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9월 29일(금 )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는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갈 5:24).
참 그리스도인은 이런 자임을 믿습니다.
하오나 나의 삶에 이러한 지속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일로 나를 더욱 현저히 넘어뜨리려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님이 주신 참 자유를 날마다 누리며 살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살되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은 우리나라 고유명절인 추석입니다.
둥근 달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는 우매함을 불쌍히 여기사 만물 안에서 무엇을 구하려는 자들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구하며 바라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귀성과 귀경객들의 안전을 지켜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13:9-17
제목 : 죄악의 소굴인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신 주님의 뜻.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게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였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나의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좀 불경스러운 일이다.
지금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 독자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를 신실하게 잘 믿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신앙의 신선도가 점점 약해지다보니 유대교에서 온 거짓 선생들이 그들을 미혹하니까 그 낚시바늘에 꿰어 넘어질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이렇다.
이것이 과연 그런가? 하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영적 위기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개개인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게 그렇게 쉽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영혼을 세우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아들의 생명 값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식물인간이 된 자녀의 여러 장기들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부모에게는 자기 자녀의 눈이라도 하나 받은 사람은 남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가 내 자녀의 눈을 끼우고 있지. 그래 이 아이는 내 자녀나 마찬가지야.”
뭐 이런 식의 인간관계가 새로이 형성 되는 것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우리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어느 한 장기만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귀한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났다.
따라서 이것은 그저 조그만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아들의 생명으로 덮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아들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들 지도자들은 단순히 이 땅에서 잘 가르치고 호의호식 했던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아직 완전히 그 본체를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를 증거로 받고 비록 희미할지라도 멀리서 보고 자신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본향을 땅에서 찾지 않고 오직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삼아 날마다 그 나라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갔던 자들이다.
성경은 이런 선생들을 가리켜 이렇게 묘사한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에도 이런 믿음으로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메시야와 그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 땅에 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자들의 밥이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 자들이다.
나아가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때론 칼날 앞에서 그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기도 하였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 앞에서도 구차하게 풀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내어주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돌로 침을 당하고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과연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런 믿음의 지도자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아직 받지 못하였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날마다 바라고 소망하며 그 나라를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이시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이런 믿음의 선배와 지도자들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왜냐하면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코 쉽지 않은 믿음의 절개를 지킨 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 것이다.
성도의 은혜를 굳게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음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하던 자들은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
오직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죄사함과 영생의 선물이다.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은혜이다.
성도의 믿음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는 파레시아를 지킴으로 더욱 강해진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시련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으며 사도들이 가르쳐준 신앙의 길을 담대히 걸어갈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런데 파레시아가 아닌 방식 곧 유대교에서의 음식규례를 통해서는 결코 믿음의 확신도 심령의 위로도 진리의 길을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정한 모든 규례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고 또한 그것을 폐하셨다.
완성이라 함은 구약이 정한 그 율법을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감당할 수 없기에 완전한 하나님이요 또한 완전한 사람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심으로 완전히 이루셨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당신께서 친히 완성하신 율법을 이제 폐하신다.
(골 2:14, 20-22)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 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
음식규례를 지키는 등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새 언약의 제단에서도 예외가 될 뿐이다.
10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새 언약의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공동의식 곧 성만찬‘을 의미한다.
반면에 장막은 율법에 근거한 옛 언약의 공동체를 결집하는 것이다.
제단과 장막을 비교하는데, 제단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장막은 그 그림자이다.
따라서 제단이 장막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음식에 관한 율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새 언약의 식사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죄를 없애기 위하여 지성소 안으로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리고 동물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랐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피로써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행하신 의로운 행동이다.
(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구약의 대속죄일(유대력 7월10일)에는 제물을 먹지 않고 진 밖에서 소각시켰다.
진은 광야시대 장막 진영을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낱말이다.
