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구 반대편 남미에서는 꼬리곰탕이 인기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한국인들이 있다. 한국 이민자들이 그곳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소꼬리를 헐값에 구해 곰탕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 맛이 현지인들에게도 통하면서 남미로 퍼지는 추세다. 유럽의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처럼 이방인들도 반한 우리의 꼬리곰탕은 쫀득한 육질의 전통 영양식으로 오랜 세월 반가(班家)의 사랑을 받아왔다. 서울에서 ‘꼬리곰탕’ 하면 남대문시장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은호식당’을 꼽을 수 있다. 1930년대 초 일제강점기 시절 창업주 김은임씨(작고)는 남대문시장 골목길에 천막을 치고 해장국과 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시장을 여는 상인들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던 김씨는 음식 맛이 소문나면서 점포를 얻어 ‘평화옥’이라는 상호를 달았다.
시장 상인들의 편한 밥집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공무원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들이 손님 접대용 고급메뉴를 요청하자 김씨는 꼬리곰탕을 시작했고, 이것이 대박을 쳤다. 이후 꼬리곰탕 명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게 되었다. 6·25전쟁 때는 부산 피란처에서도 임시로 문을 열었다가 휴전 후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1970년대 초반 김씨를 돕던 수양딸 이명순씨(작고)와 정태희(84)씨 부부가 대를 물려받으면서 ‘은성옥’이라고 상호를 바꾸었고, 가게에 불이 나 건물을 보수하면서 ‘은호식당’이라고 변경했다.
은호식당은 서울 남대문시장 청자상가 맞은편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해장국, 설렁탕 등 탕 위주의 식사 메뉴가 여럿 있지만 꼬리곰탕을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다. 이 집 꼬리곰탕은 옛 방식 그대로 토렴식이다. 가마솥 뜨거운 물에서 건져낸 뚝배기에 삶아 놓은 꼬리를 담고 뜨거운 곰탕 국물을 몇 번이고 토렴해낸다. 추운 겨울엔 국물이 식을세라 뚝배기째 바글바글 끓여 내고 싶지만 이곳 주방이 협소해 어렵다. 대신 곰탕 국물 주전자를 뜨겁게 대기하고 있다가 김이 펄펄 나는 국물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부어준다.
진한 국물에 살이 푸짐한 꼬리곰탕! 국물을 한번 들이켜면 뱃속이 뜨듯해지면서 추위에 움츠렸던 몸이 확 풀린다. 생대파를 듬뿍 넣은 국물은 누린내가 전혀 없고 구수한 육향이 가득하면서도 깔끔하다. 꼬리를 고아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기름기를 쪽 뺀 꼬릿살은 야들야들하면서도 쫄깃하다. 푸석거리지도 질기지도 않고 마침맞게 잘 익은 꼬릿살을 젓가락이나 포크로 결대로 쪽쪽 찢어 부추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아든다. 인심도 후해서 국물뿐 아니라 국수사리를 무한리필 해준다. 국물에 밥과 무료로 제공되는 국수사리를 말아 김치와 깍두기를 얹어 호로록 먹고 나면 기분 좋은 포만감에 기운이 쑥쑥! 기호에 따라 깍두기 국물이나 부추간장을 국물에 살짝 더하면 더 산뜻하다.
이 집 꼬리곰탕은 고기만으로 얼추 배가 찰 정도로 남달리 꼬릿살이 실하다. 하지만 그래도 꼬리고기를 더 즐기고 싶다면 탕에 꼬리를 더 푸짐하게 넣어주는 꼬리토막을 시키면 된다. 재밌는 이름의 ‘꼬리토막’은 안주 겸 식사도 가능해 인기가 좋다.
점심에는 꼬리곰탕으로 식사하는 손님이 많은 반면 저녁에는 담백한 꼬리찜과 야들야들한 모듬수육 등 안주를 찾는 주당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이것말고도 특별 메뉴로 방치찜이 유명하다. 이름이 다소 생소하지만 방치찜을 맛보면 단골이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미다. 방치는 소 엉덩이살로 장조림처럼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하다. 한 마리에서 2개의 방치가 나오는데 방치 하나가 3인분 정도밖에 안 되는 귀한 부위이다. 게다가 조리 시간이 길기 때문에 전날 미리 예약해야만 방치찜의 행복한 맛을 즐길 수 있다.
▲ 4대를 이어갈 정희석씨.
“더 일찍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1997년 2대 이명순씨가 작고한 뒤 아들 정용식(57)씨가 대를 이었다. 그 후 남대문 재개발이 거론되면서 은호식당의 맥을 잇기 위해 중구 서소문과 여의도에 분점을 냈다. 현재 서소문점은 정용식씨의 여동생이, 여의도점은 정용식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재개발이 여러 차례 무산되면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대문점은 용식씨의 아들 희석(31)씨가 돌보고 있다. 정태희(84)씨는 요즘도 남대문점에 자주 나와 손자가 차려주는 꼬리곰탕 밥상을 받는다.
이미 3대를 넘어 4대째로 달려가고 있는 은호식당 꼬리곰탕의 비법에 대해서는 ‘특별한 비결이 없는 게 비결’이라고 한다. 질 좋은 재료가 우선이고 여기에 알맞게 불을 조절해 끓이는 정성이 들어간다. 전날 꼬리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말끔히 빼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 7시부터 오래된 가마솥에 사골과 양지와 함께 안치고 소주와 들깨가루를 넣어 푹 삶는다. 꼬리는 대개 3~4시간 정도로 통째로 삶아 건져서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낸다.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고기가 넉넉히 들어가기 때문에 뼈 누린내가 나지 않고 달큰한 고기 향이 좋다.
여기에 은호식당 식구들의 정성이 한데 어우러져 깊은 맛을 더한다. 한평생 이곳에서 동고동락하며 꼬리곰탕을 끓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온 이곳 주방식구들은 어떻게 끓여야 꼬리곰탕 맛이 제대로 나는지 훤히 알고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곰탕은 그저 오래 끓이기만 하면 진국이 되고 더 맛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꼬리곰탕은 그렇지 않다. 소꼬리는 너무 오래 삶으면 살이 터져서 부스러지고, 조금만 빨리 건져도 질기고 억세다. 오랜 노하우로 정성껏 끓여낸 꼬리곰탕에 발품을 팔아가며 구입해 직접 볶은 천일염을 넣어 더욱 구수한 맛을 살려낸다.
3년 전부터 이곳에서 특유의 싹싹함으로 손님을 맞고 있는 희석씨는 어려서부터 자주 놀러오던 은호식당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더 일찍 와서 이곳의 오래된 분위기를 좀 더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그는 어릴 때는 할머니의 낡은 집이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음식 맛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것이 소중한 유산이라며 가능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가길 소망한다. 그동안 보수를 하면서 옛 모습을 잃은 부분도 있지만 주로 예약 손님을 받는 2층 룸에 가면 아직도 옛날식 나무 천장을 만날 수 있고, 오래된 메뉴판이 벽에 그대로 붙어 있어 추억을 불러온다.
수십 년 단골은 기본, 그의 자식의 자식들까지 대대로 맛있는 영양식을 찾아온다는 은호식당. 정희석씨는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가업을 잇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탈리아 피자집이나 일본의 초밥집처럼 꼬리곰탕 명가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