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8]영화 세 편의 힘
어제밤 용산 CGV에서 <길위에 김대중> 시사회를 보았다. 영화는 ‘정치인 김대중’의 역정을 담은 대규모 실록다큐멘터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땠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변할까? 답변이 궁할 것같다. 그냥 재밌었다고 해야 할까? 감회가 깊다, 2023년 우리나라의 정치판국을 보면 시사示唆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고 말해야겠다. 이 타이밍에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빅이벤트일 터. 마침 내년이 김대중 전대통령 탄생 100주년이어서 만든 특집영화. 영화상영일은 내년 1월 10일. 제작 감독 등 4명이 상영 직전과 직후 무대에 나와 사람들이 많이 보아야 하는 영화, 널리널리 홍보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일러 무삼하리오. 국민의 일원으로서(혹 반대파일지라도,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카톡글을 얼마 전에도 보았다) 반드시, 꼬옥 봐야 한다고, 지금 상영중인 관객 1천만명 직전인 <서울의 봄>을 봐야 하듯이, '국민영화'로 기록되고 오래 기억될 것이 틀림없는 영화.
어찌 이를 감명깊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교훈이 있다. 이 땅에 ‘큰 정치인’ 김대중은 왔다갔지만, 우리가 이룩해야 할 민주주의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그 길을 위해 너나나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교훈이 아니면 무엇이 교훈일까. 그렇다. 이승만 자유당독재도,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에서도 그(김대중)는 ‘의회주의자’였다. 영화 속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 지금 유튜브에서 떠돌고 있다(1981년 1월 17-18일 사형수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수사관 최모씨와 4분25분동안 대화한 내용). 왜 이 자료를 영화 속에 넣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이 장면만 들어갔어도 긴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을만큼 중요한 기록인데 말이다. 그는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은 희망의 정치인이었다. 욕 얻어먹을 것을 감수하고 일신상의 편리를 위해 살지 않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지금도 그를 ‘행동하는 욕심’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터.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밤새 진행된 군사쿠데타를 다룬 본격영화 <서울의 봄>. ‘전두광’이라는 정치군인(황정민역)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계엄사령관도, 대통령도, 국방부장관도 거칠것없이 몰아붙인 절체절명의 순간들. 역사는 왜 이렇게 실패의 연속일까.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이 대체 이 무슨 섭리일까? 국방장관(노재현)의 비겁한 행보를 보라. 5.16쿠데타 때에도 총리(장면)가 성당에 숨었다. 마땅히 죽었어야 한다고 말을 쉽게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은 아닐 터이지만, 그래도 죽을 때에는 죽어야 하는 게 사람이다. 빤쓰만 입고 저만 살겠다고, 학생승객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저만 빠져나온 세월호 선장이 사람인가. 서울은 그만두고 대전에서도 서울을 잘 지키고 있다고 방송한 후 저만 부산으로 내빼려한 사람이 무슨 대통령인가.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도주하려는 사람이 임금인가. 정말 다들 왜 이러는가? 한숨 쉬는 관객들, 분통이 터져 옆사람 생각도 안하고 마구 욕을 하는 아줌마, 영화는 끝까지 보기에 너무 힘들었다. 전두광은 그런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친손자가 광주에 가서 방명록에 할아버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살인마라고 썼을까. 그런 별라별정권도 겪었지만, 드디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생각했는데, 21세기 이 백주대낮에 역사를 마구잡이로 퇴행시키는 이 정권은 또 무슨 개수작, 개나발이란 말인가. 아지 모게라.
전주의 어느 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어른 김장하> 영화를 보았다. MBC에서 지난 설특집으로 방영된 다큐는 보았지만, 영화는 조금 다른 부분이 나온다기에 무리를 해 심야에 본 것이다. 다음날 어른 김장하를 15여년 동안 은밀히 취재에 세상에 알린 김주완 기자를 경남 진주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관객 고작 6명.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젊은 남녀에게 내일 김기자를 만났다고 하니까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김장하 어르신은 '현존하는 성인聖人'이라고 생각한다. SAINT이다. 먼 발치에서나마 뵈었으면 좋겠지만, 언감생심, 나같이 때 묻고 별 볼 일없는 사람이 어찌 뵐 수가 있을까. 다만 그분이 잘 다닌다는 중국집에서 김기자와 수인사를 나눈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한 달새 영화 세 편을 보면서 <영화의 힘>이 갈수록 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른 김장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진짜로 사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진정한 선행과 미담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서울의 봄>은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던 독재와 쿠데타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길위에 김대중>은 진정한 의회주의자였던 정치인의 역정을 되새겨보며, 우리의 갈 길이 아직도 멀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 세 영화는 우리에게 '(선한 사람 되는) 자극의 힘'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의 힘' '진보가 승리해야 하는 투쟁의 힘'을 선사하는 게 아닐까. 이제껏 좋은 책 강추를 하곤 했지만, 이 영화들을 우리는 ‘깨시민’이므로 꼭 보아야 한다.
후기1 : 어제 영화시사회에서 최근 디올백사건을 터트린 최재영 목사와 촛불시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민웅 목사 그리고 한겨레만평으로 유명한 박재동 화백, 세 분과 수인사와 몇 마디 애기를 나누는 행운이 있었다. 먼 발치에서 최근 야당을 두 쪽 내겠다는 정치인을 봤지만, 가까이에서 봤다해도 아는 척도 하지 않으려한 결심을 그가 알기나 할까.
후기2: 어느 시절, 어제 영화의 주인공을 네 번이나 악수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그 분을 목메이게 그립게 만드는 ‘오늘의 한국정치’가 미워도 너무 미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