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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감사
마태복음 11:16-19, 25-3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7월 첫 주일이다. 꼭 일 년의 절반을 살았다. 시간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는 중이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일을 손꼽아 보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10대 뉴스감이 딱 하나였다. 나중에 침대에 누워 평생을 돌아볼 때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한해의 반환점이다. 독일어로 ‘링반더룽’(Ringwanderung)이란 말이 있다. 어떤 경우 ‘환상방황’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말 그대로 맴돈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어쩌면 인생은 원형 코스를 걷는 일이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그냥 방황이 되기도 하고, 의식하며 살면 순례가 된다. 그러기에 현재의 지점을 늘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나의 현재 지점을 알려주는 인생의 이정표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에게 해마다 반복되는 교회력의 지점은 그때그때 나를 일깨워 주는 영적 이정표이다. 그는 자기 일생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순례한 뒤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영적 여정’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가 지금 제대로 길을 걷고 있다면 불안하거나, 두려울 일도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간다.
1)
현재 내 존재를 알려면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속한 공동체 등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들이 내 인생의 현재 지점이다.
누구나 몇몇 혹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 한 마디로 내 인생의 장단을 기꺼이 맞추면서 산다. 여기에서 ‘장단’은 긴 장(長), 짧을 단(短)을 사용한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어울리며 사는 일이 행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모든 시대, 모든 세대를 빗대어 공통적으로 하신 비유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17).
아이들이 사람이 많이 모인 장터에서 놀이를 한다. 여기에서 장터는 헬라어로 ‘아고라’이다. 거기에서 세상 온갖 이야기가 통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흉내 내어 두 가지 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며 논다. 피리와 춤은 하나의 짝으로 결혼식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또 곡하고 가슴을 치는 일은 장례식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아이들은 같이 놀아 주지 않고, 무심하다. 한 마디로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이들의 놀이를 예로 들면서 왜 너희는 세상의 기쁨이나, 슬픔에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너희의 태도가 무엇이냐고 묻고 계신다.
아이들은 인생의 단맛, 쓴맛도 모르지만 어른을 흉내낸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런데 친구들은 놀이를 하는데, 이에 대해 무심하고 반응 없는 아이들처럼, 왜 너희는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장단도 못 맞추면서 사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렴, 슬피 울면 가슴을 치렴!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반응을 보이렴! 너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혼식은 즐거움을 대표하는 사례이고, 장례식은 슬픔을 대표하는 보기이다. 세상사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러니 장단 맞춰가면서 살아라.
세상이 기뻐하면 박수도 치고, 세상이 아파하면 가슴도 치고 살아라. 자신을 감추고, 태도를 불분명하게 사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신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남의 아픔이든, 기쁨이든 내 일처럼 마음을 주고, 표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게 장단 맞는 일이고, 사람 사는 도리다.
2)
당장 볼 때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장단이 있다. 삶에는 저마다 길고, 짧은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성공이 있는가 하면 실패도 있고, 기쁨이 있는가 하면 슬픔도 있다. 그런데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 인생의 고비마다 나와 맞춰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인생의 길에서 박자를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친구가 있는가? 막상 찾아보면 많지 않다.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살기에 바쁘다.
영화 ‘바그다드 까페’가 있다. 시작은 황량한 분위기이지만, 점점 마음이 따듯해지는 영화다. 남편 때문에 관계가 깨져 마음고생, 몸 고생 하는 두 여성이 만나면서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이다.
‘바그다드 까페’를 보면서 장단을 맞추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젊어서 독일에 살 때, 독일의 이혼이 가장 높은 때가 휴가철 직후라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하였다. 휴가철에, 무더위에 서로 딱 붙어 지내다 보니 대화가 불편하고, 따라서 불협화음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만약 부부가, 같은 식구가, 공동체 안에서 장단을 못 맞추고 산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손바닥을 짝짝 못 맞추는 부부가 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괴로울까? 적어도 부부만큼은 서로 장단을 맞추는, 최소한 맞춰주려고 애쓰는 그런 사이여야 한다. 가족 관계나, 신앙 공동체만큼은 서로 장단을 맞추는 관계여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고단한 인생의 장단을 맞춰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주님은 사람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고, 사람의 고달픔을 들어주시고, 사람의 질병과 아픔을 풀어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 우리를 기도로 만나주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당시 요한은 죄의 심판을 선포하고, 용서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다.
