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8
7월11일[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1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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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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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uOMNra30iE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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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서로서로 잘 좀 봐줍시다!>
나이가 들어가면 주로 안 좋은 것들만 많아지는 것 같지만, 나이듦의 은총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혈기왕성할 때의 날카로웠던 비판적 시각이 한풀 꺾입니다. 젊은 시절, 선배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저렇게 사시나?’ 했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제가 바로 똑같은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선배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했었는데, 이제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늘 아래 별일들이 다 생기지.”하며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봅니다.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이웃들의 심각한 허물 앞에서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며 여유를 지닙니다.
그렇게까지 팍팍하게 살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 일이 아니었는데, 그렇게까지 까칠하게 대할 필요가 없었는데,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후회가 앞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녕 중요한 일은 이웃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다들 힘겹게 인생길 걸어가느라고 죽을 고생들인데, 잘 좀 봐주는 일입니다.
결국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이웃들을 향한 배려, 이웃들을 향한 동정심, 결국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지니는 일이 이웃을 살릴 뿐 아니라 나 자신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목자 없이 살아온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 곧 측은지심을 지니십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심각한 병고나 상처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분의 측은지심을 불러오며, 더 나아가서 그분의 자비와 구원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심, 절절한 측은지심으로 인한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작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음에 감사하고, 가치를 부여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처벌하신다면 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있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르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과 실수, 방황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넉넉한 웃음으로, 안쓰러운 시선으로, 크나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치유되었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치유되었음을. 우리가 절망스러운 상황을 딛고 일어섰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일어선 것임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하느님의 측은지심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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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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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꾼은 ‘기(氣)’를 살려주는 이들>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가 인터넷 안경 사업 공룡이 되어버린 ‘와비파커’ 설립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던 이들이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취직할 곳들을 이미 마련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오프라 윈프리까지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일에 뛰어든 것에 비해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와비파커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닐은 애덤 그랜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안을 마련해놓았어요.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서 졸업 후에 일할 직장을 구해놓았어요. 제프도요. 데이브도 대안으로 여름 동안 인턴십 두 개를 확보해놓았고,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는 얘기도 진행되고 있어요.”
실패할 것을 예상해서 뒷일까지도 다 준비해 놓은 이들에게 누구도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덤 그랜트도 열정이 없는 이들에게 투자하지 않았고, 이것이 평생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그랜트는 이때 깡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덤비는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氣)’입니다. “창업할 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만두는 게 나을까?” 경영 연구자 조지프 라피와 지에 펭은 5,000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던 위험 회피적 사람들,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직장을 바로 그만두고 창업한 이들보다 실패할 확률이 33%나 낮게 나왔습니다.
와비파커 창립자들과 더불어 ‘패스트컴퍼니’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목록에 오른 기업들을 운영하는 창업자들은 창업을 한 뒤에도 어느 정도는 계속 직장을 다녔다고 합니다.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는 신발을 팔기 시작한 이후에도 5년 동안 회계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첫 번째 애플 컴퓨터를 발명한 스티브 위즈니악은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창업한 이후에도 본래 다니던 휴렛팩커드에서 일하며 1년간 겹벌이(투잡)를 하였습니다.
구글 창업자들은 사업이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봐 헐값에 구글을 팔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빌 게이츠도 하버드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자신의 프로그램을 팔았고 그 사업으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을 때 휴학을 한 것이었습니다.
“기가 살았네!”라고 말할 때, 이 ‘기’는 열정을 내가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이 기가 살아있어야 무엇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워런 버핏은 항상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고 10년 이상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에 투자합니다. 그래야 기가 살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는 우리나라 소규모 식당을 창업하는 사람이 인구에 비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상태로 창업하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창업하는 대다수 사람은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잃거나 직장이 없어서 생계수단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만 하니 사람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당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태로 장사를 하니 사람들은 좋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 가게에 가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가 없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야 기가 삽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이미 빠져나갈 굴을 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감옥 생활이 감옥 생활이 아니고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탈출하지 못하게 잡을 정도로 그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빠져나갈 구멍’이 ‘기(氣)’인 것입니다.
