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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기 1954년도에 태어나서
1961년에 집에서 약 3 킬로 떨어진 곡송국민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 3월에 김천 금릉 (현 중앙)중학교 입학하고
1970년 3월에 김천고등학교( 일명 김천고보 )에 입학하였다.
1974년 3월에 울산공대 입학하여 1978년 2월에 졸업하였다.
1978년 5월- - - 1980년 8월 군복무
1081- 1986년 련대중공업
1986년 부산에서 1년 생활
1981-- 2014년 김해서 28년 생왈
2014년 김천으로 이사함
고종황제는 창제 이후 448년 동안 한자에 밀려 있었던 한글의 위상을 격상했다.
한글은 15세기에 세종이 만들었지만 공식 문자의 역할을
한자(한문)에게 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난 선교사 헐버트 박사는
1886년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조선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외교 자문을 맡아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해 을사늑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자 했으며
1906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 조치를 당했다.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언어의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이때 현대 한글의 공로자라 할 수 있는 호머 헐버트가 등장한다.
호머 헐버트는 배재학당 바로 옆에 있는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한글을 접하고 우수성에 감탄하여 연구에 몰두하여 띄어쓰기를 창안하였을 뿐 아니라.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였다
고종은 즉위 31년인 1894년 12월17일(음력 11월21일)
한글을 국가 공식 문자로 지정하는 칙령을 내각에 지시했다.
한글은 이 칙령을 통해 비로소 공식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칙령 발표 20일 뒤인 1895년 1월7일(음력 1894년 12월12일)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을
한글·한문·국한 혼용문 순으로 작성해 종묘에 고한 뒤에 제정·선포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들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1954년 생인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1968년 12월 25일 ,
70년 1월 1일부터 한글을 전용할 수 있도록
「한글전용에관한법률」 개정을 서두르도록 내각에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
권오병 문교, 홍종철 문화공보, 이석제 총무처장관 등
관계국무위원들로부터 한글전용추진에 관한 세부 계획을 보고받은 다음
이와 같이 지시하고,
70년 1월 1일부터 행정·입법·사법 3부의 모든 문서뿐만 아니라 민원서류에도
한글전용을 실시,
한자가 든 서류는 접수하지 않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중략)박대통령은 “한글이 제정·반포된지 520년이 넘었는데도
무어라고 핑계를 붙여 한글전용에 반대하고 주저하는 것은
한글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라 하는 비주체적·전근대적 사고방식이며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을 문화로부터 멀리 하려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1948년에 제정된 이전까지의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이
권고에 가까운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1968년의 발표부터는 '공문서에 한글만 쓸 것'에 강제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자폐지가 20세기 동아시아 지식인에게
그리 생소한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헤아려 보면,
박정희가 밀어붙였던 한글전용은 (그의 사상으로)
근대화'의 선로에 놓여있는 목표가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해본다.
K-POP, 반도체와 조선 산업, 자동차, 세계최강인 양궁 등을 들 수 있다.
한글의 편리함과 과학성은 이미 공인된 것이고,
아마 한글이 없었다면 한국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한글은 1446년 10월 9일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훈민정음은 물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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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행정·교육·법률·기술·사회 분야의 필수 언어인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고,
조선말은 일개 지방어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이런 현실에 위기감이 든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 안호상 등
쟁쟁한 한글학자들은 1921년 12월 3일, 조선어학회를 창설하여 한글 연구와 ‘말모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
1936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38년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하여,
사실상 교육을 금지했다.
해방이 되고 많은 학교들이 생겨 나서
한글 교육에 앞장 섰다,
한글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정부는 공식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언론과 출판물에서도 한글 사용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독립신문(1896년 창간)은 최초의 한글 신문으로,
한글 보급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한글 사용이 억압되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한글학회가 결성되어 한글 연구와 보급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어 표기법의 체계가 잡혔고,
1940년대에는 '큰사전' 편찬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해방 후 한글이 공식 문자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한글 : 정보화 시대와 한글의 미래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은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고,
모든 국민이 한글을 배우도록 교육 제도를 정비했다.
이후 한글은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필수적인 문자로 자리 잡았으며,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한글 사용이 확대되었다.
오늘날 한글은 국제적으로도 그 우수성과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가 한글의 창제 과정과 그 독창성을 인정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했다.
또한, 유네스코는 한글의 창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종대왕 문해상"을 제정하여
매년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이뤄진 표음 문자로,
매우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천지인을 상징하는 점, 선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한글은 배우기 쉽고,
발음과 표기의 일치도가 높아 읽고 쓰기에도 매우 편리하다.
또한, 한글은 조립형 문자로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한글은 정보화 시대에서도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전산 시스템에서도 강력한 문자로 자리 잡았다.
한글의 미래
정보화 사회와 AI 시대를 맞아 한글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어의 전산화와 AI 번역 시스템의 발달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도 점점 늘고 있으며,
한류의 확산과 더불어 한글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한글은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문자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 많은 외국인들이 이니라에 살아 가고들 있다.
이제 영어는 기본이고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일본어 중국어 배트남어 등 수많은 언어들을 배워야 수출 수입을 하여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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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듕귁(중국, 中國)이라는 단어는 나라이름이 아니다.
맹자(孟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혹은 목천자전(穆天子傳)의 수우중국(樹于中國)은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
시경(詩經)의 혜차중국(惠此中國)은 '나라의 중앙(수도)을 가르키는 말',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 '제왕이 계시는 도읍 가운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중국(中國) 경사야(京師也) '중국은 경도(京都), 수도(首都)',
요(遼), 북송(北宋), 금(金), 남송(南宋), 청(淸)도 자신의 나라는
'제왕이 계시는 중심의 나라', '제왕이 있는 곳을 지칭하여 중국'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자신의 국명을 사용할 때에는 대당(大唐), 대명(大明), 대청(大淸)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므로 단 한번도 국명, 나라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는 것이다.
하여, 근대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를 다른 나라에서 국명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신해혁명(1911-1912) 후 1925년 7월 1일 쑨원(孫文, 손문)이
중화민국(中華民國, 약칭 중국)을 건국하면서 나라 이름으로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에 의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다시 건국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中國)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에 사용되던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훈민정음해례본, 언해본(諺解本))',
華夏: 듕국을 닐온 말이라.(화하, 선조판 소학언해),
등에서도 보듯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과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과거 그 어느때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세종대왕이 나라를 지칭하였다고 하였다면,
반드시 '나랏말싸미 명국(明國)과 또는 대명(大明)에 달아'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또한 1925년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에 사용되던 중국은
현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듕귁(中國)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으로 혼돈하면 안되는 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라 썅땀(常談)에 강남(江南)이라 하나니라.' 이를 다시 해석해보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문자의 중심지인 한자문화의 중심지는 즉,
듕귁(中國)은 황제가 계시는 곳이며,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이라 한다.'
함으로써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한자로 적으면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
특히 해석을 할 때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서로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조선 백성이 당시 명나라 황제, 송나라 사람 또는 명나라 언어,
송나라 말소리가 소통이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이를 대륙에 있었던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이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 된다.
"어리석은 백성이 송나라 황제가 쓴 글을 읽지 못하여, 명나라 사람과 말소리가 소통되지 아니하여 내 이를 어엿비너겨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이해를 해야할까?
아니면 훈민정음으로 서로 소통이 가능했을까?
함으로써 현대의 해석에서는 우리 조선도 '내가(세종대왕) 있는 이 곳이 듕귁(中國)이며,
도읍지 한양이 강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세종대왕도 대륙 한자문화의 중심지 사람들이 나라의 중심, 도읍을 듕귁(中國)이라 함을 배워 자신도 자신의 나라 중심을 듕귁(中國)으로 표현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있는 이 곳 듕귁(中國)에서
내가 쓰는 글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글자(이두문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의 표기, 경주의 남산신성비(591년), 6세기경 서동요, 혜성가, 설총이 신문왕(681∼691) 때 집대성, 하급관리의 행정문서, 민간에서 사용)가
서로 달라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로 해석해야 한다.
세종대왕이 살던 곳, 한양, 궁궐에는 왕족과 문인들이 한자를,
일반 중인(상민)들은 이두문자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왕과 문인은 "國之語音이 異乎中國"라 쓰고
"국지어음 이호중국"이라 읽어도 그 뜻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알 수 있었으나, 백성은 알 수 없으므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쓰고 읽으면 백성 또한 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한자는 "語音"이라 쓰고, "어음"이라 읽으면서 "말씀"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고,
말소리는 "말씀"이라고 해야 했지만,
한자를 배우지 못한 중인, 백성들은 글자 "語音"의 뜻을 알 수 없었으리라.
함으로써 말소리 소통의 어려움이 참으로 문제였을 것이 자명하므로,
세종대왕이 고민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후에 왕이 "語音"이라 교지를 내리면,
"말씀"이라 표기하여 방을 붙였다고 이해되고 있으며,
글자(말씀)와 뜻(말씀), 말소리(말씀)를 동일하게 하여
왕과 백성간, 듕귁(中國)과 백성들이 사는 지역간 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였다고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현재 대한민국에는 왕도 왕족도, 양반도 없으므로
반드시 한자를 사용해야 하는 분야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말소리와 다른 한자가 아닌 같은 한글을 쓰고,
또 그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된다.
<역사적 사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훈민정음에서 밝힌 중국(中國)이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 또는 그 이전의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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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중국
234쪽~241쪽
훈민정음 속의 而乎中國을 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안의 술맣은 고을들의 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 땅에는 온통 명나라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而乎明國 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의 중심지이며, 황제(세종)가 계신 땅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가 중국말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불평하여 걱정하였고 뜻을 전하고자 해도 끝내는 뜻을 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내 이를 딸하게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는 것이니 문자를 습득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國之語音而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은 위와 같은 머리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 문장의 맨앞줄에 나오는 국지어음이호중국國之語音異乎中國을 놓고
어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간에 각기 의견이 달라,
모이면 다툼질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이란 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연구,정리한 것을
1949년 이 단체가 한글학회로 바뀌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를 높여
현대어에 맞도록 바꾼 말일 뿐이며, 正音(발음부호)의 뜻을 왜곡시키려는 행태에서 나온 것이다.
28글자를 정리해 낸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글자의 자형에 있어서는
정인지(1396~1478)가 발문(해례문)에서
글자의 모양은 옛날 전자의 모양을 본떴고 소리를 따랐으나
자음은 일곱 가락에 어울리게 했다.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고 밝힌 것이나,
『세종실록』에
언문은 옛날 글자로서 새 글자는 아니다(諺文皆 本文字非新字也)
라고 쓰인 것만 보더라도 글자 자체를 창안한 것이 아니고
훈민정음 이전에도 이와 같은 부류의 글자는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세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40년쯤 지난 뒤의 군주였으므로
당시의 집현전 사람들 중에는
고려 말 조정으로부터 커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주변국,
이를테면 明나라와 琉球.倭.吳越은 물론 北宋과 南宋.東晉.哈丹을 비롯해
멀리는 大食國.蒙古.女眞.거란까지,
그리고 더 멀리는 서역(실크로드)의 여러 나라들과
상업과 문화(학문)의 교류가 빈번하면서도 문자와 언어가 다른 탓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는데,
굳이 조선 백성이 중국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중국 사람과 말이 꼭 통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조선왕조 안에는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조선이 대륙에 있으면서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둘중 한 가지 설정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세종 당시에 중국이란 왕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나라이름이 아니라 큰 고을 중앙이란 듯을 가진 中州.中原.의 대명사로서,
군주가 있어서 각 고을의 군을 다스리는 일종의 고을 집합체이다.
