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에서 도읍을 한강 유역에 두었던 때를 한성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후 백제가 한반도 남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던 웅진과 사비 시대보다 한성 백제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극히 적다.
웅진과 사비 백제가 도읍을 두었던 지금의 공주와 부여에는 백제 유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지만、 한강 가의 백제 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적고 도읍의 영역조차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주 무령왕릉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백제의 찬란하고 화려한 문화유산이라 일컫지만、 이는 백제 역사 마지막 백팔십년 간의 흔적일 뿐이며 그 이전 오백여 년 동안의 백제는 한강 유역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인 한성 백제의 도읍을 찾는 일은 백제사 연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백제 연구에서 기본이 되는 자료 중 하나는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다。 이 책은 연대 표기가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백제 역사의 큰 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기록을 따라、 천오백년 전 한성 백제의 도읍지를 찾아가 보자。지난해 12월 5일, 남한산성 행궁 복원을 위한 준공식이 있었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과 함께 지어진 행궁은 왕이 난을 피해 남한산성에 머물 때나 후대왕이 여주 효종대왕릉에 행차할 때 쓰던 임시 궁궐이다. 그런데, 행궁 복원에 앞서 2001년 4월부터 있었던 발굴 작업에서 조선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들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곳의 발굴을 담당했던 토지박물관팀이 행궁 서쪽 담장 아래서 초기 백제의 토기 조각과, 철제 무기나 식량을 담은 토기 등을 보관하던 구덩이인 저장공을 찾았던 것이다. 이 발견으로 조선 시대 이전에 이미 백제가 이곳에 성을 쌓았었다는 주장이 구체적인 가능성을 띠게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과 남한산성 축성 때 총책임자였던 이서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열전이 있다. 원래 이곳은 온조왕을 위한 사당이었다.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조선 인조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와 신하인 이서를 자신에게 달라고 청해 이서의 위패를 같이 두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백성들을 이주시킨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의 한산을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남한산)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행궁터 복원 이전에는 구체적인 백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남한산성을 백제가 처음 쌓았다는 주장이 힘을 갖지 못했으나, 이번 발굴로 남한산성 일대가 백제 도읍 권역에 속해 있었다는 논란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남한산성은 지금의 하남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하남시 일대는 백제의 유적지로 밝혀진 풍납·몽촌토성과 석촌동·방이동 고분군이 있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와 함께 한성 백제의 도읍지가 있었던 것으로 주목받는 지역이다. 하남시가 자리한 경기 광주 지역을 백제의 옛 도읍으로 처음 언급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었는데, 1960년대에 역사학자 이병도가 이 주장을 구체화하였고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하남시에서는 백제의 도읍이라고 볼 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에 비해 송파 일대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한성 백제의 도읍 위치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다.
풍납토성 안에서 발견한 백제인의 흔적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을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생각해 보건대 이곳 강 남쪽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연 요새로 된 좋은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 기원전18년 ┃온조왕 원년 ]
백제 역사는 도읍이 있었던 곳에 따라 한성, 웅진, 사비의 세 시기로 나뉜다. 백제 왕조는 고구려, 신라와 세력권 다툼을 벌이면서 도읍을 한강 유역에서 공주, 부여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을 두었던 한성 시기는 백제 678년 역사 중 500여 년에 달하며, 백제가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전성기를 누렸던 것 역시 한성 백제의 근초고왕 때였다. 그러나 오늘날 한강 유역에는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의 규모를 보여 줄 만한 유적과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 시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아방강역고》 등의 역사·지리서들이 백제가 한강 남쪽에 도읍을 두고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 토성, 왕릉 규모의 고분군, 백제 토기가 나온 주거지 등이 한강 남쪽 송파구와 강동구에서 발견되어 이 일대에 백제의 도읍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어 줄 뿐이었다.
한성 백제의 도읍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 시조인 온조왕이 위례성을 세웠던 지형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과 바다, 평야라는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한강 남쪽의 천연 요새, 그곳에 위례성이 있었다. 현재 많은 학자들은 위례성의 위치로 지금의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를 꼽는다. 한강 남쪽에 인접한 송파는 서쪽에 중국으로 이어지는 서해 바다로 나가고, 남쪽에는 한강 하류의 경기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동쪽 너머에는 하남시 동쪽의 검단산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백제 유적으로 밝혀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이 있어 부근이 위례성이었다는 주장에 개연성을 더한다.
