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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똥 이야기
문명이란 더럽지 않은 것을 더럽게 만드는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하얀 양변기 속에 다소곳이 잠긴 똥을 내려다보면서 똥이 더럽다는 인식이 어디에서부터 연원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똥은 아득한 원시시절부터 귀한 대접을 받던 물건이었다. 똥통에 빠지거나 똥물을 뒤집어 쓴 꿈을 꾸면 틀림없이 다음날 큰 횡재를 한다고 여길 정도로 보물 취급을 받았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날이 납작한 호미와 삼태기를 들고 똥을 주우러 다니셨다. 가축조차도 자유분방하게 풀어 놓고 키웠으니 개나 소들이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싼 똥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고, 말똥구리가 쇠똥을 경단 비비듯 말아서 굴리고 가는 모습을 어디서든지 쉽게 볼 수 가 있었다. 그 때는 나라에 비료 공장 하나 없었던 시절이었다. 외양간도 단순히 소의 잠자리만이 아니었다. 겨우내 이부자리로 깔아준 보릿짚과 볏짚 같은 것들이 소의 똥오줌에 잘 발효되어 거름이 되었다. 외양간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고 한쪽 구석에다 구덩이를 파두면 적당량의 오줌이 검불더미에 쓰며들어 퇴비로 발효되면서 저절로 바닥이 따뜻하게 되고 남은 오줌은 구덩이로 모여져서 물 비료가 되었다. 한 겨울에도 거름을 뒤집으면 속에서는 허연 김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소는 한 번 오줌을 누면 양동이 하나로는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누는데 외양간은 바로 비료공장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길을 가다가도 뒤가 마려우면 두 다리를 비틀며 항문을 조이고 참았다가 꼭 우리 밭고랑에 가서 그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전하는데 그 밭에서 키운 곡식을 먹고 자란 손자의 육신이니 내 몸 또한 할머니의 그 성스럽기조차 한 똥을 자양분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그때는 대소변을 보는 곳도 지금처럼 고상한 말로 화장실이라 하지 않고 정낭, 측간 혹은 통시라고 불렀다. 나는 그 중에서도 통시(通屎)란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기가 막혀 죽었거나, 속이 터져 죽었거나, 억울해서 죽었거나, 화가 나서 죽었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지경을 당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통(通)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지 말의 고상유무에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은 오두막집에 살수가 있어도 사람은 속 좁은 사람하고는 같이 살지 못한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상고해 보면 예나 제나 속이 좁아서 통하기 어려운 사람이 가장 큰 애물단지라는 소리 일시 분명하니 많은 이름들 중에서 통시란 이름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해보는 데, 세상의 어떤 쾌감도 단 번에 똥이 쑥 빠져나갈 때의 그 상쾌한 기분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통시에 앉아서 쾌변을 눠보지 못한 사람은 그 형통한 쾌락의 맛을 모를 것이다.