군주가 다스리는지역을 묶어 큰 울타리(口)를 치고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고 방패로 막아 주기도 한다.
그것이 나라 國자가 만들어지는 유래가 되기도 하거니와
현대와 같은 국가의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많다.
현대의 국가란 영토와 국민과 이들에 의한 주권 등 세 가지가 충족되면 만들어 된다.
일정한 영토에 정주하는 다수인과 그들을 통치하는 통치조직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본래 국가라는 말의 어원은 stato에서 유럽에서는 도시국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국가(Nation)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15세기 이후 비로소 도시국가의 개념을 벗어나게 되었다.
도시국가 즉 stato에서 생각해 볼 때 국가라는 말은
대체로 동일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하기 시작한 근세국가의 명칭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고대 춘추시대 전후에는
노예제도로 국가형태가 마련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 시대에 오면서는 농노제에 의한 봉건국가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주의로 형성된 국가,
그 후 20세기에 들어와 나타난 사회주의 국가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성계가 중원을 차지해 중앙조직을 갖추고 팔방(八域,八道)의 영역을 관할지에 두자
중원을 비롯한 각 부의 고을이 안정되면서 규모도 확대일로로 발전하게 되고
각 고을 집단 취락지의 인구도 팽창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연히 중앙정부 조직과 하부조직간에 균열도 생기게 마련이고
마찰을 빚게 되기도 한다.
또 중앙과 고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심의 소외감도 생기게 되고,
이웃 고을과도 생조에 관련된 이해가 엇갈려 반목과 증오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각 고을에 두었던 村長이니 部長이니 君이니 하는 제도는
모두 이때(조선조) 생겨난 것이며,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會盟制度라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지방의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새로운 조정집단을 형성하게 되는데,
전국시대 때 영웅호걸의 출현은 군주제가 무너졌을 때 나온 것이다.
이 점을 우려한 중앙정부는 중앙정부와 회맹, 회맹과 부를 엮어
일사불란한 조직연결망을 가질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 문자는 조직을 묶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중앙정부→회맹→부 →촌, 거꾸로 촌→부 → 회맹 → 정부로 이어지는 의사전달의 매개체는
대개가 문자로 쓰인 문서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난 문제점이 문자의 해독에 관한 것이었다.
땅이 넓고 수많은 족속 집단으로 형성된 지방의 각 고을들이
제각기 문자를 표현하는 발음이 달라 일상 언어활동은
물론 공식문서에서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중앙정부로서는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놓고
문자(한자)의 음을 누구나, 어느 지방에서나 공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한 끝에 28글자를 만들어 모든 고을에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사안의 전말을 이해하면 훈민정은은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해할 수가 있다.
나라 안 각 고을마다 말하는 사투리가 심하여
백성들의 말소리는 서로 다르고 임금이 있는 조정의 말과도 통하지 않았다.
문자는 같은데도 문자를 나타내는 소리가 이곳저곳마다 달라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말로는 통하지 않아 뜻 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나라에서는
문자에 소리를 내는 부호를 새로이 정했다.
누구든 문자를 배우려거나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려거든
28자로 된 음법을 이용하면 쉽게 될 수 있을 것이니
먼 지방 사람들과도 같은 소리로 통하게 되므로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풀어 보면 훈민정음이란 문자는 문자대로
똑 같은 부호로써 쓰이게 되니 이는 바른소리(正音)요,
이것을 모든 백성에게 가르치자(訓民)는 뜻이 있다.
각 고을을 합쳐 중앙정부를 이루고 있었던 근세의 조선은 중앙에 있는 왕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中原의 왕국.中州의 왕국.中朝의 왕국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말로 이해를 돕자면 각 고을이 小華가 되고 소화가 뭉쳐져 中華가 되는 것이다.
즉 조선은 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소화가 모여 중화를 이룬 나라이므로 중화의 나라 중국이며,
중원.중주.중조의 나라 중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소화는 조선이요, 중화는 중국이라는 말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선을 꾸미면서 만들어낸 용어일 뿐
중화는 조선의 유토피아적 중용사상이었다.
『禮記』에 있는 조선(中國)은 1천7백여 개의 나라가 모여 있다는 말이
이를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최만리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한때는 빛을 잃어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으나
실학의 實事求是기 보급되면서 훈민정음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에게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찌 되었거나 훈민정음 속의 이호중국而乎中國을 국지어음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 안의
수많은 고을들의 상호어음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땅에는 온통 명나라 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이호명국而乎明國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이며,
이 조선은 또 중원의 나라.중화의 나라인 중국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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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1907-1995)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한국 최초로 3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해 평생을 한글 기계화 운동에 앞장섰다. 공병우는 평양 의학강습소를 거친 후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해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가 되었고, 1936년 일본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學]에서 안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공안과'를 개설한 공병우는 자신의 환자였던 한글학자 이극로를 통해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8·15해방 후 일본어로 된 〈신소안과학 新小眼科學〉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9년 그는 한국 최초로 고성능 공병우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된 그는 한글 타자기를 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보여 주어, 정치적인 이유로 선고받은 사형을 면하기도 했다. 결국 납북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그는 그 후 본격적으로 한글 기계화 연구에 몰두했다. 1951~71년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1971년에는 맹인재활 센터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소장을 역임하면서 한글의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 자판 연구에 전념했다. 쌍초점타자기, 한영겸용 타자기, 한글 텔레타이프, 한글 점자타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맹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한 그는 정부가 4벌식 한글 타자기를 표준형으로 정하자 3벌식 타자기의 우수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고집스럽게 정부와 싸웠으며, 숨지기 전까지도 컴퓨터 통신을 통해 3벌식 타자기의 우수성을 알렸다. 조상의 제사도 모시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습을 거부했던 그는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1989)를 통해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안구를 기증하고 시신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실에 기증해 줄 것을 유언했다. 대통령상과 외솔문학상, 한국적십자사은장박애상, 국민훈장 석류장, 서재필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원한 의사. 그러나 한글 자판 연구가이자 전 한글문화원장으로서 한글 기계화, 한글 전산화에 앞장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한글로만 유명한게 아니라 시력검사판 한글화 및 다양한 안과 진료기술 도입 등 안과의사로서의 업적도 있다. 안과의사이면서 언어 관련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는 점은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만든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와 유사한 점이다. 2. 한글 관련 운동 2.1. 세벌식 타자기 개발 오른쪽에 초성·가운데에 중성·왼쪽에 종성을 배치하여 입력하는 체계인 '세벌식 자판'을 1949년부터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6.25 전쟁 때 이미 한글을 타자기로 빠르게 입력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한때 세벌식 점유율은 월등하게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세벌식 타자기 특유의 빨랫줄 글꼴 (아래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문단 참고)이 '이' 자를 '일' 자로 위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따라 정부는 세벌식 타자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벌식보다 타속이 느린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으로 지정했다. 또한 1983년, 빨랫줄 글꼴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정부는 네벌식을 마개조한 두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하고 세벌식의 사용을 계속 제한했다. 이러한 탄압들에 대응하여 공병우는 정부에 반발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코렁탕을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2.2. 한글 전용화 대한민국은 1948년 한글 전용화 정책을 편 북한에 비해 한자 사용률이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순한글은 입력할 수 있지만 당시에 많이 쓰이던 한자는 입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한자의 사용을 포기하고 순한글을 사용했다. 1990년대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한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50년대 당시만큼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공병우 타자기의 영향도 일부 존재한다. 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위 빨랫줄 글꼴은 공병우가 타자기를 빠른 속도로 치기 알맞게 글꼴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이 글꼴의 특징은 초성, 중성이 빨랫줄처럼 되어 종성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네모꼴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칠 때 글씨의 모양이 중간중간에 바뀌는 것이 없다보니 익숙해지면 편리한데다가, 2000년대 들어서 그 디자인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비슷한 글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공병우는 한국어 입력기가 없는 컴퓨터에서도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이 글꼴을 사용하여 새로운 로마자 대응 글꼴을 만들었는데, 이를 직결식 글꼴이라고 부른다. 이 글꼴을 그대로 영자 워드프로세서에 대입시킨 공병우 박사는 프로그램의 변경 없이 한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여기에서 당시 워드프로세서의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 컴퓨터의 등장 이후 컴퓨터 용으로 자판을 개발할 필요가 생기자, 공병우는 여든이 넘은 몸으로 세벌식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개발하였다. 이 자판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에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최종 자판'이 세벌식의 마지막 자판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 사후, 공병우 박사의 뒤를 이은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써왔고, 이는 2021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세벌식(공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손가락 연타 수가 적어서 피로도가 적다는 특징이 있고, 개량 자판에 따라 한 글자를 한 타에 칠 수도 있다. 신광조 세벌식(신세벌식)도 공병우 세벌식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 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5. 기타 한글 관련 활동 3.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한글 연구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개요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안과의사,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공병우가 개원한 공안과는 광화문(서린동)에 아직도 그대로 있다. 공병우는 소학교 졸업장도 갖추지 못했고, 평양 의학강습소에서 의술을 배운 뒤 정규학교는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의술을 오로지 실력만으로 익힌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하드렌즈를 만든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에서 하드렌즈 연구의 주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 전까지 일본 가나로 만들어져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제작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과계의 "선구자"이자,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때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본인은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기타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대한민국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19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웬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 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찰을 대주지는 못하고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것으로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타계 당시 유언으로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겨서 카데바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생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안면이 있었다 . 