그리고 1997년에 송파구 일대를 위례성으로 보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발견이 있었다. 일제 시대부터 백제 시기의 유물이 출토돼 한성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주장되어 왔던 풍납토성 내부에서 백제인들의 집터가 발견된 것이다. 풍납토성 동벽 부근에서 아파트 재건축을 위해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던 중 목탄과 백제 토기 조각들이 나왔고, 당시 풍납토성을 조사 중이던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에게 이 일이 알려졌다. 결국 아파트 공사를 중단시키고 국립문화재연구소팀이 발굴을 시작했다. 그리고 총 11개의 집터와 3중 환호, 토기 가마와 많은 양의 기와 조각,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곳을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발견된 유적과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1~기원후 5세기 후반까지로 발표했다. 이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한성 백제의 존속 기간과도 들어맞는다. 즉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한강 남쪽에 위례성을 세우고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왕에게 죽임을 당한 뒤 그 아들인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풍납토성에 백제인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또한 발굴팀에 의하면 이들 풍납토성 내부 유적과 유물들은 4미터의 퇴적층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집자리들 중 2기는 불에 탔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개로왕 21년, 즉 475년에 백제를 치기 위해 남하한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기마 군대는 한강을 건너 백제 도읍 한성으로 진격하고, 궁궐 재건과 대규모 제방 토목공사로 국력을 소모한 개로왕은 밀려오는 적군을 막지 못한다. 한성의 일부였던 풍납토성은 고구려군에 의해 불타고, 사람들이 밥을 지어 먹던 부뚜막이며 곡식을 담은 토기들도 있던 자리 그대로 재 속에 묻힌다. 그리고 어느 여름 한강이 범람해 상습침수지역인 풍납토성 일대를 휩쓸고, 강물에 쓸려 온 토사는 불에 탄 집들을 뒤덮는다. 그 후로 1500여 년이 흐르고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한강 변에 있던 백제인들의 삶의 터전은 땅속에 묻힌 것이다.
풍납토성에서는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1999~2000년에는 한신대학교 발굴팀이 토성 내부 경당연립주택 재건축 부지를 발굴했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폭 16미터에 2~3중의 판석이 깔려 있는 백제시대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사용으로 쓰이는 삼족 토기와 말머리뼈도 나왔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치던 귀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12마리 분의 말머리뼈는 이곳에서 국가 차원의 제사가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많은 양의 기와와 전돌이 발견되어서 한신대학교 발굴팀은 이곳에 지배계층의 집이나 관청, 사원 등의 특수한 건물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하북 위례성, 강 북쪽의 한성 백제 초기 도읍지
5월에 왕이 말하길, “…내가 어제 순행하다가 한수 남쪽 토양이 비옥한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 안녕을 꾀할 만하다.”…7월에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 ? ⊙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7월에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 기원전 5년┃온조왕 14년 ?
온조가 도읍으로 정했다는 위례성의 위치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한수 남쪽 위례성에 대칭되는 하북 위례성의 존재 여부와 위치 설정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가 원년에 도읍지로 정한 곳이 한수 남쪽의 위례성인데, 13년 뒤에 또 다시 한수 남쪽 땅을 둘러본 뒤에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백제 연구에서 기본이 되는 사서이긴 하지만, 《삼국사기》 역시 백제보다 한참 이후인 고려 시대에 이전의 역사서들을 참고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기원 전후 온조왕 대의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이 책을 쓴 뒤에 이전의 역사서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그 역사서들이 담고 있던 원래의 내용과 《삼국사기》에서 편찬자의 시각으로 편집된 부분을 확인할 수도 없다.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했던 곳으로, 한수 남쪽 위례성에 대칭되는 또 다른 도성이 한수 북쪽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곳을 하북 위례성이라 한다. 즉 온조왕이 원년에 도읍지로 정한 곳은 기록과 다르게 한수 북쪽에 있었으며, 이후 말갈과 낙랑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온조왕 13년에 한수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후대왕이 천도한 사실을 시조의 업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한수 북쪽 어딘가에 온조가 처음 자리 잡았던 도읍지가 있었던 것을 전제해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지금의 경기 남양주 일대인 ‘경성 동북쪽 십리 되는 곳 삼각산 동록’에 하북 위례성이 있었다고 했다. 다른 의견으로는 서울 중곡동의 백제시대 석실묘와 이 부근에 일제 시대까지 존재했다고 전하는 토루를 근거로 이 일대를 하북 위례성으로 보는 중랑천 유역설이 있다.
