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5개월을 넘기면서 당사자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의 주요 선거 일정과 조만간 부딪치게 된다. 전쟁은 선거에, 선거 결과는 또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전 세계가 특히 러-우크라-미국의 주요 정치 일정에 관심을 쏟는 이유다.
러시아는 오는 9월 10일 지방선거를 우크라이나의 점령지역 4곳(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자포로제주, 헤르손주)를 포함해 치르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다. 지방선거는 각 지역 수반(지자체 단체장)과 지방 의회 의원을 뽑는다. 러시아는 또 내년 상반기(3월?)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오는 10월 총선, 내년 3월 대선이, 미국은 내년 11월 대선이 예정돼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 전쟁) 개시 직후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내린 우크라이나의 정치 일정은 전쟁의 장기화로 혼란에 빠진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7일 "의회(최고 라다)가 8월 18일부터 90일간(11월 15일까지) 계엄령과 총동원을 (8차) 연장하기로 결정함으로써 10월 총선은 사실상 무산됐다"고 보도했다. 의회는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날(26일) 제출한 계엄령·총동원령 연장 법안을 찬성 347표, 기권 14표로 승인했다.
계엄령 총동원령 연장에 대한 의회 표결 결과. 찬성 347, 기권 14./사진출처:스트라나.ua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의회) 모습/사진출처:스트라나.ua
앞서 이 매체는 '선거와 전쟁'(Выборы и война)이라는 코너에서 "의회가 (계엄령) 연장안을 승인하면 10월 마지막 일요일(29일)에 열리는 총선은 물건너간다"며 "정치권에서는 최근까지도 10월 총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계엄령 하에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같은 사실을 여러 번 상기시킨 바 있다고도 했다.
총선이 무산되면, 다음 선거 일정은 내년 3월 말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로 바로 넘어간다. 젤렌스키 정권의 연장이냐, 정권교체냐를 가름하는 최대 정치 이벤트다. 하지만, 이 역시, 11월 15일 이후 계엄령·총동원령이 3개월 더 연장되면 사실상 치를 수가 없다. 선거 운동을 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에서 과연 가능할까? 대선을 치를 수 없다면, 대통령 임기를 일정기간 연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든지, 헌정 중단을 막기 위한 '특별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루슬란 스테판추크 우크라이나 의회 의장이 바로 이같은 논리로 주요 정치 일정 중단에 반기를 들었다.
스테판추크 우크라이나 의회 의장/사진출처:rada.gov.ua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스테판추크 의장은 28일 "우리 헌법에는 계엄령 기간에 선거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며 "금지 조항은 '계엄령의 법적 체계에 관한 법률'에 들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의회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내년 예산안을 심의, 통과시켜야 하는데, 민주주의 체제의 보루답게 필요한 입법 조치를 취해 맡겨진 임무를 다해야 한다"며 "총선을 통해 절차적 당위성과 권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티니 콕스 유럽평의회(PACE) 의장 등 동료들이 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콕스 PACE 의장은 지난 5월 "우크라이나가 가능한 한 빨리 투표(총선)를 준비해야 한다"며 "민주주의는 단순한 선거 그 이상이지만, 선거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스테판추크 의장은 "헌정 중단을 막고, 우리가 싸우고 있는 민주주의 원칙및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제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 문제(총선 실시를 위한 법률 개정)를 적극적으로 토론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그러나 '계엄령 기간에도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관련법(선거법)의 개정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면서도 "헌법상 (선거) 금지 조항이 없는 만큼, 관련 법률을 개정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의회 연설 모습/사진출처:대통령실
스테판추크 의장의 폭탄 발언(?)을 전한 스트라나.ua는 다음날(29일) 그의 주장을 검증하고 반박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83조는 계엄령이나 비상사태 발령 시, 의회 선거(총선)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것. 이 조항은 '계엄령 또는 비상사태 기간에 의회(최고 라다) 임기가 만료되는 경우, 그 임기는 계엄령이나 비상사태 해제 이후 선거(총선)로 구성된 의회의 첫번째 회기, 첫번째 회의까지'라고 규정하고 있다.
В случае истечения срока полномочий Верховной Рады Украины во время действия военного или чрезвычайного положения ее полномочия продлеваются до первого заседания первой сессии Верховной Рады Украины, избранной после отмены военного или чрезвычайного положения.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동안 전쟁 중에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주장을 여러 번 반복했다. 총선이나 대선 운동기간에 전쟁에 지친 일부 국민들의 불만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도 있고, 포로셴코 전대통령 등 야당 세력이 '조만간 크림반도를 수복할 것'이라는 정부 고위 인사들의 잇딴 실언을 규탄하고, 젤렌스키 정권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호소할 경우, 자칫 전쟁 승리를 향한 전열이 흩뜨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방 측의 태도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측에 '선거 일정'은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전달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집권 세력 내부에서 총선을 실시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두가지다. 10월 총선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소속 의원들에 대한 장악력이 줄어들고, 지금이 오히려 평시보다 더 나은 선거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트라나.ua는 "계엄령 기간에 총선을 실시하는 것도, 개헌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권력과 정치권이 계엄령의 일시 중단을 결정하지 않는 한, 총선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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