장길산 연재 당시 황석영이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 마시다가 본인의 주특기인 약장수의 재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마침 그 옆자리에서 공병우도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듣고 나서 공병우는 황석영을 불러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그치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고,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밝혔다.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신의주시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기정이다. 5. 함께 보기 공병우,《네이버캐스트》, 2014년 5월 1일 작성. 2014년 5월 9일 확인.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 따뜻한 하루 한글문화원 홈페이지 [스브스뉴스, 스브스스토리] 참된의사.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2016년 1월 30일 15:56 [조선일보] 정전협정문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 아시나요 [1] 이북5도 기준 행정구역 상으로는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상동. 성남면 전역에 김포 공씨가 많이 집성해 있다. 박사학위논문 : 所謂中心性脈絡網膜炎(増田氏)の本態に関する実験的研究 (1936)[3] 김은식이 펴낸 공병우에 대한 어린이용 평전 제목이다. 공병우는 자신의 성을 따서 병원 이름을 '공안과'로 붙였는데, 이 병원은 현재 아들 공영태 씨가 이어서 계속 운영하고 있다.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본사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의 하나은행 서린지점(구 외환은행)이 들어온 건물에 있다. &&& 그래서 문제안 선생은 공박사로부터 셈틀로 한글을 적는 길을 배워서 문재완 글꼴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본 공 박사는 “자판을 보지 않고 타자해야 셈틀로 글 쓰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좋은 글을 쓸 수 있소.”라며 내게 공 박사 댁으로 와서 배우라고 하였다. 내가 밤 11시부터 12시까지밖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니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가 날마다 1시간씩 셈틀로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해 내가 자판을 보지 않고 300타까지 글을 쓰니 “이제 되었소, 이 선생은 글을 잘 쓰니 피시통신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한글운동을 합시다.” 라고 기뻐하였다. 그때 공병우 박사는 정부가 한글 창제원리에 맞지 않는 두벌식 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정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를 피시통신에 올렸는데 조회 수가 900명이 넘게 나왔다. 보통 100명이 넘는 조회 수가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읽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내가 공병우 박사 아이디로 “내가 배운 주법과 주도”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 조회 수가 1000명이 넘은 것을 보고 “이 선생 글은 꾸밈이 없고 글이 솔직해서 셈틀로 글을 쓰면 더 글을 잘 쓸 것이오.”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 글은 1966년 내가 대학생 때 국민문화연구소 토요강좌 때에 성균관대 2대 총장을 지낸 이정규 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공 박사는 1906년 태어나 일본 식민지 때에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작문 숙제로 일본인 교장 선생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그 교장은 혼내지 않고 오히려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공박사가 쓴 글을 읽어주면서 글은 그렇게 꾸밈없이 제 생각을 솔직하게 써야 한다고 칭찬받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내 글이 거짓이 없고 쉬운 우리말로 써서 좋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래서 칭찬을 하면 소도 웃고 춤을 춘다고 공병우 박사 칭찬이 내게 자신감을 주어서 날마다 한글사랑 글을 써서 피시통신에 올렸다. 그렇게 공 박사는 교수나 박사,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바른 생각을 하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을 더 알아주었다. 그래서 교수나 일류대학을 나온 이는 공 박사를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은 솔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이 겨레를 위해서 한글기계화 복음을 전하려고 몸 바치는 모습이 성인처럼 보였다. 그때 공병우 박사는 날마다 한글사랑과 한글기계화운동 글을 써서 피시통신에 올리고 그 글을 종이로 뽑아서 통신을 안 하는 이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는데 “내 글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읽는 사람은 이 선생뿐이오. 학벌이나 권위만 내세우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보다 실천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고 쓸모가 있소.”라시며 나를 알아주고 하나라도 내게 더 가르쳐주려고 애쓰셨다. 그래서 나는 공 박사에게 인정을 받으며 모시고 한글운동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그때 내가 공병우 스승을 모시고 피시통신을 통해서 한 남다른 한글운동 할 때 일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나는 공병우 박사와 함께 누리꾼 1세대다. 그때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들 피시통신이 생겼고 그곳에 한글사랑모임이 있었다. 공병우 박사는 날마다 그 곳에 한글사랑과 한글기계화, 과학 중요성 들들 글을 써서 올렸다. 나도 공병우 박사처럼 한글사랑모임에 자주 글을 써 올렸다. 그래서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공병우 박사와 내가 쓴 글을 읽고 한글사랑꾼이 되었다. 그때 한글사랑꾼들은 통신상에서 글로만 만난 것이 아니라 가끔 한글회관과 한글문화원에서 만나 토론도 하고 한글사랑을 한글기계화에 힘 쓸 것을 다짐했다. 그때 만난 이들 가운데 초등학생과 중학생도 있었는데 중학생인 김용묵 군과 초등학생인 최재길 군은 다음에 공병우 박사처럼 셈틀 전문가가 되겠다고 했는데 두 사람 모두 과학기술대를 나와 셈틀 자판 연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공병우 박사 글을 읽고 감명 받은 이들이 세벌식사랑모임을 만들고 지금도 셈틀자판을 연구하고 한글기계화 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공병우 박사가 이렇게 우리나라를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올려놨는데 정부와 학자들이 공병우 정신과 업적을 외면해서 한문나라인 중국보다도 정보통신 발전과 과학 발전이 느리고 나라가 주저앉게 되어서 안타깝다. 2. 영문으로 쓰던 통신 아이디를 한말글로 쓰게 하다. 하이텔과 천리안 들 피시통신에서 이름(아이디)을 영문으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나는 하이텔에 한글로 쓰게 해달라고 건의를 했더니 들어주어서 아이디( 통신이름)를 한글로 ‘나라임자’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 함께 하이텔 통신을 하는 이들은 나보고 ‘나라임자님’이라고 기억하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하이텔에 글을 쓰려면 회비를 내야 했는데 좋은 글을 자주 올리는 이들에게는 논객이라고 해서 통신비를 받지 않았다. 나도 하이텔에서 그 혜택을 받았다. 참으로 하이텔이 고마웠는데 없어져서 안타깝고 오늘날 미국이 만든 얼숲(페이스북)처럼 발전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그때 한글사랑모임 모람들은 인터넷을 ‘누리망, 누리그물’이라고 하고 이메일을 ‘누리편지’라고 우리말로 했다. 그런데 누리통신인들을 ‘네티즌’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거슬려서 한글사랑모임 뜻벗들에게 ‘누리꾼’이라고 바꾸자고 했더니 많은 젊은이들이 좋다고 써주었고 지금은 이 말이 사전에도 올랐다. 우리는 새로 말을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어 쓰려고도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외국말을 쓰니 우리 말글살이가 불편하다. 그때 한글사랑모임 젊은이들과 함께 한자혼용과 한자병기 정책을 반대하는 운동,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 한글국회 만들기 운동을 했다. 언론은 그런 활동을 보도해주지 않는데 누리통신을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내 활동을 알릴 수 있어 좋았다. 3.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1호 정하자는 운동을 하다. 그때 한자혼용이나 영어조기교육 반대활동 들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고 많은 활동을 한 것 가운데 “훈민정음해례본을 국보1호로 하자”는 운동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데 쓰지 않아서 빛나지 않고 있기에 “훈민정음해례본을 국보1호”로 정해서 국민들이 한글이 얼마나 훌륭하고 고마운지를 깨닫도록 하고 싶었다. 더욱이 국보1호인 ‘숭례문’이 불타서 그 가치가 떨어졌기에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데 문화재청은 국민의 소리를 외면했다. 그 뒤에 국회에 청원을 했더니 한글이 빛나는 것을 방해하려고 국보 순위를 없애버리는 꼼수를 부렸다.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광화문)에 걸린 한글현판을 떠버린 것도 그런 얼빠진 짓이었다. 무엇이 귀중한 문화재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겨레를 일으키는 것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4. 한컴 “아래아한글 지키기“ 운동을 하다. 참으로 한국 정부와 국민은 못나고 어리석었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로서 그 장제 원리와 특징을 살려서 셈틀을 이용하면 한글이 더욱 빛나는 데 가로 막았다. 세벌식 자판에 조형형 코드로 국가 표준을 정해야 한글이 살고 국민이 편리하게 말글살이를 하는데 두벌식 자판과 완성형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국가 표준으로 정했다. 한글 24글자를 조합해서 11172자를 조합해 쓸 수 있는데 정부는 2350자만 쓸 수 있는 완성형을 국가표준으로 정해서 한글이 가진 장점을 못살게 만들어 한글을 빛나지 못하게 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정부요 어리석은 엉터리 전문가들이다. 그래서 공병우 박사는 그 정부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때 세벌식 조합형 글쓰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글과컴퓨터 회사가 어렵게 되어 두벌식 완성형 코드를 구현하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컴은 공병우 박사가 도와서 창업하고 힘들게 키운 회사다 그렇게 되면 그 회사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공병우박사 뜻과 노력이 무너지는 일이고 한글을 세벌식 조합형 방식으로 글을 쓸 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또한 한글 발전을 가로막혀 큰 국가손실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소기업인들과 한글단체를 이끌고이 한컴지키기운동본부(회장 이민화)에 참여해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다행히 한컴은 살았다. 이 일은 국민이 나서서 한컴과 한글을 살려낸 중대한 일이었다. 5. 누리꾼들이 모여 정치개혁운동에도 나서다. 2000년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아 정치개혁을 하자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총선시민연대를 조직했을 때에 누리꾼들도 그 일을 돕자고 ‘총선정보통신연대’를 만들었다. 그때 하이텔, 천리안들에서 활동하던 논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신문 대자보 이창은 대표가 앞장을 섰고 나도 힘껏 밀어주었다. 참여연대 손혁재 사무총장과 함께 나도 그 신문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어 한글회관 강당에서 총선시민연대 박원순 상임위원장과 성유보 한겨레신문 논설위들이 참여해 출범식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대자보 이창은 대표는 역사학을 전공한 논객으로 인터넷신문 창시자인데 대자보 시작 때부터 나는 그 신문에 지금까지 한글운동 글을 계속 올리고 있다. 하이텔통신에서 만난 이창은 대표가 고맙고 든든하다. 하이텔, 천리안 등 누리통신에서 꽃핀 한글운동: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나의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됐으며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 안과 의사이자 발명가였던 고(故) 공병우(1906~ 1995) 박사는 평생 세 번 죽었다.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에 반대해 '공병우 사망' 전보를 본가에 날렸고, 6·25전쟁 중엔 인민군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탈출했으며, 생물학적으로는 1995년 사망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을 보고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한반도의 운명을 기록한 이 문서가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1938년 서울 안국동 벽돌집 2층에 공안과를 열었다. 우리나라 안과 1호인 공안과는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쌍꺼풀 수술, 콘택트렌즈 도입도 국내에선 공안과가 최초였다. 현재는 3남 6녀 중 차남이자 유일한 안과 의사인 공영태(71) 원장이 운영하고 있다. 공병우 타자기가 전시돼 있는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지난 5일 그를 만났다. 벗어진 이마와 눈매, 웃는 모습과 안경까지 부친을 빼닮았다. 공영태 원장은 "외모만 그렇지, 아버지의 좋은 점은 거의 못 닮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65년 된 정전(停戰) 상태는 종전(終戰)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 공 원장은 "올해 급진전된 평화 무드가 믿기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며 "북한에 또 속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안과 의사 공병우가 본 6·25 공병우는 평안북도 벽동 산골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까지는 머리를 치렁치렁 땋고 서당에 다녔다. 스무 살에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안과를 선택했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는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나 자신이 사실은 한글에 대해 '눈 뜬 장님'이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개업 직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공안과를 찾았다. "눈병을 치료해드렸는데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한글을 일본놈들이 못 쓰도록 탄압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도 제 나라 글에 관심이 없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큰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한글 시력 검사표부터 만들었다." ―한글 타자기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광복 후 일본어로 된 안과 책자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직접 번역하고 조수 둘이 정서(淨書)했는데 능률이 오르질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하였다. 일단 뜻을 세우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저희는 어릴 적부터 경쾌한 타자기 소리에 묻혀 살았고요." ―공병우 박사 하면 '속도'라는 낱말이 떠오릅니다. "학교도 계속 월반하여서 졸업장 한 장이 없다. 타자기의 생명은 모양이 아니라 속도라 믿었고, 낮에 하는 결혼식은 시간 낭비라며 반대하였고. 저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아버지는 시간을 굉장히 아꼈다. 1분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꺼번에 두세 가지를 하는 식. 화장실 갈 때 신문과 라디오, 커피까지 가져가요. 하하하. 유난스러워 보이겠지만 아버지한테는 그게 편하고 정상이었어요." ―영어 타자기를 신체 해부하듯 뜯어놓고 구조부터 익히며 한글 타자기를 설계했다고 들었다. "가로쓰기를 하면서 (영어에는 없는) 받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였다. 