통시는 대게 땅에다가 초등학생 키 높이만큼의 구덩이를 파고 주둥이가 깨진 독 같은 것을 묻은 후 그 위에다가 굵은 통나무를 걸치고 이엉을 엮어서 외부와 차단하면 통시가 되었는데 대문 삽짝 옆이나 아래 체 처마 밑에다 통시를 지었다. 통시를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통시가 가득차면 똥장군에다가 똥을 퍼 담아가서 밭에다 뿌리는데 통시를 친 일꾼이 생각이 모자라면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의 간격을 어른 가랑이 크기에 맞춰놓는지라, 그리하면 다리가 짧은 아이들이 볼일을 보다가 실수로 빠지기도 하였고, 또 똥물을 깨끗이 퍼내지 않고 남겨둘 경우는 똥 덩어리가 떨어질 때마다 똥물이 위로 튀어 올라왔는데, 그런 날은 똥 한 덩어리 누고 엉덩이 한번 치켜들고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엉덩이춤을 추어야 했고 그 타이밍이 절묘하지 못하면 똥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내가 그때의 일을 이렇게 세밀하게 상고할 수 있음도 머리에 똥만 가득 찬 똥 푼 사람의 아둔함에 대한 원망이 컸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통시에는 헌 책이나 다 쓴 공책 같은 것을 걸어두고는 볼일을 보고나서 한 장씩 쭉 찢어서 사용하였는데 그마저도 없는 날이면 굴러다니는 감나무 잎사귀를 이용하여 뒤를 닦기도 했다. 감잎은 앞면이 엉덩이에 닿으면 차갑고 미끄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넓고 두터운 잎인지라 지푸라기에 비해 따갑지 않고 그런대로 잘 닦였다. 그때 유한킴벌리란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워져 두루마리 휴지를 만든다고 방송에 나왔는데 나는 세상에 어느 한심한 놈이 있어서 똥 닦는 휴지를 돈을 주고 사 쓸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통시에 가기가 무서운 밤이면 아이들은 두엄 옆에서 똥을 누곤 하였다. 그럴 때는 퇴비더미 옆에 누워서 되새김질 하는 소가 지킴이가 되어 주었고 밤하늘의 별들이 친구가 되어 똥도 같이 누자며 땅으로 떨어졌는데 아이들은 그걸 별똥별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 시절은 해가 저물면 방마다 요강을 씻어서 들여다 주는 게 갓 시집온 며느리의 중요한 임무였으며 아침이 되면 할아버지, 아들, 손자. 며느리의 오줌이 몽땅 한 곳으로 모아져서 남새밭에 뿌려졌다. 그 오줌 똥물을 먹고 자란 상추며 고추며 가지들이 가족들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었으니 명실상부하게 똥을 통해서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하늘과 땅과 키우는 짐승까지도 하나로 연대해지는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똥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지 않도록 똥에 대한 교육도 단단히 시켰다. 밥 먹다가도 아이가 똥을 싸면 밥상머리에서 그대로 마당에 뛰노는 ‘워리’를 불러서 사타구니를 핥도록 시켰으니 그건 요즘 시중에 나오는 최첨단 물휴지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가끔씩 짧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다가 일어서지 못하고 통시에 빠지는 아이가 나오면 골프 치다가 홀인원을 한 것 마냥 ‘똥떡’을 해서 ‘복떡’이라며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돌렸는데, 복을 많이 받겠다고 서로 똥떡을 먹으려고 다투기 까지 하였으니 누가 낸 지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똥을 신(神)으로 대접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귀하디귀하신 똥이 제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문명이 가져온 함정에 빠져서 저처럼 한 바가지 물과 함께 어두운 하수구로 떠내려갈 운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이나 똥이나 심지어는 신(神)까지도 변기 같은 틀에 갇혀버리면 제 역할을 잊어버리고는 죄다 “더러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는데 오늘 밤에 똥통에 푹 빠지는 꿈이라도 꾸게 되면 이제까지 한 번도 산 적이 없는 로또복권이라도 한번 사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똥을 이렇게 추어줬으니 똥 신이 내게 축복을 내리실랑가-
푸세에서 수세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났다. 도시로 이주해 간 그들은 고향으로 부터가 아니라 친숙하던 똥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똥과 더 가까워 졌는지도 모른다. 보릿짚으로 불을 때며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시원하게 보리방귀를 뀌던 아지매(아주머니)가 도시로 간 후 맨 처음 한 일은 뉴똥 치마를 걸치고 고향에 나타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수돗물을 먹더니 얼굴때깔부터 달라졌다며 덕담인지 시샘인지 모를 말을 반가움에 담아서 한마디씩 건네면서 얼굴보다 뉴똥치마에다 먼저 눈길을 주었다.