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거나 실패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아처럼 이 일이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라고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기가 꺾이면 불안해지고 그러면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작은 방에 아기를 혼자 놓아두면 아무리 장난감이 많아도 아기는 엄마를 찾으며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들어가면 아기는 엄마는 본척만척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바쁩니다. 엄마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기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는 ‘수확할 밭의 일꾼들’은 바로 이 기를 살려주는 이들입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하느님께서 우리 등 뒤에서 지켜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태오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분(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일꾼들은 바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해줄 수 있는 목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해지면 안 되고, 자녀가 실패하면 안 되고, 가족이 병에 걸리면 안 되니 기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목자는 좋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면 기가 꺾입니다.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참 추수꾼은 이 세상에서 다 잃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신자들에게 기를 북돋아 줍니다. 기가 꺾인 신자들이 없도록 기를 살려주는 목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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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가 맞는 말 같은데 우리라는 말을 자주하니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우리는 고려, 조선으로 왕조는 바뀌었지만 거의 1,500년가량 한 국가의 통치 체제에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입은 1,000번 이상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외세의 침입에는 똘똘 뭉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에는 친밀함이 있고, 동질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사말에는 ‘밥은 먹었는지요?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는 인사말입니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주변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나의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면 일본 사람은 아이 엄마를 째려보고 아이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음 역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울면 사람들이 가서 아이를 달래 주려고 하고, 아이 엄마가 다음 역에서 내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있어서입니다. 식당에서도 일하는 분을 ‘이모’라고 부르고, 친구의 엄마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가족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곱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당대의 많은 나라는 ‘여러 신’을 섬겼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섬겼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약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과 함께 성경은 21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한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읽고, 삶의 이정표로 삼는 경우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리고 딸을 고쳐 달라는 이방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자 이방인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먹습니다.” 이스라엘은 서양문화의 원류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신약의 뿌리였으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교회는 100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버렸고, 벼슬을 포기했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용감하게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7000킬로를 걸었습니다.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복녀 강완숙 골롬바는 목숨을 걸고 사제를 보호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박해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이 정말 작은 이유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같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쉽지만 의미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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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원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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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놀라기만 하고 믿지 않는>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마태 9,32-34)
이 이야기와 많이 비슷한 이야기가 뒤의 12장에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2,22-24)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말은, 실제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놀라서 한 말입니다. 그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12장에 “너희의 제자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2,27) 당시에 ‘구마자’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도 실제로 마귀들을 쫓아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만이 마귀를 쫓아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고, 유대교 구마자들은 하느님께 청해서 쫓아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라는 말도, 그냥 놀라서 한 말이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두 이야기에 모두 나오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저것은 속임수다.”라는 뜻입니다. <“마귀들이 예수와 한편이 되어서 쫓겨나는 척 했을 뿐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다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인정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27장에 바리사이들과 사제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마태 27,63) 바리사이들과 사제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사기꾼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긴 했어도 마귀를 쫓아낸 일 자체는 인정했다고 해석한 이가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7-38)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일을 부정하면서 속임수라고 말한 것은, 또는 “예수는 마귀들과 한편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들이 바라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 자신들이 마귀들 편에 선 것이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믿는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는 이유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짓눌려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억압과 착취가 없을까?>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해서,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성직자들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다.”로 해석됩니다. <당신을 도와줄 협력자가 적다고 한탄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으로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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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구마나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경우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의미를 전달합니다. 오늘 복음도 그 대표적 예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주인공은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입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놀라워합니다. 마귀를 쫓아낸 데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을 다시 말하게 하신 데 대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와 반대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서 마귀를 쫓아낸 것에 더 집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말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귀가 들린 것과 그 때문에 말을 못 하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군중은 말을 못 하던 이가 말을 하게 된 사실에 더 놀라고,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것을 확인하여 줍니다. 아마도 복음은 군중의 반응과 함께 바리사이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한편으로 말을 하게 만드신 예수님의 업적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마귀를 쫓아내신 능력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업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든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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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구노 구노 신부님]
<우리가 그분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농부가 한 해 동안 고생해서 농사를 짓고 나면 한 해의 결실을 보는 추수 때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만약 추수 때가 되었는데도 일손이 없다면 농부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애가 탈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는 추수 때가 되면 서로서로 도와서 한꺼번에 추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 품앗이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품앗이조차 할 일꾼들이 없어, 한 해 동안 잘 지은 농사를 추수하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농작물들이 말라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농작물이 말라죽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추수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하늘나라에 살게 될 새 백성들입니다. 지쳐하고 힘들어하며, 당신만을 기다려왔던, 당신을 믿고 따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애타는 농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결정적으로 당신을 도울 일꾼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도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만 예수님을 도울 일꾼이 필요할까요? 예수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 경제, 교육, 여러 가지 것들로 힘들어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기적, 그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금방 깨닫습니다. 한쪽에선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인데 한쪽에선 배가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서로가 피흘리며 살아가는데 한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냐며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해도 예수님의 마음은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은 적습니다. 일꾼은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추수할 일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추수할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나 자신도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그 요청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꾼이 없으니 너희가 일꾼이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어주겠니” 많이도 말고 매년 딱 한 사람씩만 주님께로 이끌고 주님을 맛 들이게 한다면 더 이상 추수할 일꾼이 없어 죽어가는 영혼들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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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국 요한 신부님]
나는 어떤 일꾼일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꾼이 모자라다니요.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온통 빨간 십자가 불빛이고 사방에 널린 것이 그리스도인들인데요. 성체 앞에 앉아 주님께 슬쩍 물어봅니다.