병원 일은 뒷전이었고. 조롱은 물론 '공 박사가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지요.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구성 원리에 맞게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그 타자기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다고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고 피란가지 않고 서울에 남으셨답니다.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버님을 끌고갔어요. 1946년 '정판사(精版社) 사건'(조선공산당원들이 자금 조달과 경제 교란을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 연루자 중 한 명이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주장해 진단을 의뢰받았는데, 진찰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로 실명한 것이다. 그때 써준 진단서를 트집 잡은 겁니다. 졸지에 정치범이 돼 감옥에서 총살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강요받아 썼노라 둘러댈 순 있었지만 살자고 지조를 꺾을 순 없었답니다. 그런데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밑씻개 종이로 들어온 영어사전을 보고 무리하게 단어를 외우면 더 쇠약해져 빨리 죽을 수 있겠다 생각하였다." ―그런데요? "무료로 눈병 치료를 많이 해줘 평판이 좋으셨어요. '인민 공화국에 타자기 설계도를 바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을 타자기로 타닥타닥 옮기자 감탄하며 살려준 거예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납북되다가 도망쳐 나오셨고요." ―부친께 타자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군요. "구원자와 같았죠.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정전협정에서 공을 세운 공병우 타자기 정전협정은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평더화이) 사이에 맺어졌다. 정본(正本)은 공병우 타자기로 만들어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평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 공 원장은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그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며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고 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공병우 타자기가 들어갔나요. "6·25 직전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고 시제품 3대를 만들었는데 아버지와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 언더우드 3세(원일한 박사)가 각각 사용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6·25에 참전해 정전협상 땐 유엔군 통역장교였다. 급히 아버지를 찾아와 한글 타자수 두 명을 구해 갔다." ―타자기가 공을 세웠다. "영문 타자기보다 빨랐으니,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글자 모양이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꼴이라는 타박도 쏙 들어갔어요. 우리가 매번 신속하게 처리하니까 북한 측이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맸대요." ―북한 병원은 어떻던가요. "말도 못하게 열악하죠. 평양의대에 갔는데 녹슨 주삿바늘이 있고 거즈가 빨개요. 삶아서 재활용하는데 핏물이 빠지질 않아서예요. 소독된 병에 보관해야 하는 링거액을 맥주병에 넣어두고 종이로 막아뒀더라고요. 북한 의사들과는 잘 통했어요. 안과 수술법을 가르쳤는데 그 자리에서 100% 흡수하더라고요. 이게 통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인가요?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문학적 표현이고, 안과 의사들이 보기엔 '몸의 창'입니다. 당뇨·혈압 같은 질병이 눈에 먼저 나타나요. 혈관이 잘 보이거든요. 눈은 기능적으로도 중요하죠. 모든 정보의 80%는 눈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잖아요."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특허청은 1999년 공병우를 세종대왕,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지석영, 우장춘과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에 선정했다. 그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한글 기계화 운동가였고, '아래아 한글'은 그의 지원 아래 태어났다. 전국을 돌며 개안 수술을 무료로 해줬는가 하면 맹인 부흥원을 만들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타자기 사용법도 가르쳤다. ―세벌식은 우리가 많이 쓰는 두벌식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무엇보다 속도가 빨라요. 받침 찍을 때마다 시프트 키를 눌러야 하는 두벌식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3~4㎞마다 브레이크 밟았다 떼는 꼴이니까요. 왼손을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두벌식과 달리 양손의 부담도 고른 편이고요. 전두환 대통령 때 두벌식이 표준으로 채택돼 매우 낙심하였다." ―부친은 여러 겹의 삶을 사셨습니다. "대한제국 때 태어나 20세기를 살면서 21세기를 내다본 사람이라고 하지요." ―가족에겐 무척 짜다는 소리를 들으셨는데, 아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나요? "뭔가에 몰두하면 가족도 없었어요. 당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 YMCA와 한글학회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셨지요. 아무 상의 없이 결정해 어머님과 종종 투닥거리렸다. 나갔다 오시면 땅문서가 없어지곤 했으니까. 우리야 섭섭한 정도지만 제3자에겐 아주 무심한 사람으로 비쳤겠지요." ―원장님은 왜 안과 의사가 되셨습니까. "아버님이 '이걸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세브란스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뽑힌 상태였는데, 한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집안일인데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는데 마음에 걸렸어요. 안과로 바꿨지요." ―아버지가 반기던가요. "'진짜 할래? 쉬운 길 아니다'라고만 하셨지요. 내심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1980년에 공안과를 인계받았지요. 저희는 선진국 기술과 장비를 배우고 도입하는 데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을 환자에게 시술하는 데는 보수적이에요." ―올해가 80주년인데 감회라면. "관성에 의해 '이 길밖에 없지 않나' 하면서 지나온 것 같습니다. 지금 의료계가 굉장히 열악해요. 제 자식을 포함해 아버님 손자·손녀 중에는 안과 의사가 없어요. 의사들 사이엔 '넌 아직도 아픈 사람 고쳐?'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습니다. 의료 수가(酬價)가 너무 낮아 굶어 죽게 생겼으니 안 해도 되는 치료를 권하는 거예요." ―눈이 혹사당하는 시대인데 안과 환자에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옛날보다 작은 글씨를 많이 보고 있기는 합니다. 눈이 침침하다며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의료보험으로 병원 문턱이 낮아져서 그렇지, 환자 패턴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안구건조증이 늘지 않았나요? "그 병명을 호소하는 사람만 많아진 거예요. 냉난방 기계가 보급돼 실내가 건조해진 탓입니다. 진짜 안구건조증은 10%고 나머지 90%는 의사들이 만들어낸 환자예요. 그렇게라도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병원이 넘어지니까요." ―공병우 박사가 별세하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조의문으로 뒤덮였습니다.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고요. "사후 기증된 두 눈 가운데 한 눈은 제가 공안과에서 환자에게 이식했어요. 2년 전까지는 그분을 직접 진료했지요. 뵐 때마다 아버님을 다시 만난 것 같았어요. 그분은 112년 된 눈을 쓰고 계신 겁니다." 공병우 박사는 세 번 죽었지만 눈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부친이 남긴 가장 큰 지혜는 무엇일까. 아들은 평안도 말투로 답했다.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어요. 나이 들어 보니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다들 근심 없이 편안한 삶을 바라지만 그것이 제대로 사는 길은 아니라는 거예요." 쉬운 건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 타자기 1. 개요 타자기(打字機 , typewriter)는 데스크탑과 랩탑을 쓰기 전에 쓰이던 입출력기의 일종이다. 한마디로 키보드의 조상. 글자판의 키를 눌러 종이에 글자를 찍는 기계로 컴퓨터 시대 이전에 자필로 힘들게 문서를 작성하거나 일일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대신 해 주는 도구였다.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에도 '글자 쓰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당연히 있었다. 1829년 윌리엄 오스틴 버트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타이포 그래퍼'라는 입력도구를 발명하여 특허권을 받아 서류상 세계 최초의 입력도구를 발명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키보드 입력이 아니라 다이얼로 입력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손으로 쓰는 것보다 느렸다. 상품으로 제품화된 입력도구는 1865년 덴마크의 발명가 라스무스 몰링 한센(Rasmus Malling-Hansen)이 청각 장애인을 위한 도구로 쓰기공(Skrivekugle, Writing Ball)이라는 도구를 개발하였다. 현재와 같이 키보드로 입력하는 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크리스토퍼 L. 숄즈(Christopher L. Sholes, 1819~1890)이다. 1868년 6월 23일에 미국 특허권을 인정받는 숄즈는 당대 최고의 실업가인 딘스모어와 요스트에게 1만 2000달러를 받고 타자기의 특허를 팔았다. 숄즈의 타자기는 레밍턴 사(社)에 의해 1874년에 세계 최초로 상업적인 목적의 타자기로 생산, 판매되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무 목적으로 필경사를 고용하곤 했는데, 이들을 싸게 고용할 수 있는데다 손글씨도 깨끗해서 굳이 대체할 필요성이 없어서 보급은 생각보다 느렸다. 하지만 결국 필경사를 완전히 대신하여 이후 20세기 말까지 널리 쓰이던 인쇄 도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21세기 들어서는 컴퓨터에 밀려서 사실상 사라졌고 신설동 및 황학동에서 골동품으로 만날 수 있지만 대개 어느 한 기능이 작동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모든 기능이 다 작동되는 것들은 드문 편이다. 타자기를 수리하는 곳은 아직 몇군데 남아있지만 수리비용이 중고가와 거의 비슷할 정도다. 해외에서는 수동식 타자기와 전동식 타자기를 계속 생산 중이기 때문에 해외 직구로 신제품 영문 타자기를 구매할 수 있다. 중고제품도 해외 직구가 국내보다 오히려 저렴하다. 물론 한글 타자기를 구하려면 국내밖에 없다. 잉크리본은 전동식이든 수동식이든 아직은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구매할수 있다. &&&&& 3월 새학기에 서울 S고등학교로 왔다. 그 뒤, 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서 정주 선생 추천으로 시문학이라는 잡지로 등단을 하였다. 마침내 시인 면허증(?)을 얻었으니 제가 상경한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이제 제 꿈을 이룬 것이다. 그해 겨울 어느 제 운명의 길을 바꾸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한산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J 선생이 서울 제 자취방으로 놀러 왔다. 그의 소개로 저는 공병우 한글타자기를 6개월 월부로 샀다. 타자 연습을 매일 하려고 안 쓰던 일기까지 꼬박꼬박 매일 썼다. 글쇠가 닳아서 홈이 푹푹 팰 정도로 부지런히 타자 연습을 했다. 타자기의 편리함에 감탄하여 ‘전화와 한글타자기’라는 제목으로 타자기에 관한 글도 발표했다. 1976년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유니온타자기판매상사 한 민교 사장으로부터 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 병우 박사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밖의 전갈을 받았다. 며칠 후 물어물어 종로구 서린동 111번지 공안과 안에 있는 '공 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로 갔다. 말이 연구소지 아무 치장도 없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작은 방이었다. 그 썰렁한 방에는 연구원 한 명이 타자기 활자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공 병우 박사였다. 저는 잔뜩 긴장하여 인사를 드렸다. 공 박사는 반갑게 악수를 청한 뒤에 입가에 어린이 같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반갑수다. 지 선생께서 밥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학교를 그만두고 잘못된 한글 기계화 정책을 바로 잡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앞이 캄캄하였다. 이 말을 어느 사석에서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딴 소리 한 것이 잘못인지, 잘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선뜻 시인도 부정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가 그 말을 한 적이 분명히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저는 겁에 질려 이렇게 대답했다. "네, 박사님. 제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오. 송 선생이 그런 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 연구소에 와서 저와 같이 한글 기계화 연구를 한번 해보시지 않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좋아요. 송 선생으로서도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히 생각한 뒤에 답변해 주시오." 저는 너무나 뜻밖의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저는 손재주가 얼마나 없느냐 하면, 전기가 나갈 경우 두꺼비집도 손볼 줄 모르고, 형광등 전구도 제대로 끼울 줄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한글 기계화를 연구할 수 있겠습니까?" "송선생,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 동안 내가 송선생이 쓴 글도 읽어 보았고, 또 송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는데, 송 선생 정도면 열심히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여튼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깊게 생각해 보고 답변해 주시오."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학교에 사표를 내고 공 박사 연구소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아내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면서 대번 반대하였다. 학교에 가서 친한 선생들에게 같은 의논을 하였더니, 역시 첫말에 반대하였다. 부산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 반대하였다. 다들 "공 박사의 연세가 일흔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만약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데, 왜 그런 모험을 하느냐'고 반대하였다. 여러분이 제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같은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데 송현은 한글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싸우다가 공박사가 돌아가시면 직장을 잃을까 봐, 직장을 잃으면 밥 못 먹을까 봐, 그딴 것을 적정을 하다니! 나도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젊은 때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해야지, 직장 떨어질까 그게 걱정이 되고, 그 직장 떨어지면 밥 못먹고 살까 그게 겁이나서 가치 있고 보람 있을 못한다면 송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멀쩡한 직장인 S고등학교에 사표를 내었다. 