그러나 사실 ‘하북 위례성’은 삼국 시대 이후 사서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처음 쓴 명칭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하북 위례성의 존재를 믿고 그 위치를 찾아왔지만, 한수 남쪽 위례성에 대응되는 또 다른 도읍지가 한수 북쪽에 정말 있었는지 증명할 만한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삼국사기》의 온조왕대 천도 사실을 그대로 믿는다 해도 13년 만에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옮겼다면, 처음에 자리를 잡았던 곳이 제대로 정비된 도읍지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부여계인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을 정할 때, 고구려나 낙랑, 말갈 등 북방 민족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한강은 북에서 오는 적을 막는 좋은 방어선이 되며, 따라서 온조는 한강 남쪽을 정식 도읍지로 보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성 백제의 수로이며 방어선인 한강
6월에 큰비가 내려 한강에 물이 넘쳐 민가가 떠내려가고 훼손되었다. 7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전답을 보수하였다. [ 116년 ┃기루왕 40년 ] ⊙ 국도의 동쪽에 큰물이 나서 산이 40여 개소나 무너졌다.? 221년┃구수왕 8년 ? ⊙ 2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였다.[ 222년┃구수왕 9년 ]
고고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보는 앞의 견해에 대해, 백제 토성으로 밝혀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강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왕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현재 잠실 부근 한강의 물길은 1971년 물막이 공사로 재정비된 것인데, 그 이전에는 풍납토성 부근에서 갈라진 두 갈래의 한강이 섬이었던 잠실을 둘러싸고 흘러서 지금의 삼성 부근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던 것이 잠실 남쪽으로 흐르는 강의 유량이 점점 줄어들었고, 1971년 물막이 공사로 남쪽 물길을 막고 북쪽 물길을 넓혀서 잠실이 육지와 연결된 지금의 지형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한강을 따라 나란히 있었으며 석촌동 고분도 한강 가에 있었다. 그리고 풍납토성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부근에는 신석기·청동기 시대부터 백제 시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 미사리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1980년 서울 소재 대학교 연합발굴단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백제 때 만들어진 저장공과 함께 4~6세기경에 사용한 대규모 밭이 나왔다. 따라서 미사리 일대는 한성 백제 시대에 도성에서 소비하는 곡물을 생산한 경작지였던 것으로 본다.
이처럼 현재 한강 남쪽에는, 강줄기를 따라 백제의 중요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일대는 지금도 여름 장마철이면 강물이 크게 늘어서 홍수가 나기 쉬운 상습침수지역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한강이 범람해 민가와 농토가 물에 잠기곤 했으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성 백제 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 도림의 꼬임에 빠져서 궁궐과 선왕의 능을 정비하고 한강 가에 대규모의 제방을 쌓았다. 이것은 나라를 휘청하게 할 만큼 큰 공사였으며, 따라서 당시 한강물을 다스리는 일이 왕의 권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강에 인접한 지금의 송파구 일대는 육상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도시에서 한강을 수로로 이용할 수 있는 잇점을 갖춘 지역이기도 하다. 즉, 한강을 통해 서해로 곧장 나갈 수 있는 풍납토성의 위치는 도읍으로 들어오는 물자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서해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교역을 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의 경당연립주택 지구를 발굴할 때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3세기경의 시유 도기 수십 개와 4세기경의 청자류가 나왔다. 또한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5세기경의 가야 토기들도 출토되었다. 당시 발굴을 했던 한신대학교 권오영 교수는 이러한 외래 유물들을 근거로 풍납토성이 대외 교섭을 하고 물류가 오가는 중심지였던 것으로 분석한다.
하남시 유적과 한산의 위치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사슴을 잡았다. [103년┃기루왕 27년 ] ⊙ 4월에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 131년┃개루왕 4년 ] 왕은 태자와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 371년┃근초고왕 26년 ] ⊙ 2월에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승려 10명을 두었다. [ 385년┃침류왕 2년 ]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하북 위례성의 위치를 지금의 경기 남양주 일대로 말하면서, 온조왕이 한수 남쪽에 위례성을 세운 곳은 광주 고읍의 궁촌이라고 했다. 이곳은 지금의 하남시 춘궁리 일대인데, 주변에서 오래된 기와 조각과 건물 주초석, 불상 등이 나와서 위례성이 있었던 곳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남시는 한강으로 나갈 수 있는 북쪽만 막으면 서쪽은 이성산, 남쪽은 청량산(남한산), 동쪽은 객산과 검단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따라서 별도의 도성을 쌓지 않아도 외적을 침입을 막기 좋은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하남시를 10년 이상 발굴해 보았지만, 백제 도읍의 흔적으로 볼 만한 뚜렷한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 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고, 삼국 시대 것으로 볼 수 있는 유적들이 나오긴 했지만 다양한 연대의 유물들이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하남시에 보존되고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고려와 조선 시대의 것인데, 소량으로 산재되어 발견되는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은 연대가 명확하지 않고 사서 기록도 많지 않아서 검증이 어렵다.
