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병국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지난 계절에 입었던 셔츠 사이에 넣어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동남아 어느 도시의 쓰레기산 계곡에서 유해처럼 떠오를 거라는 건 생각지 못한다. 아무렇지 않게 쌓이는 물건들 속에서 추억을 톺는 일이 일요일 아침 짜파게티를 끓이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저녁에는 전날 냉동실에 넣어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5분 정도 데운다. 다른 찬을 상 위에 올려놓아 본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수저는 한 벌. 파트타임으로 학원에 출강하던 날엔 옷 한 벌로 일주일을 보낸 적도 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귤을 닮았다 했다. 병원에 가서 점을 뺐고 작은 반창고를 얼굴에 덮었다. 긁지 않으려면 손가락에 골무를 씌우거나 벽을 두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됐다. 의자는 깨끗하고 앉아 생각할 수 있다. 책상 위에는 가방과 책과 프린터와 백여 개의 연필과 메모지, 유리 테이프와 물티슈와 사 년 전 문화재단에서 받은 다이어리와 엽서, 시위에 나가 흔들었던 피켓과 크리넥스 티슈 조각과 이어폰, 샘플 화장품과 올인원 로션이 있고 엊그제 쓰다 만 시가 구겨진 채 놓여 있다. 한때는 책상이 식탁이었던 적도 있지만 고양이와 자리다툼을 한 이후로 밥은 상을 펼쳐 놓고 먹는다.
차돌된장찌개 밀키트를 뜯어
붓고
끓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책임을 지는 건 이후의 일이라지만 지구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찢어진 구멍에
몸을 끼워 넣는다.
마침맞게 어울린다.
---애지 2025년 봄호에서
+ 어느덧 인터넷 세상과 스마트폰 세상을 거쳐 인공지능의 세상이 열렸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자동차와 함께, 우주식민지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곧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성스러움과 돈(자본)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자유와 사랑과 평등에도 돈이 개입하면 그 순수함이 다 초토화된다. 자유도 사고 팔 수 있고, 사랑도 사고 팔 수가 있다. 평등도 사고 팔 수가 있고, 타인의 생명과 장기들마저도 사고 팔 수가 있다. 돈은 전지전능한 신이자 모든 가치의 파괴자이며,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라고 할 수가 있다. 돈으로 해가 뜨고, 돈으로 해가 진다. 돈으로 수많은 별들이 떠오르고, 돈으로 수많은 별들이 흔적조차도 없이 사라진다.
인공지능의 세상은 최첨단 과학의 세상이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차단되고 파괴된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병국 시인의 [일요일]의 주인공은 “구멍 난 양말”같은 존재이며, “가장자리를 따라 찢어진 구멍에/ 몸을 끼워 넣는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별 볼일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별 볼일 없는 존재는 시인이자 학원 강사로서의 최고급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인공지능과 고용없는 성장신화에 일자리를 빼앗긴 일용잡급의 노동자라고 할 수가 있다.
일요일 아침, 그는 구멍 난 양말을 지난 계절에 입었던 셔츠 사이에 넣어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그 옛날에는 구멍 난 양말도 기워 신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분류수거함의 의복들은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서 구호물품이 되거나 싸구려 상품으로 팔려 나갈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도 짜파게티를 끓이고, 저녁에는 전날 냉동실에 넣어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5분 정도 데운다. 다른 반찬은 상 위에 올려놓아 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고, 수저는 한 벌 뿐이고, 파트타임으로 학원에 출강하던 날엔 옷 한 벌로 일주일을 보낸 적도 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귤을 닮았다고 했다”는 것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떴다는 것을 뜻하고, 병원에 가서 점을 뺐고 작은 반창고를 얼굴에 붙였다. 긁지 않으려면 손가락에 골무를 씌우거나 벽을 두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었고, 의자는 깨끗하고 앉아 생각할 수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가방과 책과 프린터와 백여 개의 연필과 메모지, 유리 테이프와 물티슈가 있고, 사 년 전 문화재단에서 받은 다이어리와 엽서, 시위에 나가 흔들었던 피켓과 크리넥스 티슈 조각과 이어폰이 있다. 샘플 화장품과 올인원 로션도 있고, 엊그제 쓰다 만 시가 구겨진 채 놓여 있다. 한때는 책상이 식탁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고양이와 자리다툼을 한 이후로 밥은 상을 펼쳐 놓고 먹는다.
이병국 시인의 [일요일]은 “차돌된장찌개 밀키트를 뜯어/ 붓고/ 끓이”는 일요일이자 별 볼일 없는 일요일이고, 이 자괴감과 자학감으로 “지구에게 미안할 때가” 많은 ‘구멍 난 양말 같은 존재’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구멍 난 양말 같은 존재, 전지전능한 돈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 쓸모없음 때문에 치를 떨고 있는 존재----, 바로 이것이 오늘날 인공지능의 시대에 너무나도 완벽하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우리 최고급의 지식인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인간이 자본의 노예가 되고, 끊임없이 자본을 찬양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 역사의 최후의 종착역이 될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과 인공지능들은 피에 굶주린 사자들과도 같고, 우리 인간들은 이 사자들과 알몸으로 싸워야 하는 노예들과도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부모형제와 처자식과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인공지능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일요일.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일요일. 꿈도 희망도 없는 일요일----. 너무나도 무섭고 너무나도 끔찍한 인공지능의 모습에 오들오들 떨면서 모든 삶의 공격성을 다 잃어버린 우리 젊은 시인들----.
이병국 시인의 [일요일]이 대폭발하고, 우리 젊은 시인들의 꿈과 희망이 다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