저는 공병우 박사에게 가서 공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학교에는 사표를 냈다고도 말했다. 공병우 박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저에게 고용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 송현 선생에게 월급을 어느 정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박사님, 제가 학교에서 받던 정도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 액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면 조금 적게 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적게 주시면 제가 일에 몰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매월 얼마를 받았습니까? --박사님, 어제 사표를 내었으니 이달 월급은 아직 못 받았습니다. 이것이 지난달 월급 봉투입니다. 저는 지난 달 월급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박사님께 내밀었다. 공병우 박사는 제 월급봉투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소! 이만큼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러면 고용 계약서를 씁시다. 잠시 후 공박사는 고용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공병우를 갑으로 하고 송현을 을로 하는 고용 계약서였다. 그 동안 이런 고용 계약서를 저는 한 번도 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줄 한줄 읽어나가는데 제일 먼저 걸리는 조항은 일년에 휴가를 7일 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타자수가 0을 하나 빠트린 오타인줄 알았다. 선생은 일 년에 거의 100일 가까이 노는 것을 감안하여 공병우 박사는 제게 70일을 휴가로 준다는 의미인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문장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오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대목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데 송현은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하고 일 년에 며칠 노는가를 따지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용계약서에 싸인을 덜렁 하였다. 공박사님도 싸인을 했다.. 먹지를 사이에 끼우고 친 두장의 고용 계약서를 서로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저녁 때 집에 오니 아내가 오늘 공박사와 일이 잘되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저는 고용계약서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고용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아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아내가 말했다. ---이것 봤어요? --뭘요? --일년에 휴가 7일 --..... 제가 말을 못하고 있자 아내가 입을 삐쭉이면서 말했다. --일년에 휴가가 7일이면 우리는 신혼인데 어디 여행도 하기 틀렸잖아요? --그러게...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용계약서를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마침내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울어요? 아내가 말했다. --보너스 준다는 말이 없잖아요! 보너스도 한푼 못 받으면 어찌 살아요. 일 년에 3백프로는 받아야 당신 구두도 하나 사고 제 스카프도 하나 살 건데요. 보너스 한푼 없으면 밥만 걱고 살아야 하는데... 아내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저는 아내를 달래면서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건 몰랐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아침에 박사님께 보너스 달라는 말을 하고 고용계약서에 삽입하게 할게요. 걱정 말아요. 정말 나도 그건 깜빡했어요. 박사님께서 그것을 거절할 리가 없어요. 학교에서 받던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했거든요. 그리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내가 내일 출근하자마자 그 대목을 삽입하게 할게요. 아내는 훌쩍이면서 말했다. --꼭 삽입해야 해요. 그러면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는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아내 새끼손가락과 걸고 굳은 약속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을 하자 말자 보너스 이야기를 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찬스를 잡아서 말해야지 하였는데 점심 때가 되도록 그 찬스를 잡지 못하였다. 점심 때가 되었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서 보너스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아서 점심 식사 후에 말해야지 하였다. 점심 식사 후에 보너스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더니 밥 숟가락 놓자마자 그딴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무래도 좀 거시기 했다. 그래서 나중에 오후에 적당한 찬스를 잡아서 거론해야지 하고 참았다. 오후에 일을 하는대로 마음은 온통 보너스에 가 있었지만 막상 말을 깨낼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때 보너스 이야기를 깨내야지 하고 박사님께도 갔더니 박사님은 타자기 부품을 놓고 열심히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박사님께서 지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는데 차마 내 보너스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쭈삣쭈삣하고 서 있는데 박사님께서 말했다. --일 끝났으면 퇴근하시오. 나는 엉겁결에 말했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그럼 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였다. 아내에게 선수를 쳤다. --미안해요. 오늘 첫날이라서 일이 바빠서 그만 깜빡 잊었어요. 내일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반드시 보너스 조항을 삽입해 올게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그 무렵 아내에게 거짓말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내는 제 연기에 속았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지례 포기를 하였는지 아무 말도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날 밤 아내는 잠자리에서 두 번이나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강요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 뒤 박사님과 약 이십년을 함께 일을 하고, 마침내 박사님이 돌아셨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또 십오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저는 보너스 문제를 말하지 못했다. 저는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랐다. 어릴 때 가장 많이 본 것이 매일 머슴이 온 종일 일하는 것과 소가 온 종일 묵묵히 일하는 것과 우리 부모님이 일하는 것이다. 그래 그런지 나는 2년 동안 연구소에서 머슴처럼 소처럼 일을 했다. 어느 날 공병우 박사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다. “송 선생, 내가 이년 동안 송 선생을 지켜보았습니다.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용기 있게 싸우기도 잘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이런 송 선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일부터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와 타자기에 관련된 모든 것들 다 맡기겠습니다.” 저는 뜻밖에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의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그때 제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그 뒤로 공박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떤 때는 스승으로 어떤 때는 자판투쟁의 동지로 이십여 년을 함께 일했다. 공박사가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난 뒤 한글문화원을 열고, 다음 단계로 공병우기념관 건립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공병우 박사를 모시고 한글 기계화에 관한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저는 시인이라는 면허증만 따놓고 개점휴업을 하는 바람에 문단에서는 시인으로 미아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시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으니까 명함은 물론이고 어디에 가나 저를 소개할 때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을 좋아한다. 저는 한글기계화와 한글의 발전을 위해서 제딴에는 일을 제법 많이 했다. 청와대와 싸우고,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비판하는 글을 쓰고, 책을 집필하고 방송에 나가서 비판을 하는 등 제딴에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서 저는 죽으면 우리 아버지 밑으로 가지 않고, 세종대왕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 세종대왕 밑으로 갈 사람을 여러 분 뽑아놓았는데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뽑혀 있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그래, 잘 되었어. 너는 내 밑에 오지 말고, 세종 대왕 밑으로 가거라”라고 하면서 좋아하실 것 같다.. *필자/송현.시인.한국인문학대학 석좌교수. 칼럼니스트 &&&&&&&&&&&&&& 공안과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2 인주빌딩4층 지극히 속도와 효율을 중요시 여겼던 사람이었다. 타자기는 빠르게 치기 위한 도구인데 글자 모양이 어떻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시중에서 원하는 타자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업적은 한글을 가로 모아쓰기 형태로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병우 타자기는 군에서 꽤나 많은 판매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군대에서 저도 정보작전병으로 문서 작성을 신물나게 했었는데 이러한 타자병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공병우 박사님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군에서 워드 좀 쳤다는 분 꼭 읽어보시길^^) 정전협정은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평더화이) 사이에 맺어졌다. 정본(正本)은 공병우 타자기로 만들어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평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 공 원장은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그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며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고 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공병우 타자기가 들어갔나요. "6·25 직전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고 시제품 3대를 만들었는데 아버지와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 언더우드 3세(원일한 박사)가 각각 사용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6·25에 참전해 정전협상 땐 유엔군 통역장교였다. 급히 아버지를 찾아와 한글 타자수 두 명을 구해 갔다." ―타자기가 공을 세웠다. "영문 타자기보다 빨랐으니,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글자 모양이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꼴이라는 타박도 쏙 들어갔어요. 우리가 매번 신속하게 처리하니까 북한 측이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맸대요." 당시에는 초성, 중성 입력 후 종성이 올지, 아니면 다시 초성이 올지 사람이 판단해야 했지만 이 보류식은 그 다음에 오는 모음을 통해 그 앞에 자음이 종성인지, 다음 글자의 초성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개발해 낸 것이다.. 즉, 현재의 2벌식과 가장 유사하게 입력 방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2벌식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타자기 시대 이후 컴퓨터로 전환되면서 한글 입력체계의 근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게 무려 1961년이라고 하니 약 20~25년 이후 국내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에 근간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공병우 박사의 3벌식은 자꾸만 입지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빠른 것도 좋았지만 표준은 때론 다르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국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가 1988년에 한국으로 들어온 후 한국문화원을 만듭니다. 그곳에서 탄생한 프로그램이 바로 현재의 한글 1.0 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무실도 내주고 후원도 해주고, 우리가 이렇게 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현재도 많은 기관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수많은 글꼴(폰트)들이 생겨나고, 훨씬 더 다양한 형태의 문서 작성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절까지 수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블로그도 쓰고, SNS로 매일매일 소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번쯤 이러한 역사를 되짚어보면 좋겠다는 뜻에 공유드립니다. |
서기 1954년도에 태어나서
1961년에 집에서 약 3 킬로 떨어진 곡송국민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 3월에 김천 금릉 (현 중앙)중학교 입학하고
1970년 3월에 김천고등학교( 일명 김천고보 )에 입학하였다.
1974년 3월에 울산공대 입학하여 1978년 2월에 졸업하였다.
1978년 5월- - - 1980년 8월 군복무
1081- 1986년 련대중공업
1986년 부산에서 1년 생활
1981-- 2014년 김해서 28년 생왈
2014년 김천으로 이사함
1961년 9월 13일의 '정부 공문서 규정'에서도
문서는 한글로 띄어서 가로 쓰며
...다만 법규 문서는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경우에 한하여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서 쓴다.
와 같이 法規 文書에서 괄호 안에 한자를 쓸 수 있게 하였다.
1963년 2월 15일 제정 공포된 제2차 敎育 課程에서 한자 교육의 근거가 마련되었고,
1964년 새 학기부터는 국민학교 600자, 중학교 400자, 고등학교 300자의 범위 안에서
한자 교육을 부활시켰으며 1965년도 이후의 교과서는 한자를 노출시켜서 편찬되었다.
1968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글 전용 촉진 7개 사항'을 지시하였다.
여기서는 1948년의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의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但書를 빼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漢字가 든 書類의 接受를 금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정책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7항에서는 '고전의 한글 번역을 서두를 것'을 지시하였다.
이어서 11월 17에는 常用漢字까지 廢棄하였다.
지금까지의 한자 사용을 허용하는 부대 조건를 청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1968) 해 12월 24일의 '한글 전용에 관한 총리 훈령'에서는
다만 한자가 아니면 뜻의 전달이 어려운 것은
괄호 안에 상용한자의 범위 안에서 한자를 표기해도 무방하며,
1970년 1월 1일부터는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한다.
