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만주에서 독립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에서는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밀려 소련·연해주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참변을 겪고 난 후 독립군 세력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박대인은 이 시기 1921년 12월 8일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초산군(楚山郡) 교통국장인 최항신(崔恒信)의 지휘를 받아 평북 초산군 서면(西面) 순학동(舜鶴洞) 382번지 이응선(李應先)의 집 외 5개소에서 군자금 84원을 모금하고 1,200원의 출금증서(出金證書)를 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14일 일경의 추격을 받고 집안현(輯安縣) 양목림자(楊木林子)에서 교전 중 동지인 박진일(朴振日), 이창섭(李昌涉)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高麗書林, 1989) 第3卷 516面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956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