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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이삭과 이스마엘
1-21절,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쫓겨남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일과 여종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된 일을 기록한다.
[1-2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眷顧)하셨고[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5년 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살던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2:2-3). 또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는 내년 봄 정한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21; 18:10, 14).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 곧 그를 경외하는 아브라함에게 복된 약속을 주셨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그가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사라는 임신하였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셨고 그 약속의 말씀도 신실하셨다.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인류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약속과 말씀은 신실한 말씀이시다.
[3-5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100세라.
아브라함은 사라가 그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라고 하신 이름이었다(창 17:19). 이삭(이츠카크)은 ‘그가 웃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난 지 8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명하셨었다(창 17:10, 1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이삭이 출생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이었다. 2절은 아브라함을 ‘늙은 아브라함’으로 말하고, 7절은 이삭을 ‘아브라함 노경에’ 얻은 아들로 말한다. 원문은 같다. 100세된 노인이 아들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창세기 17:17은 사라의 나이가 90세라고 말하며 또 창세기 18:11은 사라의 경수(經水)[월경]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능력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었다(창 18:1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6-7절]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사라는 이삭을 출산한 후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웃음은 기쁨과 행복의 웃음이었다. 늙은 자신들을 통해 아들이 출산된 것은 참으로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친지와 이웃도 함께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자가 없었겠으나 그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아들을 낳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8-9절]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아이는 잘 자랐고 젖을 떼는 때가 되었다. 그것은 보통 3살쯤이라고 추측된다.33) 어린아이가 병약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잔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았다. 그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7살쯤이며 조심할 만한 나이이었다. 한 집에 배가 다른 두 형제가 사니 이런 일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고, 하갈이 좀더 생각이 있었다면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엄히 교훈하고 단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 같고, 사라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상하였다.
[10-11절]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그 아들 때문에]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했다. 사라의 감정은 일반 여인들의 감정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요청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 심히 근심했다. 아들까지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근심의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을 첩으로 얻었을 때부터 예상된 문제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부족에서 왔고 한 집에 같이 살면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었다. 사라와 하갈은 서로 헤어지는 것이 지혜로워보였다. 이스마엘도, 하갈도, 사라도 완전한 인격은 못되었다.
[12-13절]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문제로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을 것이지만, 사라에게서 난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기업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삭을 위해, 이삭을 따라 섭리하실 것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또 그를 믿는 자들의 예표이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이다(요 1:12). 또 로마서 8:28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증거하였다.
[14-16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해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냈다(후에 재물을 주었다고 보임, 창 25:5, 6). 그의 가정의 갈등을 해소하는 지혜로운 길은 그들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람의 연약함이 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갈도, 이스마엘도, 사라도 다 부족하였다.
하갈은 아들과 함께 나가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였다. 브엘세바는 유다 땅의 맨 남쪽에 있고 남방(네게브) 지역에 속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하자, 하갈은 그 아들을 한 떨기나무(관목; 줄기와 가지가 분명치 않은 나무) 아래 두고 살 한 바탕쯤 떨어져 아들 이스마엘을 마주 앉아 바라보며 크게 울었다. ‘살 한 바탕’의 거리는 몇 십 미터쯤 될 것이다. 하갈의 눈물은 자신과 아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아들 이스마엘도 울었다.
[17-21절] 하나님이[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께서]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께서]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라는 원어(나아르)는 ‘소년, 청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렀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또 그의 눈을 밝히시므로, 하갈은 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들에게 마시웠다.
이스마엘은 비록 이삭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불안하고 두려운 광야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도 함께하셨다. 이스마엘은 커서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신적으로 선택된 백성이 아닌 자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욘 4:11).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5:45).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고 말했다(행 10:35).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세상 민족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구원 얻을 자들이 많이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다. 1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그는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행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를 믿는 자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게 하셨다. 구주 예수님을 믿은 자는 구원의 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깊은 근심은 자신과 사라의 부족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좀더 참고 기다렸어야 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어보려 했었다. 그 결과 그 가정에는 갈등이 생겼고 그것은 그의 깊은 근심이 되었다. 그 갈등과 근심의 최선의 해결책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부족을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너그러우셨다.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스마엘을 통해 한 큰 민족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너그러우시다. 그는 만세 전에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영혼들을 택하셨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했다. 시편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이사야 45:22,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뜻을 감사해야 한다.
22-34절,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
본문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서로 언약을 맺은 이야기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건처럼 보인다. 이 평범하게 보이는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살펴보자.
[22-24절]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때 즈음에,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하였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경건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방인의 놀라운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랄 왕인 이방인 아비멜렉까지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심이 이방인들에게도 증거된 것이다!
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서로 해치지 않기를 맹세하는 언약을 맺자고 제안한 것이다. 환경적으로 불안하였을 아브라함에게 이런 언약은 안정에 도움이 되는 기회라고 보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아비멜렉의 요청에 응하였다.
역사상 신앙의 열조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였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이 그러하였다. 그의 아들 이삭도 그러했다. 창세기 26:28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에게 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고 말했다. 요셉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39:3에 보면, 그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생활하고 있었을 때, 그 주인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다니엘도 그러했다. 다니엘 4:8에 보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안에 거룩한 신의 영이 있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셨다.
[25-31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빼앗은]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아브라함은 그때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말하며 그를 책망하였고 아비멜렉은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고 해명했다. 아브라함은 양들과 소들을 취하여 그에게 주었고 서로 언약을 맺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양들과 소들을 준 것은 자기가 판 우물을 돌려줄 그의 호의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보인다. 또 아브라함은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구별하여 그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자신이 그 우물을 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라고 그에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 곳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 두 사람이 거기서 맹세하며 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정당하고 너그럽게 처신하려고 애썼다. 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상대에게 지적하고 책망하기도 하였으나 양들과 소들, 그리고 일곱 암양 새끼들을 선물로 줌으로써 상대방이 베풀 호의와 우정에 대해 미리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의와 선과 진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수적 덕목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다(엡 5:8-9).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려 해서는 안 된다. 잠언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잠 16:8). 또 집사의 자격에는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딤전 3:8).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훈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하셨다(마 5:44-45).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했다(롬 12:17, 20- 21). 그러나 이런 말씀은 개인적으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보이는 것이고 국가 간의 정당방위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2-34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고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 ‘에셀나무’라는 원어는 ‘타마리스크 나무’(또는 위성류)라고 하는데, 사막 지대에서 자라는, 분홍색 꽃이 피는 작은 나무라고 한다.
또 아브라함이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천지만물은 그가 창조하신 것이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셨다(창 1:1). 그러므로 모세는 시편 90:1-2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경건이며, 그 하나님 안에 영생의 길이 있다.
천지만물은 인류 역사 6,000년을 지나면서 낡고 쇠하여지고 있다. 시편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언제나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전도서 1:2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고, 베드로전서 1:24-25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낡아지고 쇠해지고 썩지만, 오직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그의 말씀도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사 40:8; 벧전 1:25).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33절).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자이시다. 그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 천지 창조 이전은 영원 세계이다.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계시록 22:12,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나님께서는 홀로 세상의 처음과 끝을 아시는 자이시다. 모든 피조물들은 시작이 있지만, 그는 시작이 없으시다. 그는 영원하시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를 아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다(요 17:3).
둘째로,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증거하였다. 후에 요셉도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러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며 살 뿐 아니라, 우리의 주위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느끼며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주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았으나 그들과 다투지 않았다. 그는 양들과 소들과 일곱 암양 새끼를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하는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선한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한 후 악한 자가 되었다.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깨끗하게 하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천국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는 세상에서도 선한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선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