고 하여 완전한 한글 전용을 1970년 1월 1일부터 시행하는 것을 못박았다.
이와 함께 1961년 9월 13일의 閣令 제7조 1항 "다만 법규 문서는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경우에 한하여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서 쓰다"는
단서를 폐지하도록 규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總理 訓令으로 漢字 倂用 허용은 1970년 1월 1일부터
모두 없어지는 것으로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1969년 1월 15일, 1970년부터 등기와 호적의 한글 전용을 지시한
국무 총리의 '서석 정비 지시'에서는 姓名과 法人 名稱 및 數字는 現(당시) 등기부와 호적의 記載대로 하도록 하여 한자의 完全 排除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한글 전용 추진은 계속되었다.
1969년 9월에는 敎育課程令 中 改正令을 공포하여
(1963년 2월 15일의) 한자 교육의 근거를 없애고 敎科書에서 모든 한자를 削除하였다.
학교에서는 漢字 板書까지 금했다.
그러면서 한자를 지도는 漢文科로 넘기게 된다.
1971년 12월 당국이 다시 漢文 敎育을 하기로 하고
1972년 2월에 敎育令 施行令을 改正하는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다시 번복된다.
1974년 7월 11일에는 문교부가 中·高等學校 敎科書에서의
한글․漢字 倂用 방침을 결정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부터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다시 한자가 쓰이게 되었다.
다만 國民學校에서만은 한자가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한자 폐지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한쪽에서는
국민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을 촉구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계속 저지하려 하고 있다. 건의(서), 성명(서), 진정(서) 사태가 계속되어 왔다.
요컨대 한자 폐지와 한글 전용이 우리 文字 政策의 基調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한자의 완전 폐지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자 교육은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려 왔다.
(2) 政策과 社會 現實의 乖離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하는 문제는 정부 기관의 공문서나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일반의 문자 사용의 문제인 것이다.
한글 전용이거나 국한 혼용이거나를 막론하고 사회에서 그 한 가지가 실시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그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정책이나 교육이 아무리 한 가지 원칙에 의해서 행해지더라도 사회가 호응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교육도 소용이 없다.
한자 폐지와 한글 전용을 위한 法律이나 規程도 이와 같은 것을 의식하고,
조항을 만들고 있다.
1945년 12월 8일 朝鮮 敎育 審議會가 의결한 한자 폐지와 橫書에 관한 사항 중 '한자 폐지 여부에 관한 일' 제5조
위의 4조와 같은 의미에서 사회 일반, 특히 보도 기관, 문필가, 학자들의 협력을 구할 것
이라 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형편이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한자 폐지·한글 전용 여부의 문제는 아직도 懸案의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1948년 8월 6일 문교부에서 발간한 '한자 안쓰기의 이론' 머리말에서도(밑줄 필자)
이 중에도 가장 중대한 의의를 가진 한자 안쓰기의 정책이 교육 행정에서 뿐 아니라,
국가 행정 및 국민 생활의 전면에 걸쳐 완전히 실현되어,
새 나라의 문화 발전과 국민의 복리 증진이···
와 같이 이 문제에 언급하고 있다.
장관 명의로 된 머리말에는 誇張이 적지 않게 있기는 하지만 밑줄친 부분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정책이나 교육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1957년 12월 6일 국무 회의에서 의결한 '한글 전용 적극 추진에 관한 건
"제 6항에
각 관공서는 그 소할 감독 밑에 있는 사사 단체에 대하여도 위의 각 항목에 따르도록 한다.
고 하여 정부나 공공 각 기관에서 모범을 보이고
사사 단체도 거기 따르도록 권한다는 한글 전용 시행 범위를 명시하고 있다.
1962년 2월 5일 문교부 한글 전용 특별 심의회의
'한글 전용에 대한 운영 방안' 첫째 항에서
···현재 간행되고 있는 신문, 잡지들을 비롯하여 대중성을 띤 각종 간행물에서
한자어(일본식 한자어 포함)들을 뽑아
이를 전문 위원들로 하여금 순수한 우리말 또는 우리말식 용어로 바꾸어서···
한 것도 신문이나 잡지 기타 간행물에도 한글 전용을 하도록 작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자어를 다른 말로 대체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량
매체에서의 한글 전용을 노린 것은,
한글 전용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의 성격을 바로 파악한 현명한 처사였다.
1962년 5월 11일 '한글 전용 특별 심의회, 제3차 전체 심의회 의결안'에서는
우리의 일반 국민 생활에 쓰는 글은 모두 한글로 쓴다.
고 하여 정부 공식 문서나 교과서가 아닌 일상의 사회생활에서 한글 전용이 시행되어야 함을 보이고 있다.
1968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전용 촉진 7개 사항' 지시 제4항에서
언론·출판계의 한글 전용을 적극 권장할 것.
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文字 政策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언론이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1967년 12월 韓國 新聞 協會에서 제정한 常用漢字 2,000字의 사용을 권장하였으며 거의 모든 신문이 한자를 여전히 사용했다.
某 신문이 한글을 전용하다가 다시 한자 사용으로 되돌아간 일이 있거니와,
언론이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선 구독자의 경향, 기호를 무시할 수 없으며 특히 언론은 언론 나름으로
한글 전용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漢字의 속성 같은 것이 있다고도 생각이 된다.
여하간 그것이 사회의 요구라면 언론은 한자를 못 버린다.
그 요구가 정당하고 현명한 것과는 별 문제다.
이런 사회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책이 무리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정책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사회가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나 사회 일반에서 한자를 계속 사용하게 만든 데는
정책 당국도 한 몫을 하였다.
첫째, 대개의 법령이나 규정이 한글 전용을 천명, 확인,
강조하면서도 한자 사용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
둘째, 여론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지만,
때때로 교과서에 한자를 사용하도록 하거나 교육 과정에서
한자 교육의 근거를 마련한 것
셋째, 常用 一千 漢字表, 臨時 制限 漢字 一覽表, 敎育用 基礎 漢字,
中學校 漢字 敎育用 制限 漢字 등의 제정 공포
넷째, 中高等學校에서의 漢字 敎育 등이다.
특히 臨時 制限 漢字 一覽表는
常用 一千 漢字表에 300字를 더한 것이며
言論 機關을 겨냥한 漢字 制限이었는데 결국 언론이 한자를 사용하게 만든 셈이다.
만일에 한자는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런 상황이 해제되기까지 무리한 한자 폐지를 해서는 아니 되며
서서히 자연스럽게 시행할 일이다.
(3) 漢字 敎育의 浮沈
한글 전용이라는 정책 기조를 견지하면서도 漢字 敎育은 계속 논의되는 형편이었다.
어떤 때는 한자 교육을 하기로 하고
또 어떤 때는 안 하기로 하고 자주 번복되는 양상을 보여서 정책의 일관성을 잃었었다.
光復 후 한자 전용에 관한 법률까지 제정 공포하면서(1948. 10. 9.)
1년 뒤인 1949년 11월 5일에는
국회 문교 사회 위원회에서 敎科書의 漢字 使用를 議決하였다.
다시 1963년 2월 15일 새로 재정 공포된 제2차 敎育 課程에서는
국민학교 4학년을 '읽기'에서
일상생활에서 쓰는 한글과 한자, 숫자, 로마자와의 구별을 알도록 한다.
고 하여 결국 한자를 교육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1964년 9월 1일 신학기부터
국민학교 600자, 중학교400자, 고등학교 300자의 범위 안에서
교과서에 한자를 노출시켜서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 교육 과정에 의해서 개편된 1965년도 이후의 국어과의 모든 교과서는
이 범위 안에서 한자를 노출하였다.
그러나 1970년 1월 1일부터의 한글 전용을 위한
1968년 10월 25일자 박정희 대통령 지시 '한글 전용 촉진 7개 사항' 제6항에서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앨 것을 지시하고 있으며
1969년 9월 '敎育課程令 中 改正令'에서,
(1963년 2월 15일의) 한자 교육의 근거를 없애고 교과서에서 모든 漢字를 삭제하였다.
1970년 새 학기부터 한자 없는 교과서를 사용하게 되어 국민학교에서는 명실상부한 한글 전용 교육이 촉진되기에 이르렀다.
板書에서까지도 한자를 금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1971년 12월에는 다시 漢字 敎育을 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1972년 2월에 敎育法 施行令을 개정, 6월에는 文敎部 選定 敎育用 基礎 漢字 시안을 발표하고 1972년 8월 16일에는 漢文科 敎育 課程 審議委員을 거쳐서
中學校 漢文 敎育用 制限 漢字 1,800을 확정 공포하였다.
中學校 900, 高等學校 900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指導上의 留意點은 다음과 같다.
1. 인명, 지명 등 고유 명사는 이 기초 한자에 관계없이 지도한다.
2. 학습 효과를 위하여 부득이한 한자는 추가하여 지도할 수 있으나
(가)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학습 대상, 한자 수의 약 1할의 범위로 하고
(나) 추가된 한자는 입학 시험의 평가 대상에서 제외한다.
(다) 1자가 둘 이상의 음과 체를 가진 것은 그 하나만 취하였으나,
실제 지도에 있어서는 다 지도한다.
일반 교과의 교과서에는 한자를 모두 없애면서도
독립 교과로 漢文을 교육하게 되어 사실상 한자 교육은 더 體系的으로 하게 된 셈이다.
1974년 7월 11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다시 한자 倂用을 하도록 하는 방침을 결정 발표하였다.
1975년 3월부터 실시하였고 국민학교는 제외되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은 한글 전용 정책과 연관되어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4) 確固한 基盤의 缺如
당국의 한자 폐지와 한글 전용 정책은 광복 직후의 국민적·민족적인 감격으로 더해진
우리 言語·文字에 대한 愛情이 크게 작용한 까닭으로 성급하게 결정된 감이 없지 않다.
정책이 결정되던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하거나,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결정하게 할 만한 科學的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할 만한 것으로 첫째,
현재까지도 그와 같은 근거를 제시할 만한 연구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
둘째, 광복 후 45년 동안 표면상으로는 한자 폐지와 한글 전용을 표방하면서도
많은 법령이나 각종 규정이 한자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는 것
셋째, 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당국이 일관된 태도로 엄하지 못하고
넷째, 사회에서 한자 사용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한글과 한자 혼용을 인정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결정되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전에 충분한 연구와 실험이 행해지고 어느 쪽을 택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근거가 되는 객관적인 資料를 얻고 거기 대한 국민들의 최대의 동의를 얻어서 정책이 결정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자를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하자는 측과,
한자 폐지를 반대하는 측은 數的으로나 자기 관점을 주장하는 論理로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태이었다고 생각이 되거니와 이러한 문제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결정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한자 폐지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났고
당국도 여론에 밀려서 右往左往해 왔다고 생각된다.
현실적으로 漢字의 사용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다.
同一人이 쓴 文章을 시대별로 조사해 보는 것도 이것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특별한 조치 없이 내버려 두어도 한자 사용이 감소되는 경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앞으로 이 문제를 정책으로 결정하려면 철저한 연구를 앞세워서 政策 결정의 確固한 基盤을 마련해야 한다.