“뉴똥”이란 말을 처음 들어본 시골 아지매들에게는 그 말이 참으로 신비스럽게 들렸다. 서양 냄새가 나면서도 동양 냄새도 나고, 도시 냄새가 나면서도 시골 냄새가 담긴 묘한 끌림 같은 게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건 일상을 친숙하게 지낸 “똥” 이란 단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의 뉴똥이 변화를 거듭하여 요즘의 ‘루비이똥’이 된 것인지, 똥에 친근해져있던 우리 아지매가 귀에 들리는 대로 ‘루비이똥’을 뉴똥이라 듣고 그리 말했는지, 아니면 서양의 어떤 무역업자가 한국 사람들은 똥과 친숙하니 물건을 많이 팔려는 수작으로 새로운 서양 똥이라고 “뉴-똥” 이라고 이름 지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는데 중요한 것은 그때 내 귀에는 “똥”이란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뉴똥을 보고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눈길을 보내면 뉴똥 아지매는 기회가 왔다는 듯이 눈을 살짝 흘기고는
“아이고, 그래도 깍쟁이들이 사는 도시보다는 인심 좋은 시골이 낫제~”
하면서 치맛자락을 살짝 한 번 더 감싸면서 시골 인심을 추어주고는 대청마루 구석에다 내려놓은 보따리를 은근히 끌어당겼다. 그런 날은 아지매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 귀한 쌀을 말로 퍼 주고 뉴똥이나 비로드(벨벳) 같은 치맛감을 사는 날이었다.
공기놀이를 하는척하며 댓돌아래 마당에서 아지매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나는 시골 아지매들의 영혼이 뉴똥치마에 홀려 가는 것을 눈을 뜨고 뻔히 보면서도 막을 길이 없었는데, 뉴똥 아지매는 똥도 비로드 천처럼 시커먼 똥을 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도회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시로 진출한 나는 고교시절에 남산동의 어느 판잣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통시는 목수가 네모나게 판을 짜서 똥통 위에다 올린 것이었다. 똥을 풀 때는 상판을 들어내고 작업을 한 다음 다시 그 상판을 다시 덮으면 되었으니 시골통시보다는 상당히 진보된 통시였다. 진보는 그 화려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똥을 푸는데도 돈을 줘야하는 이상한 시대를 창조했다. 똥을 퍼주는 신종직업이 등장 했으며 똥 리어카가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한 집에 여러 세대가 더부살이로 살았으니 아침이면 아가씨 아저씨 할 것 없이 통시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고 그 앞에서 휴지를 빌려 달라는 사람, 담뱃불을 빌려 달라는 사람, 신문을 뒤적이는 사람, 빨리 누고 나오라고 외치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으며 변비가 있어 똥을 빨리 누지 못하는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되어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우리가 최초로 경험한 러시아워는 바로 통시 앞에서였으니 그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대로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자가용 통시였다.
그 후 시멘트가 보급되자 통시도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여 바닥이 빠진 커다란 흰 고무신처럼 생긴 도기로 된 변기가 나왔다. 똥통 위에다 콘크리트를 하고 도기를 시멘트로 고정시켜 버리니 자연히 똥을 푸는 구멍도 똥바가지가 들어갈 만큼 통시 옆으로 구멍을 뚫어야 했는데 그 구멍은 죄다 골목 밖으로 뚫려 있었다. 그런데 꼭 "똥퍼" 아저씨는 학교 가는 아침 길에서 똥을 푸고 있었으니, 똥 푸는 장면을 목격하면 학생들은 행여 하얀 교복에 똥물이 튀길세라 코를 쥐고 재바르게 골목길을 달아났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똥이 대량으로 생산 되었지만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똥퍼' 아저씨가 오지 않으면 똥물이 골목으로 넘치기 까지 하니 사람들은 그 친숙하던 똥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똥에 대한 두려움이 집집마다 골목마다 가득했다.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 달려온 문명이 또 다른 문제를 낳았지만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잘 해결해 나갔다. 드디어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통시를 아예 물로 씻어내는 수세식 화장실을 개발했다. 수세식 화장실을 단 집은 이제 똥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알량한 성취를 뽐내면서 옛날통시를 푸세식이라 칭하며 무시하기 시작했다. 통시조차도 통하는 장소가 되질 못하고 차별 받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쪼그려 누기에서 깔아뭉개기로
