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미국 보스턴 연방준비은행이 개최한 연례 콘퍼런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의 변화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이견을 잘 보여주는 자리였다. ‘포착하기 어려운 대회복(The Elusive Great Recovery)’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콘퍼런스의 백미는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기조연설이었다. 이날 옐런 의장은 ‘위기 이후 거시경제 연구’라는 제목으로 30분간 발언했는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의 과제와 새로운 설명 방식에 대해서 언급했다.
먼저 옐런 의장은 총공급과 총수요의 분리가 무의미해졌다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이전 거시경제학계에서 가계·기업의 재화·화폐에 대한 수요와 이들의 생산 활동 및 노동 참가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됐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총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생산성·자본축적·기술혁신·노동력 증가 등 총공급 요인은 경제 구조 개혁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옐런 의장은 “불황이 오래될 경우 총공급에 영향을 미치는 이력효과(hysteresis effect)가 커지게 된다”며 “총수요뿐 아니라 총공급도 정부와 중앙은행의 고려 대상이 됐다”고 선언했다. 한발 더 나아가 거꾸로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해 역의 이력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경제 주체의 이질성을 고려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제학 모델은 한 가계나 기업이 각각 효용이나 이익을 극대화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먼저 분석한 뒤, 이를 결합해 전체 경제모델을 구성한다. 금융위기 이후 자금 사정이 빡빡한 기업이나 부채가 많은 가계 등 이질적인 행위 주체(agent)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옐런 의장은 “불황의 심각성과 느린 회복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가계나 기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실물경제와 금융 부문과의 상호작용이다. 마지막으로 옐런 의장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관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통화정책에 반영해야 할지 각국 중앙은행이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옐런 의장의 기조연설은 금융위기 이전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통적인 거시경제학과 다른 의견을 담고 있었다. 그만큼 경제학 이론의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셈이다. 아울러 정부와 중앙은행 경제정책이 금융위기 이전의 전통적인 접근과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콘퍼런스를 주관한 에릭 로젠그렌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금이 이전과 실제로 다른지,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뉴 노멀’로 볼 수 있을 것인지를 따져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위기 이후 거시경제학의 3대 고민
현재 경제학, 특히 거시경제학과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지금의 느린 회복 과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은 ‘구조적 장기침체론(secular stag-nation)’을 제기한다. 생산성이 하락하고 인구 고령화·소득 불평등 확대로 소비 여력이 준 상황에서 신용 대출로 유지되던 경제가 무너진 것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게 서머스류 분석의 개요다. 이 논리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 없이는 회복 과정이 무척이나 더딜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 전체의 생산성 하락과 관련된 논쟁이 있다. 로버트 고든 미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미국의 경제 성장 기여 요인을 분석한 결과, 노동·자본 투입을 제외한 다른 요인들의 기여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기술·제도 등의 발전을 의미하는 총요소생산성(TFP)이 하락했다는 얘기다. 금융위기 이전의 고성장을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구조적 경기침체론은 벤 버냉키 전 FRB 의장,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 등의 비판을 받는다.
두 번째 고민은 경제정책의 유효성을 놓고 벌어지는 고민이다. 특히 선진국에서 GDP(국내총생산) 대비 정부 부채가 100% 전후까지 늘어난 상황에서 추가적인 재정 지출 여력은 있는지, 그리고 재정 지출이 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두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서머스 전 장관을 비롯한 장기침체론에 가까운 경제학자들은 적극적 재정정책을 주문하고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만성화된 재정적자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마이너스 금리, 양적 완화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대한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올리비에 블랑샤 전 IMF(국제통화기금) 수석이코노미스트는 “2015년을 기점으로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펼쳐졌던 비전통적 통화정책들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경제정책 집행 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측면도 강하다. 먼저 인구 구조와 불평등이 경제 이론을 바꿔야 할 정도로 큰 구조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학자들의 논쟁에서 선진국에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노동 공급과 소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논란은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지난 2~3년간 미국 경제학계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는 점차 낮아지는 경제활동참가율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인구가 줄면서 경제 기초 체력을 끌어내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불평등도 단순히 사회 정의나 정치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IMF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등은 “소득 상위 20%의 점유율이 높아지면 GDP 성장률이 오히려 내려가는 현상이 관찰된다”며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특히 IMF는 “재분배정책이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분석까지 내놨다.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미국의 경제활동참가율 저하는 불평등과 비싼 의료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근로자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매뉴얼 사에즈 UC버클리대 교수 등 소득 불평등 문제에 천착하는 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국제 교역이 감소하면서 세계화와 경제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도 흔들리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글로벌 교역량 증가율은 전 세계 GDP 성장률을 앞섰다. 중국 등 신흥국들은 이를 기회 삼아 수출지향형 산업화에 나섰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교역량이 감소세인데, 특히 신흥국의 수출입량이 더 큰 폭으로 줄었다. 신흥국의 선진국에 대한 ‘추격’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공황·오일쇼크 이은 세번째 변곡점
세 번째 고민은 현재 경제학 이론이 경제현상을 진단·분석하고 정책 처방을 내놓는 데 적합하느냐는 것이다. 경제학의 도구적 효용성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9월 폴 로머 세계은행(WB) 수석이코노미스트가 현재 거시경제 분석 및 경기 예측에 가장 널리 쓰이는 동적확률 일반균형(DSGE) 모형에 대해 ‘탈(脫)현실 경제학’이라며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DSGE는 현재 전 세계 중앙은행과 국제기구가 경제 분석의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론적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드워드 프레스콧, 핀키들랜드 등이 개발한 실물경기변동이론(Real Business Cycle·RBC)이 있는데, RBC는 로버트 루카스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가 당시 케인스 경제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개별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 기대와 그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강조한다. 새 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공격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거시경제학은 대공황 이후 케인스 경제학을 미국 경제학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립됐다. 존 힉스와 앨빈 한센이 재정·통화정책의 효과를 설명한 ‘IS-LM 모형’을 만들고 폴 새뮤얼슨이 기존 경제학과 이를 결합시켜 ‘신고전파종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오르고 정부 재정정책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 벌어지면서 합리성을 강조하는 일군의 경제학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밀턴 프리드먼, 로버트 루카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이론적 공세에 재정정책의 부작용은 강조됐고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정책은 장려됐다. 새 고전파 경제학의 비판을 수용해 만들어진 것이 ‘새 케인스학파(New Keynsian)’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제학계 일각에서는 현재 벌어지는 경제학 논쟁을 케인지언들의 반격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최근 ‘수퍼스타’로 떠오른 경제학자들이 대개 새 케인스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구조적 장기침체론, 이질적 경제주체, 금융시장과 실물과의 관련성 등은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미 IMF, FRB 등 글로벌 핵심 경제정책 담당 기관들이 구조적 장기침체론의 주장을 대거 수용해 정책 조언에 나선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