Ⅲ. 漢字 廢止의 論理
한자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한자와 한자 사용의 不利한 점이나
그 弊害를 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한글과 한글 전용의 利點이나 그 當爲性을 들고 있다.
1. 漢字와 漢字 使用의 問題點(5)
(1) 學習의 어려움
한자는 배우기가 어렵다.
한자는 원칙적으로 一字一語다.
따라서 指示해야 할 對象, 表現해야 할 내용이 새로 생길 때마다 새 글자가 필요하다.
(6) 한자의 수는 현재도 너무 많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는 앞으로도 한자는 제한 없이 늘어난다.
따라서 필요한 만큼의 한자를 모두 배우는 일은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자는 劃이 많아서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쓰는 것도 쉽지 않다.
劃 하나가 더 있거나 덜 있거나 해서 전연 다른 의미의 文字가 되므로 그것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이 밖에도 한자가 배우기 어려운 文字라고 여겨지는 근거로는 字體가 다양하며
一字 多音 多意가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異字 同音이 많다. 類意字가 많아서
그 미세한 의미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도 어렵다. 音도 意味도 다르지만
아주 酷似한 字體도 한자를 배우기 어렵게 하는 요소의 하나가 된다.
결과적으로 한자의 學習과 使用은 비교적 많은 時間과 精力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모든 국민이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익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아가서는 한정된 시간과 정력을 한자 배우기에 너무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科學이나 技術 교육에 할당되어야 할 시간 정력의 소모가 크다.
따라서 학문이나 기술의 振興 發達을 도모하고 최첨단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한자의 사용은 지양해야 한다.
한자를 폐지하고 극소수의 한글을 전용하면 이와 같은 한자 사용의 폐단이 해소되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학문과 기술의 발달을 위하여 쓸 수 있다는 것이다.
(2) 使用하기 어려움
字數가 많고 劃이 많으며 字體가 다양한 데다 音과 意味 關係가 다양하고 복잡하여 한자를 배우기 어려운 글자라고 한다면, 이는 곧 사용하기 어려운 글자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선 書寫하기 어렵다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印刷하기 어렵다거나 機械化하기 어렵다는 것을 포괄한다.
文字 사용의 機械에의 存在度는 특히 文字에 의한 大量 전달과 迅速成을 중요시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극히 높은 것이다. 이를 위하여 機械化에 편리한 文字 體系가 필요하거니와 漢字는 앞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短點으로 해서 기계화에 많은 불편이 따르고 많은 제약을 받는다.
이에 비하면 한글은 書寫하기 쉽고 기계화하기가 편리하다.
재래식 방법에 의한 活版 印刷도 한자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편리하다.
1980년대 부터 컴퓨터의 사용이 일반화되면
될수록 문자의 기계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앞으로는 必須的인 文字 生活이 될 것이 짐작된다.
(3) 表記 手段으로서의 不適合成
한자는 원칙적으로 表意 文字다.
그것은 거의 中國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른바 孤立語라고 하는 中國語를 표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一字一語라는 특성을 가진 한자가, 중국어와는 구조가 다른,
한국어의 표기수단으로 不適合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해 보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흔적으로 誓記니 鄕札·吏讀니 하는 것이 남아 있다.
表意 文字를 부분적으로 表音 文字化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는 表意 文字가 아닌
表音 文字가 適合하기 때문이다. 부적합한 表意 文字인 한자를 계속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韓國語의 發達에까지 障碍 要因으로 작용한다.
한글은 근본적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자가 가지는 것과 같은 한국어 표기 수단으로서의
不適合性이 없는 表音 文字인 한글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이른바 文字 發達史에서 한자 폐지의 근거를 찾는 경우도 있다.
문자는 대체로 繪畵 文字(表文 文字)ꠏꠏꠏ 表意 文字(表語 文字)ꠏꠏꠏꠏ表音 文字와 같은 발달 과정을 거쳤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과정으로 보아 한자는 한글보다 한 단계 뒤진 문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보다 한 단계 앞선 表音 文字인데 하필 한자를 사용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다.
요컨대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부적합하고 이와는 달리 한글은 가장 적합한 표기 수단이며 先進的인 문자이기 때문에 한자는 폐지되어야 하고 한글이 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表記 手段의 二重性
한자가 한글에 비해서 학습하기 어렵고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모든 국민이 그것을 충분히 익히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그것을 배우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옛날의 우리 조상들이 그러했다.
士大夫 계층에서는 漢字·漢文을 배워서 그것으로 文字 言語 生活을 했고
立身 出世의 手段으로 삼았지만 일부 계층에서는 전혀 문자를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다음에는
한자·한문을 배우는 계층과
소위 諺文을 배우는 계층이 구분되었다.
한글은 그만큼 시간이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은 사람도 배울 수 있었으나
한자 한문은 그렇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漢字·漢文은 특권층의 專有物이고 보면
계층 간의 차별을 야기하고 한자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文盲이 될 수도 있다. 한글이 없을 때는 몰라도 이제 우리말을 표기하는데
적합한 한글이 있고 그것을 전용해서 부족한 것이 없으니 한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民主的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관점을 달리해서,
오늘날 한글을 버리고 한자만을 사용한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한자를 사용한다면 한글·한자의 混用을 의미하는데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두 가지 이질적인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言語生活의 二重性을 가져오고 言文一致를 저해한다. 이런 것도 한자를 폐지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2. 民族的 自主와 愛國 愛族
(1) 民族的 自矜
세종대왕이 訓民正音을 창제한 후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민족적인 자랑이다.
그리고 한글은 세계적으로 類例를 찾기 힘든 좋은 문자다.
그 좋은 문자가 만들어진 지 半世紀가 넘었는 데도 아직 한자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이며 자존심에 험이 가는 일이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 여러 가지 생각할 것 없이 한자 사용을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싹이 텄다고 생각되지만
특히 日帝 식민지 36년이 가져다 준 민족적인 굴욕을 맛본
우리 국민들의 일종의 반발로서, 光復 이후 더욱 분출되었다.
우리 국민이나 민족의 感情 그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국어 사랑이 나라 사랑이라고 하는 標語를 학교마다 써서 붙일 정도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한글을 사랑하고 그것을 전용하는 것이 愛國 愛族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民族的 宿願이며 國民의 輿望이다.
(2) 文化의 主體性 確保
한자 한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의 형성이 채 되기도 전이다.
어떻게 보면 한자 한문은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보다
한자·한문의 문화가 우리의 문화가 이질적인 문화의 혼합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자가 없어서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나타 내지 못하여
중국 글자인 한자로 표기하도록
신라시대 설총 같은 분은 한자로 이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漢字·한문의 문화는 우리의 것보다 우월하여
우리로 하여금 事大 崇外의 사상을 가지게 했고
결과적으로 固有의 思考 方式이나 哲學 科學 등 학문의 발전을 저해했다.
우리는 이제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전용함으로써
民族的인 主體性을 確保하고 우리 고유의 思想을 고취하며,
고유의 學問, 고유의 藝術을 振興하여 民族 文化를 꽃피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전용하자는 운동은 우리의 民族 文化 運動이다.
한자를 버림으로써 그것이 끼치는 文化的인 惡影響을 떨쳐버리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思考는 國語 敎育에도 크게 작용하여 무조건적인 國語에의 溺愛,
國語 國子에 대한 自慢 등 부작용을 낳게 하였으나 그런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국민적 공감대는 아직도 건재하다.
Ⅳ. 漢字 廢止 反對의 根據
한자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한글과 制限된 漢字의 混用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 많은 한자를 아무 제한 없이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1. 漢字의 屬性과 漢字 使用의 便益
(1) 强한 造語力과 槪念語 新造의 適性
한자는 表意 文字이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많다.
둘 이상의 한자를 결합하여 合成語 내지 複合語 등을 신조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말하자면 한자는 造語力이 매우 크다.
그리고 學問이나 技術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槪念이 계속적으로 생기는데
그것을 지시하는 새로운 槪念語를 신조하는 경우
한자가 매우 생산적일 뿐 아니라 한자 그 자체의 속성이 개념어를 만드는 데 매우 적합하다. 따라서 한자는 학술 용어 신조에 편리하며, 심지어는 한자를 쓰지 않으면 科學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한자 배우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기 때문에 과학 기술의 진흥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는 한자 폐지론과 좋은 대조가 된다.
(2) 意味 解釋의 利點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일은 그 語源이나 의미를 파악 이해하는 데 많은 편의를 제공한다. 한자로 표기하면 象形은 상형대로 會意는 회의대로 그리고 諧聲은 해성대로 모두 그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利點을 얻을 수가 없다.
한자가 지니는 심오한 의미 기능과 전달 기능을 살려서 효과적인 文字 生活을 하기 위하여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해야 한다.
한자에 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複合語나 合成語의 경우 그 자체는 처음 대하는 것이라도
그 成分인 漢字를 앎으로 해서 당해 語詞의 의미가 용이하게 파악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한자가 表意 文字인데다 그 구성 요소 또한 특정 의미나 발음과 有關한 데서 얻어지는 利點인 것이다.
(3) 類意語에 의한 表現性의 豊富
한자에는 의미가 유사한 많은 글자들이 있다.
한자 玉篇을 뒤져 보면 한 部首에 얼마나 많은 글자들이 있는지 알 것이다.
言 語 話 談 議 論··· 그리고 이들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語詞들,
얼마나 많은 유의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類意字 내지 類意語가 많지만
그들이 지시하고 표현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서로 공통된 부분을 가지면서도 각각 섬세한 차이가 있는 의미가
각각 다른 글자 다른 語詞와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한 언어의 豊富한 表現性이라는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가진 많은 한자를 적절히 결합하여 꼭 표현하고자 하는 섬세한 의미의 語詞를 신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자어들은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의미의 표현·전달이나 해석이 잘 된다.
이러한 利點을 가진 한자를 폐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4) 同音 衝突 回避와 視覺的 效果
한자에는 同音字가 많다. 이들을 한글로 표기하면 동음 충돌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문맥에 의해서 그럭저럭 의미를 분별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자를 적으면 音과는 관계없이 視覺的으로 그 의미가 즉각 파악될 수 있다.
또 제한된 한자를 사용하여 한글과 혼용하면 중요한 부분을 한자로 표기하는 등의 視覺的인 효과를 얻어 신속히 文章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서양 사람들은 大文字 小文字 印刷體 筆記體 또는 고딕체 이탤릭체 등에 의해서 視覺的인 효과를 내어 表現·傳達과 理解를 돕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지만 한자를 적절히 이용하면 그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로 표기해서 의미가 혼동될 염려가 있는 부분, 또는 의미의 전달이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부분을 한자로 표기하여 효과적인 전달·이해의 기능을 증대시킬 수 있다.
2. 文化的인 觀點
(1) 우리 文化에의 同化
한자가 중국어의 표기 수단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서 사용된 지 二千 年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는 계산이 된다.
처음 한자를 받아들일 때는 漢文을 만드는 성분이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漢文이 아닌 漢字語를 표기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자어는 그 기원이 중국에 있거나 아니면 우리들이 만들었거나를 막론하고
이제는 必須不可決의 韓國語의 語彙 項目들이다.