주님, 요즘은 일꾼이 너무 많아서 탈이랍니다. 이제 그만 청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더 열심히, 간절히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자꾸 떠오릅니다. 제대로 된 일꾼이 없다고.
하긴 모든 것 다 봉헌하고 따르겠다고 당신 앞에 서약한 저부터가 요 모양 요 꼴이니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복음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처럼 애정을 지니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일꾼들이 필요하신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에 일꾼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면 자기 딴에는 일한다고 얼쩡거리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밥만 축내는 놈팡이처럼 보이겠지요.
나는 어떤 일꾼일까 생각해 봅니다. 밥 벌어 먹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는 일꾼은 아닌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기보다는 수없이 널려 있는 놈팡이 같은 거짓 일꾼들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심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주님, 제대로 일하는 일꾼이 되도록 저에게도 당신의 그 촉촉한 마음을 나누어주십시오. 저 자신이 아니라 당신 사랑으로 일하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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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저는 평소에 꽤 열려 있는 시각과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한 선입관을 버리고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잘 바라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트로트 생활 성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나는 리듬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박자도 어색하고, 그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머리로는 ‘트로트도 성가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거부하고 있었나 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을 차별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행동, 말씀과 시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군중은 언제나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였고,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면서도 낯설어합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 낯섦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과 더해져 결국 그 낯설고 다른 것을 거부하고 오해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시선과 마음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고 스스로 고통과 아픔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희생과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온 마음으로 가난하고 길 잃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죽음 앞에 당당해야 하고 두렵지 않은 척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낯선 일을 나의 일로, 나의 일상으로 만들어 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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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베네딕도 대축일>
오늘은 사부 베네딕도의 대축일입니다. ‘베네딕도’(Benedictus)라는 이름의 말뜻은 “좋게 말한다.”, “복 받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편>에서 말합니다. “베네딕도는 은총과 이름으로 복 받은 분이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시 12,2)
이는 단지 복을 주리라는 것을 넘어서, “너 자신이 복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부 성 베네딕도께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의 후손인 우리도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은총으로도 복이 되고, 이름으로도 복 받은” 삶은 어떤 삶,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우선 형제들에게 좋게 말하는 것, 형제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입에 항상 찬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시편 33,1)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처럼,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고, 형제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베네딕도께서는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라.”(머리말 30)고 하시고, 72장에서는 형제들 간에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72,4)고 하십니다. 곧 ‘복받은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베규 31,19)이라 명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 이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베네딕도께서는 그냥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을 위한 집’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림”(Economia)라는 말은 아주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집’을 뜻하는 말(oikos)와 '규율'을 뜻하는 말(nomos)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살림살이”, 혹은 줄여서 “살림”이라 표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는 서로를 살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서로를 살리며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살림”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에서 함께 공동으로 드리는 성무일도기도를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저 ‘기도’라 하지 않으시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분과 함께, ‘섬기면서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관심이나 계획, 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거든, 눈을 돌려 바로 그것을 비추고 있는 빛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이 비추인 곳의 어둠을 보기보다 그 어둠을 비추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빛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머리말 30)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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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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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꾼다운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 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성령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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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에 읽었던 ‘수도자처럼 생각하기’(제이 셰티)에서 읽었던 문장을 소개합니다. “건강한 습관은 처음엔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진다. 