학창시절에 나는 영어공부를 잘 못했지만 통시를 ‘와쉬 룸’ 이라 한다는 것은 기억했다. ‘와서 쉬하는 방’으로 풀어서 암기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수세식 통시는 변기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똥을 누고는 천정에 달린 물통의 끈을 잡아당기는 방식이었는데, 물내려가는 소리가 꼭 대청마루에서서 마당쇠를 부르는 대감님의 목소리 같이 요란하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에 쓸려 나가는 똥을 보면 저절로 똥이란 게 참으로 하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누군가를 하찮게 여기면서 자긍심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자긍심이 자존심을 부추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수세식 변기가 세도가의 상징물처럼 가가호호를 휩쓸었고 그렇게 흘러나간 똥들이 하수도는 물론 온 하천을 똥통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변기는 그런 일 따위에는 아랑 곳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경쟁을 하면서 자기들만의 불국토, 미륵세상, 신천신지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변기혁명이 일어났다. 쪼그리고 앉아 용을 써야하는 구차한 꼴에서, 깔고 앉아서 깔아뭉개도 되는 좌변기로 바뀐 것이었다. 좌변기는 사람이 사람을 깔 보고 싶은 욕망을 무한대로 충족 시켜주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문제는 고매하신 어르신과 어린 백성이 아무리 변기지만 그 위에서 함께 엉덩이를 맞댈 수는 없는 처지였다. 결국 만인과 소통하던 통시는 황제가 올라앉아 볼일을 보던 '매화틀' 마냥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진 안방 곁에 붙어서 저 혼자서만 소통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더러는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 그 옆에다 책꽂이까지 만들어두고는 시집이나 수필집을 꽂아 두기도 했지만, 똥 누는 의미도 모르고 똥을 싸듯이 책도 그렇게 읽었으니 세상과의 소통은커녕 제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하였다.
좌변기의 등장은 많은 소통불통의 이야기들을 에피소드로 남겼다. 아파트로 분가한 며느리 집에 들른 시어머니가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좌변기 물로 낯을 씻고는 “세숫대야가 참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다거나, 똥이 마려운 시아버지가 좌변기에 올라가 쪼그린 채 용을 쓰고는 “애야! 똥통의 아가리가 좁아서 일을 보기가 힘들구나!” 라고 했다는 이야기나, 며느리의 엉덩이가 닿은 곳에다 시아버지 엉덩이를 붙이기가 민망하여 허리춤을 부여잡고 통시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는 소리들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차별의 맛을 본 변기의 진보가 거기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도가에게 아부하여 부귀영달을 도모하려는 누군가처럼 귀하고 거룩하신 분께서 어찌 뒤를 손으로 닦을 수가 있겠느냐며 비데란 걸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이 비데란 놈을 사용할 줄 몰라 낭패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야긴 즉은 이러하다.
처음 골프를 배워서 폼을 재며 00컨트리클럽으로 갔는데 운동을 마치고 목욕탕 입구에 있는 간이 화장실로 들어갔겠다. 볼일을 마친 후 물을 내리는 꼭지를 찾지 못해 비데에 붙은 스위치를 이것저것 눌렀더니 갑자기 아래에서 물이 쭉 뿜어 올라오면서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게 아닌가. 오줌발(?)이 어찌나 강하던지 눈을 뜰 수가 없어 멈춤 스위치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화장실 밖으로 달아나 버렸겠다. 그런데 이놈이 브뤼셀 뒷골목에 있는 '오줌 싸게' 동상처럼 계속해서 물을 내질렀으니 그 다음 이야기야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범인을 찾는 관리인의 목소리가 탕 안을 울리는데 나는 비데도 모르는 놈이 골프 치러 왔느냐고 고함치는 소리처럼 들려 탕 속에다 머리를 푹 담그고 숨어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거지 뭘~’ 하고 깔아뭉개면서.
