왕안석과 신법당은 신종 앞에서 소식의 과실을 언급하며 공격했다. 1072년 결국 소식은 신법당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외직을 청하여, 항주통판이 되었다. 항주통판은 한직이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소동파에게 재능을 발전시킬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문학과 서예, 회화에 정진하여 전보다 더욱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황정견 같은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소식은 1074년에서 1079년까지 밀주(산동 제성) 서주 호주의 지주를 밭았다. 목민관으로서 소식은 구폐를 없애고 서정을 일신함으로써 그가 진정한 백성의 벗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앞길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결딴낼 만한 인생 최대의 고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079년 43세의 소식은 호주지주에 부임한 뒤 호주사표를 올린다. 그러나 소식은 이 호주사표가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법당의 어사들은 표에 조롱과 풍자를 은밀하게 숨겨놓아 조정을 우롱하고 함부로 잘난 체하였고 걸핏하면 신법을 비난하였으므로 소식을 처벌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 소식이 지은 시에서 비난의 뜻이 담겼다고 자기들이 생각한 구절을 끄집어내, 소식이 불궤한 마음을 품고 신종의 정책을 조롱하였다고 하였다. 신종은 소식 체포를 명하였고, 소식은 어사대로 끌여와 하옥된다. 이것이 오대시안이다. 이 사건으로 소식은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라른다. 그러나 절처봉생, 태황태후 조씨 등이 소식을 구명하고, 전임 재상 왕안석도 어찌 성군이 다스리는 시대에 재주 있는 선비를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한 덕분에 소식은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다. 목숨을 건진 소식은 황주(지금의 호북성 황강시) 단련부사로 쫓겨났다.
오대시안을 겪고 쫓겨난 소식은 황주에서 실의에 빠졌지만, 특유의 낙천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유배라고는 하나, 정해진 지역만 벗어나지 않으면 활동에는 큰 제약이 없었으므로, 그는 문학과 예술에 더욱 정진하고, 불교와 도교에 마음을 기울여 선문의 인사들과 친교를 맺거나 단약을 제조하여 신선을 꿈꾸기도 하였다. 또 산수를 좋아하여 여러 곳을 유람하였다. 이 시기 황주성 바깥의 적벽산을 유람하며 지은 작품이 유명한 적벽부이다. 그리고 공무 이외의 시간에 성 동쪽에 언덕을 개간하였다. 동파거사라는 별호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식하면 떠오르는 동파육을 만든 것도 이 시절이라 한다. 이 시기 소식은 은일의 삶을 누리는 낙천주의자로서 몇 년간의 유배 생활을 꾸려 나갔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였다. 고태후가 섭정하면서 사마광이 다시 재상으로 기용된다. 신법당은 세력을 잃고 구법당이 집권한다. 소식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 정계의 상황은 소식에게 실망스러웠다. 상술한 것처럼 소식은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왕안석의 정책 가운데 일부는 긍정하는 입장이었지만, 구법당은 신법이라면 모두 폐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소식은 조정에 건의를 올려 구법당이 집정한 뒤 드러난 부패 현상을 지적했다. 이 일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소식은 다시 무고와 비난에 시달린다. 소식은 하릴없이 외직을 청해 중앙 정계를 떠난다.
1089년 소식은 항주지주로 부임한다. 이듬해, 소식은 서호 준설 작업에 착수하여 호수에서 파낸 봉초와 진흙으로 서호의 남북을 연결하는 긴 제방을 쌓았다.
1091년 소식은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치적 견해 차이로 다시 외직으로 나간다. 게다가 소식에게 시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1093년 철종이 친정하여 신법당이 득세하자, 소식은 귀양길에 올랐다. 1094년 먼저 혜주(지금의 광동성 혜양)로 쫓겨난 소식은 1097년에 중국 최남단인 담주(지금의 해남도)로 다시 폄적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송대의 해남도는 변방의 낙후되고 황폐한 섬으로, 해남도 유배는 대단히 무거운 처벌이었다. 문질빈빈의 당당한 사대부로서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었던 그에게 해남도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혹독한 유형지였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낙담했다. 그러나 그는 얼른 자신을 추스르고는 그 특유의 낙천성으로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했다. 그는 학당을 열어 학풍을 일으켜서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지 않았던 해남도에서는 소식 이루로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고 한다.
휘종 즉위 이후, 소식은 염주 서주 영주로 이배되었다. 110년4월, 조정에서 대사령을 반포하자 복권되어 귀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귀한 도중인 1101년 8월24일 상주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65세였다. 이듬해 아들 소과가 소식의 유촉에 따라 부친의 관을 겹성현(지금의 하남성 겹현)으로 운구하여 안장하였다.
소식의 생애는 실의와 불우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임어당이 말한 것처럼 구제 불능의 낙천가, 위대한 인도주의자이자 백성들의 친구였다. 숙명처럼 불행과 실의가 닥쳐왔지만 소식은 어쨌든 쾌활한 천재, 한 가지 면모로 규정할 수 없는 중국의 르네상스인이었다. 그는 산문과 시, 사와 부에서 불후의 작품을 남긴 문학가였다. 서예에서도 북송의 4대 서법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며, 회화에서도 호주화파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 예술가였다. 또 기꺼이 백성의 친구가 되려한 목민관이었고, 불교도이자 도교 수련자이기도 했다. 동파육을 만들 정도로 요리도 잘하고, 술과 차에도 조예가 깊은 미식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위선적인 엄숙주의 따위에는 코웃음을 치며, 부귀 빈천에 상관없이 누구와도 즐겁게 어울리기를 좋아한 자유인이었다. 그에게 삶이란 즐겁고 아름답게 영위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으리라.
중국 미식
반중찬에서 시각 성연까지_중국 회화 속의 음식에 관하여
중국 산책_황산과 안휘고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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