건강하지 않은 습관은 처음엔 하고 싶지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저를 ‘새벽형 인간’으로 부릅니다. 워낙 새벽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신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누구보다 늦게 일어났었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저에 대해 사람들에게 ‘올빼미형 인간’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항상 늦게 일어나는 저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저의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즉, 새벽에 일어나기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어떠했을까요? 하루 종일 피곤해서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결국 기분 나빠지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운동 안 하기, 기도 안 하기, 책 안 읽기, 텔레비전 보기, 인스턴트 음식 먹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보기…. 이렇게 하길 바라고 또 쉽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점점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하기 싫은 것도 있습니다. 운동하기, 기도하기, 봉사나 희생 실천하기, 독서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하기 싫은 것이기에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집니다.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진정한 행복을 위해 처음에는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지는 건강한 습관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귀를 쫓아내자,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모함합니다. 이 모함은 계속되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모함을 멈추기 위해 그들에게 강력한 벌을 내려 어리석음을 꾸짖으면 안 되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사랑만을 전해주십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의 길로 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꾼이 필요하다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일꾼들이 가득해야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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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마태오 9,32-38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살림>
당신과 나 우리는
할 수 있으니
그리 해요
말하지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할 수 있으니
말하게 해요
듣지 못하는 이를
듣게 할 수 있으니
듣게 해요
보지 못하는 이를
보게 할 수 있으니
보게 해요
느끼지 못하는 이를
느끼게 할 수 있으니
느끼게 해요
함께하지 못하는 이를
함께하게 할 수 있으니
함께하게 해요
일어나지 못하는 이를
일어나게 할 수 있으니
일어나게 해요
나아가지 못하는 이를
나아가게 할 수 있으니
나아가게 해요
살아가지 못하는 이를
살아가게 할 수 있으니
살아가게 해요
당신과 나 우리는
할 수 있으니
그리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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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일꾼이 적다.>
늘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주님과 바리사이를 비교하면 다른 관점에서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관점인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할 일이 많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어제도 한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큰 병원의 내과 과장이시고 그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을 모아 봉사회를 꾸려가시는 분인데 우리 협동조합 산하에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하려고 몇 번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나 코로나와 다른 이유로 인해 추진을 중단했는데 코로나 상황이 나아졌으니 이제 시작함이 좋지 않겠냐고 먼저 제의해오신 겁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너무 감탄스러운 것은 어찌 그리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으시고, 코로나 시국을 지내며 당신 본업만도 너무 많아 다른 것은 생각조차 어려울 텐데 이것저것 봉사할 궁리를 그렇게 하시는지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이분처럼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성향 차이가 아니라 사랑 차이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할 일이 늘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잘못된 말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가만 보고 자기 밖의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만 빠져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보다 그의 죄와 잘못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만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늘 죄와 잘못을 지적당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기보다는 죄인으로 기가 꺾여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교만한 바리사이들 밑에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을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여운 군중 그러니까 가여운 많은 사람을 보시고, 그들을 위한 일 또한 많음을 보시며 이렇게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주님의 이러한 토로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아니, 지금 더 많이 토로하십니다.
지금 많은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자의 부족을 토로하고,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주민들을 위한 주말 의료 봉사를 위한 일꾼, 영어교실을 위한 영어 선생님(회화가 가능한), 심리 상담 봉사자, 요리 봉사자, 단순 봉사자 등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사랑은 사랑을 실천할 때 성장하는 것이니 용기 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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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부 성 베네딕도 예찬>
- 유럽의 수호자,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 34,8-9)
어제부터의 분위기는 왠지 모를 잔칫날 분위기처럼 참 흥겹게 느껴졌습니다. 저녁 식탁도 꽉 찼습니다. 무려 머무는 손님이 6명, 전체의 1/3이니 정주수도원의 환대 영성이 빛납니다. 바로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이자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이 흥겨운 잔치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중세 초기 암흑시대에 성 베네딕도가 없었다면 유럽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세 야만의 유럽을 문명화한 성 베네딕도는 유럽을 구원한 은인이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64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이어 1980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도를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와 더불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습니다.