진 바깥에 있는 인간과 동물(희생제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속죄일의 희생제물을 먹을 수 없다는 금령 또한 그 제물의 특별한 거룩성과 속죄기능과 연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속죄제물로 세상에 오셨다.
그는 구약성경의 제사를 성취하고 능가하는 제물로서 ‘영문 밖, 곧 진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그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부정하여 진 밖으로 나갔던 미리암이나 여러 사람들 그리고 희생동물들과 동일하게 영문 밖(진 밖)으로 나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짐승은 성막 안에서 피를 흘려 속죄를 이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전이 있는 도성 밖에서 피를 흘려 속죄를 이룬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어 성도가 된 이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자취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공동체 역시 영문 밖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치욕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땅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으며 우리들은 앞으로 올 영원한 도성을 찾고 있다(14절).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진 밖의 부정한 장소로 나아가야 한다.
왜일까?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완전한 속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시라도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강력한 촉구의 메시지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식이라도 그것으로는 유익을 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유대교의 음식규례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오늘날 식사를 통해서 더 가까워진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음식을 규례로 만들어서 법적으로 지키는 그런 음식규례이다.
구약시대는 부정한 자나 죄를 지은 자, 그런 부정한 자와 접촉한 자 역시 부정하게 되어서 진 밖 곧 영문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죄인이 되셔서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이다.
그럼 결론이 나온다.
우리 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아무런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누리는 그것이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면 우리도 주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영문 밖으로 나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주님은 당신의 온 몸을 죄악 덩어리로 삼으시고 그 죄를 짊어지신 상태로 나가셨다.
그런데 주님이 짊어지신 죄악 덩어리는 영원히 그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되시며 지옥에까지 들어가시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되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고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예수님이 만인의 죄를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은 진 밖에 있는 부정한 자들로 인하여 더 많이 부정해 지신 것이 아니다.
그 부정한 진 밖에서 친히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그들을 오히려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
공동체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단지 거룩성을 위해서만 아니다.
거룩성만을 위한다면 어디도 나아가지 않고 그저 가장 안전한 그 안에만 거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안전한 자리를 내려놓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셨다.
그것은 곧 세속의 모든 권리나 소유를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영구한 도성이 아닌 세상에 안주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불안정한 자리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불안정한 자리는 하나님의 안정으로 들어가는 자리이며, 세속의 안정성을 희구함으로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새 언약 백성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세속의 안정을 초월하여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치욕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진실된 삶이고 참된 삶이다.
예수님께서 3명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신다.
예수님의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도 보인다.
베드로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채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말한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여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행하시는가?
다른 말씀 없이 그저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신다.
그곳에는 귀신들려 말 못하고 물에도 던져지고 불에도 던져지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군중들에게 둘려 쌓여 있고 제자들은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여 안절부절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막 9장).
이것이 삶의 현장이다.
여전히 죄가 난무하고 거짓과 행악이 득실거리는 그 자리는 우리가 외면할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죄를 짊어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그 자리다.
그 자리에 있는 죄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뜻하신 주님의 마음을 오늘도 더 깊이 헤아리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나는 더럽고 추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자리에는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자였다.
내가 더러워질 것이 뻔한데, 내가 왜 그 자리에 가야하느냐고 하면서 버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고 나는 오늘 지금 이 베트남 땅에 와 있다.
물론 이곳 역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되 바르게 믿을 수 있도록 내가 보고 만난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영문 밖으로 나왔다.
이 자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께서 내가 있던 영문 밖으로 오셔서 나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그 구원의 생명과 능력으로 나 또한 영문 밖으로 나아가 주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거하셔야 하지만 낮고 낮은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낮은 땅에 오셨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써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영문 밖으로 가셔서 그곳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거하던 영문 밖, 그곳까지 찾아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사오니 그 영문 밖이야 말로 내가 생명을 얻은 무덤의 자리임을 고백하나이다.
이제 생명을 얻은 자로써 주님의 생명인 영생을 누리며 나누는 삶을 살게 하시어 오늘도 그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주의 군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