똥바가지와 후천개벽
깔아뭉개는 쾌감이 만연한 시대에 남이 설사해 놓은 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설사하기만을 고대 한다. 앞사람이 뭔가를 먹으려 하면 제발 설사해 주십사고 “설사” “설사”를 외치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정말 재수 없는 누군가가 설사를 하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즐겁게, 맛있게, 행복하게 먹는다. 거기다가 먹어치운 대가까지 요구한다. 곁에서 보면 얄밉기조차 하다. ‘고스톱’ 이야기다.
우리나라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고스톱을 친다. 여름이 되면 물가마다 그늘마다 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논다. 경노당의 할머니들도 하루 종일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낸다. 고스톱이 재미있는 이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흑싸리 쭉정이 같은 껍데기가 귀한 대우를 받고 별 볼일 없는 비. 똥. 풍. 초. 칠. 구의 열 짜리나 못생긴 멍텅구리 코주부가 쌍피(雙皮)로 인정되어 하늘같은 대접을 받는 때문이다. 빛나는 광(光)을 쥐고 있다 할지라도 피를 챙기지 못하면 ‘피박’을 쓰게 되니 적어도 고스톱 판에서 만큼은 광(光)은 기를 펴지 못한다. 패를 받았을 때 광(光)이 석장 이상 들어오면 무조건 팔고 기권하는 게 유리하다. 광(光) 잡았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는 고스톱의 고자도 모르는 ‘초짜’일시 분명하니 이런 ‘초짜’가 화투판에 끼이면 내가 아무리 ‘타짜’라 할지라도 골병들 확률이 높다. 자기 패만 보고 남의 패는 보질 않으니 광(光) 끌어 모으는데 만 집중하는 때문이다.
‘피박’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피박’이란 ‘피 바가지’란 말의 줄임 말인데, 옛날의 바가지는 죄다 박을 타서 썼으니 바가지 중에 가장 하찮게 쓰이는 바가지가 똥바가지임은 ‘물어무삼하리요’지만, 같은 박이 쪼개져서 한쪽은 물바가지로, 다른 한쪽은 똥바가지로 쓰였으니 참으로 그 운명이 기막히다 아니 할 수가 없어서 옛날부터 바가지 썼다고 하면 똥바가지를 떠올리고는 기구한 팔자라는 의미로 통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친구네 집들이나 아들 돌잔치나 심지어는 춘부장 별세하신 빈소에 까지 몰려다니며 고스톱을 치면서 밤을 지새우는 인정과 의리를 다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남 할 것 없이 똑 같이 똥을 싸는 처지임을 인정하고 천한 것일수록 귀히 여기려는 심정이 우리 몸에 베인 때문이고, 광(光) 잡았다고 거들먹거리며 피(皮)를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똥바가지를 뒤집어씌워야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모름지기 진정한 광(光)이 라면 어린백성을 받들고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는 민유방본(民唯邦本)의 정신이 우리의 혈맥 속에 유구히 이어져 온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까지 설사가 무서워 아무도 먹어가지 않은 똥 쌍피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거기다 더하여 일찍이 정감록이 예언한 후천개벽의 세상이 있다면 바로 고스톱 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앞뒤 분별없이 먹으려들면 설사를 하게 되고, 욕심이 지나쳐서 '스리 고'를 부르면 '독박'까지 쓸 수도 있으니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는 장치가 이 보다 더 완벽하게 된 세상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대동(大同)과 화엄(華嚴)의 세상, 만물이 일여(一如)하는 완전한 소통의 세상이 있다면 필시 고스톱이 만들어 낼 것이라 확신하며 물바가지로 똥을 푸든 똥바가지로 물을 먹든 그런 분별심이 무슨 대수냐 해보는 것이다. 아무리 밉다할지라도 친구에게까지 “스리 고에 양박”을 씌우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아가씨가 싼 똥을 치운 이야기
새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 했다. 공사한 사람들이 치우지 않고 모아둔 쓰레기가 복도에 가득하다. 답답한 사람이 치울 것이라는 쓰레기 같은 심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 같다. 깨끗이 치우고 화장실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했다. 보름 쯤 후에 옆 사무실에도 이사를 왔다. 이삿짐으로 따라 왔다가 버려진 화분과 쓰레기들이 복도 한 구석에 또 수북하다. 함께 살아갈 이웃인지라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기가 어렵다. 기회를 봐서 좋게 말해야 한다.