2008년 교황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베네딕도 성인은 자신의 삶과 업적을 통해 유럽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이 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이어진 역사의 어두운 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감격에 벅차 고백했습니다. 한 성인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한지요!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가 성인의 위대함을 웅변합니다. 저녁기도 성경 소구가 성인의 모습을, 계응송이 베네딕도 규칙의 위대함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 50,5-7)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성 베네딕도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 자랑은 결국 하느님 자랑이라 기분이 참 유쾌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영성은 저는 산과 강의 영성이라 정의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의 영성이라 정의하고 이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프란치스코 수도명을 지닌 저는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산,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강”이라 자칭 일컫기도 합니다. 저는 외로움을, 스승의 부재를 전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 인도하는 위대한 멘토이자 스승을 세 분이나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 요셉,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코 이 세 성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저와 영원히 함께 하는 수호성인들입니다. 전임 고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시공을 초월한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자 멘토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라 고백했습니다. 산과 강으로 요약되는 성 베네딕도의 삶은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가 아름답고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제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성 베네딕도를 닮아 죽는 그 날까지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그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추종입니다. 바로 복음이 답을 줍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수호성인들의 인도에 따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이 우리에겐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베드로의 생각이 참 짧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일편단심, 오매불망 사모하는 주님을 따르는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행복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지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상한 예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귀향의 여정,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 초지일관 한결같이, 끊임없이 겸손히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도 주님 따르는 기쁨을 한껏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 따르는 이들, 아버지요 스승인 성 베네딕도 찬란하게 빛나는 이날 기리며, 노래 불러라. 스쳐 가는 세속의 행락 등지고, 주님 찾는 보람을 한껏 누리며 천사들과 한 노래 부르는 영복, 끝이 없어라.”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으로 따를 때 사랑의 은총 선물입니다. 사랑의 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이 있어 지칠 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들은 바로 사랑의 기적들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니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온통 사랑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6.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7.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지는 끈입니다.
8.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9.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두가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엔 역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입니다. 그러니 평생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이 되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지혜는 감추어진 보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깊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사랑과 지혜가 결정체를 이룬 성 베네딕도입니다. 분별력의 지혜, 중용의 지혜는 바로 모두를 살리는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제1독서 잠언 말씀이 감로수같습니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한다면,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을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의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람이 되어 가면서 주님을 닮아갈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을, 성 베네딕도를 닮고 싶습니까?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 사랑의 삶, 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추종과 사랑과 지혜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 34,10-11).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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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마태9,33)
<두 개의 영!>
오늘 복음(마태9,32-38)은 '예수님께서 말못하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 개의 영'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하나는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이고, 또 하나는 마귀인 '악령'입니다.
내 마음의 창고 앞에 어느 영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매순간 생명과 죽음을 넘나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고 부활하게 하지만, 악령은 우리를 죽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죽입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오늘 독서(창세32,23-33)는 '야곱이 야뽁 건널목에서 하느님과 씨름하는 모습'입니다.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야곱은 앙심을 품고 자기를 죽여버리겠다는 형 에사우의 말을 듣고, 하란으로 길을 떠납니다. 복수의 앙심을 품고 죽여버리겠다는 형 에사우의 말을 듣고, 야곱이 두려워 도망가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야곱, 형 에사우를 만날 준비를 다 해 놓고서도, 형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야뽁 건널목에서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32,27) 야곱이 이깁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그래서 이름도 야곱에서 '하느님과 씨름한 자'라는 뜻을 지닌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하지만 악령은 우리를 구속시킵니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두려움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아 버립니다.
마귀의 장난에 농락당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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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2nHDBb0x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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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 37)
거주불명의
사람들이 아닌
수확할 밭에
수확을 위해
머무르는
머무름의
사람들입니다.
머무름의 여정이
수도생활의
역사입니다.
기도의 힘은
곧 머무름의
힘입니다.
수 없이 많은
각오와 결심으로
머무름은
가장 좋은
은총이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수확의 밭에서
간절한 사랑을
배웁니다.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는
제자신을 반성합니다.
하느님께 머무르는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믿습니다.
머무름이
가장 좋은 선택
가장 좋은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머무름의
하느님이십니다.
머무름으로
수확할 노동으로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머무름이
모여 사는 집이
바로 수도회이며
수도생활입니다.
머무름의
무늬가
만들어내는
머무름의
열매입니다.
머무름이
생활로
돌아갑니다.
건강한
기도와 노동을
일깨워주신
수도생활의
모범이신
베네딕토
성인입니다.
정주(定住)생활이
곧 머무름의
생활입니다.
머무름이
수확이며
머무름이
일꾼의
가장 겸손한
삶입니다.
머무름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을 믿습니다.
가장 좋은
오늘에
머무르는
수확의 기쁨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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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 36)
사람을 위한
가엾은
마음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가엾은
마음입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이해가 되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연민의 걸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연민은 어리석은
우리들 삶을
비추어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의 핵심은
연민입니다.
사람의 깊이는
연민의 깊이입니다.
하나로
모이게 하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서로를 측은하게
바로보는 연민이
있기에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의 존재를
다시 묻는
시간 되십시오.
연민의 마음에서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갈 길을
찾습니다.
막힌 길을
열게하는
연민(憐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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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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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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