그때 백성과 달리 사회의 지배층이란 사람들은 회개를 촉구하고 애통해 할 것을 역설하는 요한의 선포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고, 구원과 기쁨을 설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무감각하였다. 오직 경계하고, 지적질만 할 뿐이었다.
엘리트인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세상의 장례식을 연출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이 들렸”(18)다고 하였고, 세상의 혼인식을 표현한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의 친구”(19) 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의 정죄는 당시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장단이 다른 결과였다.
그들은 요한도, 예수님도 무시하였다.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한 안타까운 반성도, 자기 삶에 대한 감격도 없이 살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18-19).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백성의 삶에 장단을 맞추는 분이다. 가난한 자, 고아, 과부, 죄인, 어린아이의 변변찮은 삶을 응원하시고, 장단을 맞춰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표현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벽을 쌓은 냉정한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로막은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다.
3)
좋은 친구는 장단을 맞춰주는 사람이다. 좋은 신앙인은 하나님의 장단과 맞출 줄 알아야 한다. 하늘 장단은 참 자유롭고, 깊고, 자애롭고, 온유하고, 따스하며 그리고 신비롭다.
‘길고 짧은 것’이 장단이다. 흥(興)이 오르면 흥대로, 한(恨)이 맺히면 한 대로 먼저 세상과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공감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이다.
지난 주간에 박범진에게 연락이 왔다. 몇 년 만의 일이다. 박범진은 색동교회에 김철민이 친구를 전도하여 처음 출석한 당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비산중학교 시절이니 벌써 16년 전 일이다.
목사님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동안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지난 16년 동안 범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비교적 소상히 안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 소상히 자기 고달픈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듣자니 이젠 범진이의 ‘환상 방황’이 거의 끝나는구나 싶었다. 올 10월에 결혼식을 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차담을 나누고 헤어진 후 문자가 왔다.
“그대로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특별한 일없이 그냥 그대로인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감사한 이유구나, 싶다.
사람마다 현재의 자기 모습에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눈높이로 보면 세상에서 무시당해도 좋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누구나 자기 멍에가 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삶의 무게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누구나 저마다 고유한 인생의 멍에를 지고 산다. 내 멍에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생의 멍에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셨다. 주님은 고달픈 인생의 친구가 되셨다. 사람들의 아픔, 눈물, 상실, 괴로움, 탄식, 분노, 좌절, 무너짐, 그 절절함을 이해하시는 분이다. 얼마나 귀가 크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얼마나 가슴이 넓으시기에 우리의 상처를 품으시는가?
당시 멍에는 홀로 메는 것이 아니었다. 한 겨리, 곧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함께 맨다. 만약 같은 멍에를 매야 할 한 쌍의 소가 서로 등의 높이가 다르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멍에는 두 사람이 함께 메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같은 등 높이에서 함께 내 멍에를 메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얼마나 힘이 나는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는다. 한 해의 중심에 맞는 감사절은 그래서 특별하다. 시간의 매듭을 맺고, 또 풀면서 사는 일은 참 지혜로운 일이다.
내 기준으로 맞추면 감사할 일이 별로 없다. 내 만족, 내 욕망, 내 보상 등,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면,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면 감사가 넘쳐난다. 감사하는 마음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인생이 감사 그 자체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 됨’이란 존재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서니 매사에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 자녀됨은 감사의 제1원인이다. 그럴 때 한 가지 감사가 만 가지 감사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감사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비결이다.
내 인생에 대해, 혹은 남의 인생이라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 인생조차 기적이란 상상을 해보라. 사실 누구나 기적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감사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심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을 느낄 때 하는 표현을 ‘기이하다’고 한다.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시 77:14).
내 인생을 돌아보라. 신기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기이한 일이 많은가?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인생이 있다. 가정마다 저렇게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 평생 맞춰 가면서 사는 일조차 기적이다. 많은 교회 중에서 색동교회에서 우리가 만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는 그 자체로 기적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내 장단을 소중하게 여기라. 지금 길면 긴 대로, 지금 짧으면 짧은 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받아들이라. 그 분의 멍에를 받아들이고, 내 멍에를 주님께 맡기라.
그리고 명심하라. ‘한 가지 감사는 만 가지 감사와 연결되어 있다.’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날마다, 때마다 내게 기적 같은 삶을 허락하시는 그 마음의 감사를 회복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장단에 날마다 은혜를 베푸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