1986년부터 하남시의 이성산성을 조사한 한양대학교 박물관팀은 이곳이 통일 신라 시대 축성돼 200~300년간 사용되었던 산성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성산성 내부 지층 윗부분에서는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만 나왔지만, 땅을 더 깊이 파 들어갔더니 고구려계 유물과 약간의 백제 토기 조각들, 더 아래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이성산성 10차 발굴 조사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앞면을 옥수수알처럼 동그랗게 다듬은 돌을 바깥에 쌓고, 그 안에 마름모꼴로 깎은 돌을 여러 겹 박아 넣은 형태이다. 한양대학교 발굴단은 이 성벽을 신라가 한강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축성 방법은 고구려 성벽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며, 따라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 이성산성을 쌓았다고 하는 이견도 있다.
그런데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기존의 성벽보다 약간 안쪽에서 또 다른 성벽이 발견되었다. 새로 발견된 성벽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기존의 성벽과 다른 양식으로 쌓은 것이다. 따라서 이 성벽은 통일 신라 이전이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기 이전에 쌓은 것이며, 백제 시대로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이성산성은 한강 유역에 현재 남아 있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의 백제 유적과 하남시 일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멀리 한강 건너 북한산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즉 이성산성에서는 한성 백제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모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은 도읍을 공격하러 오는 적군의 동향을 살피기 아주 좋은 군사적 요지인 셈이다.
또한 얼마 전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던 남한산성도 한강 남쪽 서울 지역과 하남시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서울대학교 최몽룡 교수 등은 이성산성이나 남한산성이 있는 곳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한산으로 본다. 한산은 근초고왕이 371년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당시 고구려왕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직후에 천도했던 지역으로 기록되고 있는 곳이다. 근초고왕은 전라도 지역을 모두 차지한 뒤에 북진 정책을 펼쳐서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며 백제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던 왕이다. 따라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에 더 유리한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성장하는 나라에 걸맞게 체제를 정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한산은 백제 도성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 사냥을 나가고 사찰을 세웠던 어느 지역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즉 근초고왕은 이미 존재하던 한산이라는 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성 백제 멸망 당시 도성은 한성이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한성과 한산의 관계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재정비했을 때 새로 만든 도성을 한성이라 불렀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또 한편에서는 한성을 온조가 세웠던 위례성과 완전히 다른 성이 아니라 위례성보다 더 넓은 지역에 새로운 성을 쌓고 재정비한 도읍으로 본다.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왕이 도읍을 위례성으로 옮긴 기원전 5년에 이미 한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며, 이후에도 위례성과 한성이라는 명칭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조가 도읍을 세운 곳이 위례성이며,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잃은 도성은 한성이라고 불리지만 중간에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위례성과 한성은 완전히 다른 곳이 아니며, 위례성에서 범위를 더 확장하고 재정비한 도성이 한성이라고 본다.
백제 왕은 어디에 살았을까?
9월 고구려 장수왕이 병사 삼만을 이끌고 쳐들어와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으로 끼고 공격해 오고, 또 바람결을 따라 불을 놓아 성문을 태우니, 인심들이 위구스러워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형세가 곤란하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서 성문 서쪽으로 달아나니…북성을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으로 옮겨와서 치니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다 잡혀서 아차성 아래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다.
[ 475년┃개로왕 21년 ]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신희권 연구원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한성 백제가 멸망하던 당시의 북성을 풍납토성으로,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본다. 성벽 안에 남아 있는 목재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하고 성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 등의 유물을 분석해 보면, 풍납토성은 기원 전후~5세기 후반, 몽촌토성은 3세기 후반~6세기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을 근초고왕 이후에 도읍을 재정비하며 새로 쌓은 성으로 보았을 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축성 시기는 《삼국사기》 기록과도 들어맞는다.
그러나 한성이 어디인가 하는 논란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한강 남쪽 지금의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에서부터 이성산과 청량산이 있는 하남시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 한성 백제의 도읍 권역에 들어 있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성의 중심이 어디였으며, 왕성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논란이다.
현재 하남시의 이성산성, 남한산성, 교산동, 춘궁동 등에 산재한 유적들은 발굴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 지역에는 조선, 고려, 통일 신라를 거슬러 올라가며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더 혼란스럽다. 현재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풍납토성 내부는 1970년대 이후 서울의 난개발로 이미 아파트와 대형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기 때문에 발굴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역사 연구는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이전의 학설을 뒤집고 일대 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분야이다. 특히 지금의 백제사는 더욱 그렇다. 한강 유역 백제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대한 왕궁지와 정연한 바둑판 모양으로 닦은 대로가 발견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1500년 동안 쌓인 흙을 한 층씩 조심스럽게 걷어 내고 그 안에 묻힌 고대 도시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백제의 모습을 찾아낼 가능성은 아직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으므로.
사진가 전성영_Sungyoung Geon은 한강 유역에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된 발굴 현장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5년 이상 작업을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지 기자 류한원_Hanwon Ryu은 1500년 전 고대인들의 흔적을 쫓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숨은 보물 찾기 같은 고고학의 매력을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