며칠 후 아침에 청소를 하는데 옆 사무실 아가씨가 출근을 한다. 지나치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가씨 반갑습니다. 나는 앞집에 사는데 이 사무실에 근무하는 모양이지요?”
하고 물으니까 “예”라고 대답한다.
“어여쁜 아가씨와 같은 건물에 살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하니 환하게 웃는다. 웃는 그녀를 보면서 한 수 더 떠서
“저도 나이는 좀 들었지만 미남이지요?”
라고 하니
“예, 사장님도 미남이십니다.”
라고 웃으면서 응수를 한다. 그녀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서 나는 재빨리
“그런데 저기 쓰레기……”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듣고는
“아……, 제가 치우려고 하는데 어디로 치워야 하는지를 몰라서……”
라고 얼버무리더니
“곧 치우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더니 건물을 청소하고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다. 아직 입주가 덜되어서 관리인이 없다고 하니 여자화장실이 막혔단다. 내 곁에 서 있던 남자 직원이 여자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를 들여다보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서 나온다. 치울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들 코만 움켜쥔다.
‘막혔으면 뚫어야지 날 보고 뚫으란 말이냐?’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 똥 치우는 일도 사장이 모범을 보여야지!”하며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변기에 가득한 똥이 꽤 오래 되었는지 눌어붙은 상태였다. 똥 닦는 것도 못 배운 누군가가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풀어서 뒤를 닦고는 그대로 변기에 집어넣은 탓에 여러 겹의 휴지가 배출구를 막은 것이다. 변기 옆의 꼭지를 눌러 물을 내리니 누런 똥물이 변기 밖으로 넘쳐서 나온다. 옆 사무실 아가씨는 기겁을 하며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는 사무실로 달아나 버린다. 넥타이를 와이셔츠 안으로 집어넣고 소매를 걷은 후, 압축기를 가져와서 똥물 속에다 담구고 펌프질을 하였다. “뿌륵, 뿌륵” 넘치는 똥물이 피스톤의 힘에 밀려들어가더니 “뻥” 뚫리면서 밑으로 쑥 빠진다. 새로 물을 내리고 말라붙은 똥 찌꺼기를 빗자루로 문지르고 다시 물걸레를 집어넣어 이리저리 닦고 바가지로 물을 부어 씻기를 여러 번하고 나니 변기가 드디어 고유의 백색을 드러내며 여인의 하얀 엉덩이처럼 반짝거린다. 나는 옆 사무실의 문을 열고 그 아가씨를 다시 불렀다. 깨끗해진 화장실을 보고난 뒤 할 말을 잊은 그녀가 ‘고맙습니다.’는 말만 연발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니 복도가 깨끗하다. 누군가가 쓰레기를 전부 치운 것이다. 옆집 사장이 내 사무실로 인사를 하러 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인물이 훤하고 서글서글하다. 복도의 쓰레기를 전부 치웠다고 보고 아닌 보고까지 한다. 졸저 『생각 속에 갇힌 인간』속표지에다 "좋은 이웃을 만나 반갑습니다."고 서명을 한 후 선물로 주며 "사장님은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고 앞날의 운명을 예언 해 주었다. 내가 무슨 신기(神氣)가 있어서가 아니라, 경전이란 경전을 다 외우고 입만 열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인 머리로만 똑똑한 사람보다 단 한가지 밖에 모르지만 우직하게 그 걸 실천하는 사람의 운명이 그 보다 백배 천배나 더 낫게 되는 때문이다. 입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에, 젊은 사장과 그 직원들이 생각을 깨고 나온 것을 본 때문이다. 지행(知行)이 합일(合一)할 때 비로소 막힌 곳이 뚫리고 운명의 문이 열리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