한자 폐지와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한자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현재로서는 국민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을 가지고 대립해 있다. 한편에서는 한자의 교육이 국민학교에까지 확대되기를 촉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攻防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글 전용과 한자 폐지를 정책 기조로 삼은 지 45년,
이 문제는 장차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를 지을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중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포함되거나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현재로서는 어떤 주장도 충분한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연구하고 반복 실험한 결과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따라서 감정 섞인 논쟁이나 진정(서), 건의(서), 성명(서)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정책 결정 당국은 믿을 만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 얻어진 자료에 의해서만 정책을 결정하거나 변경할 것이며,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기호나 집착으로 성급한 결정을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개인이나 집단의 주장, 진정, 건의, 성명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넷째, 당국은 이 문제의 연구를 위하여(양측과 합의하면 더욱 좋고) 개인이 아닌 기존 연구 기관에 연구를 위촉하거나 새로운 연구 집단을 만들어서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은 공정한 연구를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국은 모든 것을 지원하여야 하고 편견이 개입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여야 한다.
다섯째, 대립 당사자들이나 당국이나 모두 최종 연구 결과에 승복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연구는 철저해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2020년 부터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어 많은 외국인들이 이 땅에 왔고
영어는 기본이고
독알어 프랑스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등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도 팔고 물건도 수입해서 사용하니 이제는 대한민국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살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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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듕귁(중국, 中國)이라는 단어는 나라이름이 아니다.
맹자(孟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혹은 목천자전(穆天子傳)의 수우중국(樹于中國)은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
시경(詩經)의 혜차중국(惠此中國)은 '나라의 중앙(수도)을 가르키는 말',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 '제왕이 계시는 도읍 가운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중국(中國) 경사야(京師也) '중국은 경도(京都), 수도(首都)',
요(遼), 북송(北宋), 금(金), 남송(南宋), 청(淸)도 자신의 나라는
'제왕이 계시는 중심의 나라', '제왕이 있는 곳을 지칭하여 중국'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자신의 국명을 사용할 때에는 대당(大唐), 대명(大明), 대청(大淸)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므로 단 한번도 국명, 나라이름으로 사용된 적은 없는 것이다.
하여, 근대 중국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를 다른 나라에서 국명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신해혁명(1911-1912) 후 1925년 7월 1일 쑨원(孫文, 손문)이
중화민국(中華民國, 약칭 중국)을 건국하면서 나라 이름으로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에 의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다시 건국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中國)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에 사용되던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훈민정음해례본, 언해본(諺解本))',
華夏: 듕국을 닐온 말이라.(화하, 선조판 소학언해),
등에서도 보듯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과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과거 그 어느때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세종대왕이 나라를 지칭하였다고 하였다면,
반드시 '나랏말싸미 명국(明國)과 또는 대명(大明)에 달아'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또한 1925년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에 사용되던 중국은
현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듕귁(中國)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으로 혼돈하면 안되는 것이다.
'듕귁(中國)은 황졩(皇帝)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라 썅땀(常談)에 강남(江南)이라 하나니라.' 이를 다시 해석해보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문자의 중심지인 한자문화의 중심지는 즉,
듕귁(中國)은 황제가 계시는 곳이며,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이라 한다.'
함으로써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한자로 적으면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
특히 해석을 할 때 '조선의 말소리는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과는 달아 서로 소통이 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조선 백성이 당시 명나라 황제, 송나라 사람 또는 명나라 언어,
송나라 말소리가 소통이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이를 대륙에 있었던 한자문화의 중심지인 강남(中國, 듕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이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 된다.
"어리석은 백성이 송나라 황제가 쓴 글을 읽지 못하여, 명나라 사람과 말소리가 소통되지 아니하여 내 이를 어엿비너겨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라고 이해를 해야할까?
아니면 훈민정음으로 서로 소통이 가능했을까?
함으로써 현대의 해석에서는 우리 조선도 '내가(세종대왕) 있는 이 곳이 듕귁(中國)이며,
도읍지 한양이 강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세종대왕도 대륙 한자문화의 중심지 사람들이 나라의 중심, 도읍을 듕귁(中國)이라 함을 배워 자신도 자신의 나라 중심을 듕귁(中國)으로 표현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있는 이 곳 듕귁(中國)에서
내가 쓰는 글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글자(이두문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의 표기, 경주의 남산신성비(591년), 6세기경 서동요, 혜성가, 설총이 신문왕(681∼691) 때 집대성, 하급관리의 행정문서, 민간에서 사용)가
서로 달라 새로이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라'로 해석해야 한다.
세종대왕이 살던 곳, 한양, 궁궐에는 왕족과 문인들이 한자를,
일반 중인(상민)들은 이두문자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왕과 문인은 "國之語音이 異乎中國"라 쓰고
"국지어음 이호중국"이라 읽어도 그 뜻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알 수 있었으나, 백성은 알 수 없으므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쓰고 읽으면 백성 또한 이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한자는 "語音"이라 쓰고, "어음"이라 읽으면서 "말씀"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고,
말소리는 "말씀"이라고 해야 했지만,
한자를 배우지 못한 중인, 백성들은 글자 "語音"의 뜻을 알 수 없었으리라.
함으로써 말소리 소통의 어려움이 참으로 문제였을 것이 자명하므로,
세종대왕이 고민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후에 왕이 "語音"이라 교지를 내리면,
"말씀"이라 표기하여 방을 붙였다고 이해되고 있으며,
글자(말씀)와 뜻(말씀), 말소리(말씀)를 동일하게 하여
왕과 백성간, 듕귁(中國)과 백성들이 사는 지역간 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였다고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현재 대한민국에는 왕도 왕족도, 양반도 없으므로
반드시 한자를 사용해야 하는 분야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말소리와 다른 한자가 아닌 같은 한글을 쓰고,
또 그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된다.
<역사적 사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훈민정음에서 밝힌 중국(中國)이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인 중국(中國) 또는 그 이전의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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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중국
234쪽~241쪽
훈민정음 속의 而乎中國을 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안의 술맣은 고을들의 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 땅에는 온통 명나라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而乎明國 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의 중심지이며, 황제(세종)가 계신 땅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가 중국말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불평하여 걱정하였고 뜻을 전하고자 해도 끝내는 뜻을 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내 이를 딸하게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는 것이니 문자를 습득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國之語音而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훈민정음은 위와 같은 머리말로 시작되고 있다.
이 문장의 맨앞줄에 나오는 국지어음이호중국國之語音異乎中國을 놓고
어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간에 각기 의견이 달라,
모이면 다툼질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이란 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연구,정리한 것을
1949년 이 단체가 한글학회로 바뀌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를 높여
현대어에 맞도록 바꾼 말일 뿐이며, 正音(발음부호)의 뜻을 왜곡시키려는 행태에서 나온 것이다.
28글자를 정리해 낸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글자의 자형에 있어서는
정인지(1396~1478)가 발문(해례문)에서
글자의 모양은 옛날 전자의 모양을 본떴고 소리를 따랐으나
자음은 일곱 가락에 어울리게 했다.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고 밝힌 것이나,
『세종실록』에
언문은 옛날 글자로서 새 글자는 아니다(諺文皆 本文字非新字也)
라고 쓰인 것만 보더라도 글자 자체를 창안한 것이 아니고
훈민정음 이전에도 이와 같은 부류의 글자는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세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40년쯤 지난 뒤의 군주였으므로
당시의 집현전 사람들 중에는
고려 말 조정으로부터 커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주변국,
이를테면 明나라와 琉球.倭.吳越은 물론 北宋과 南宋.東晉.哈丹을 비롯해
멀리는 大食國.蒙古.女眞.거란까지,
그리고 더 멀리는 서역(실크로드)의 여러 나라들과
상업과 문화(학문)의 교류가 빈번하면서도 문자와 언어가 다른 탓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는데,
굳이 조선 백성이 중국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중국 사람과 말이 꼭 통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조선왕조 안에는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조선이 대륙에 있으면서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거나 둘중 한 가지 설정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세종 당시에 중국이란 왕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나라이름이 아니라 큰 고을 중앙이란 듯을 가진 中州.中原.의 대명사로서,
군주가 있어서 각 고을의 군을 다스리는 일종의 고을 집합체이다.
군주가 다스리는지역을 묶어 큰 울타리(口)를 치고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고 방패로 막아 주기도 한다.
그것이 나라 國자가 만들어지는 유래가 되기도 하거니와
현대와 같은 국가의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많다.
현대의 국가란 영토와 국민과 이들에 의한 주권 등 세 가지가 충족되면 만들어 된다.
일정한 영토에 정주하는 다수인과 그들을 통치하는 통치조직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본래 국가라는 말의 어원은 stato에서 유럽에서는 도시국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국가(Nation)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15세기 이후 비로소 도시국가의 개념을 벗어나게 되었다.
도시국가 즉 stato에서 생각해 볼 때 국가라는 말은
대체로 동일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하기 시작한 근세국가의 명칭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고대 춘추시대 전후에는
노예제도로 국가형태가 마련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 시대에 오면서는 농노제에 의한 봉건국가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주의로 형성된 국가,
그 후 20세기에 들어와 나타난 사회주의 국가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성계가 중원을 차지해 중앙조직을 갖추고 팔방(八域,八道)의 영역을 관할지에 두자
중원을 비롯한 각 부의 고을이 안정되면서 규모도 확대일로로 발전하게 되고
각 고을 집단 취락지의 인구도 팽창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연히 중앙정부 조직과 하부조직간에 균열도 생기게 마련이고
마찰을 빚게 되기도 한다.
또 중앙과 고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심의 소외감도 생기게 되고,
이웃 고을과도 생조에 관련된 이해가 엇갈려 반목과 증오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각 고을에 두었던 村長이니 部長이니 君이니 하는 제도는
모두 이때(조선조) 생겨난 것이며,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會盟制度라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지방의 토호들이 세력을 키워 새로운 조정집단을 형성하게 되는데,
전국시대 때 영웅호걸의 출현은 군주제가 무너졌을 때 나온 것이다.
이 점을 우려한 중앙정부는 중앙정부와 회맹, 회맹과 부를 엮어
일사불란한 조직연결망을 가질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 문자는 조직을 묶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중앙정부→회맹→부 →촌, 거꾸로 촌→부 → 회맹 → 정부로 이어지는 의사전달의 매개체는
대개가 문자로 쓰인 문서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난 문제점이 문자의 해독에 관한 것이었다.
땅이 넓고 수많은 족속 집단으로 형성된 지방의 각 고을들이
제각기 문자를 표현하는 발음이 달라 일상 언어활동은
물론 공식문서에서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중앙정부로서는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집현전에 학자들을 모아놓고
문자(한자)의 음을 누구나, 어느 지방에서나 공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한 끝에 28글자를 만들어 모든 고을에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사안의 전말을 이해하면 훈민정은은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해할 수가 있다.
나라 안 각 고을마다 말하는 사투리가 심하여
백성들의 말소리는 서로 다르고 임금이 있는 조정의 말과도 통하지 않았다.
문자는 같은데도 문자를 나타내는 소리가 이곳저곳마다 달라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말로는 통하지 않아 뜻 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나라에서는
문자에 소리를 내는 부호를 새로이 정했다.
누구든 문자를 배우려거나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려거든
28자로 된 음법을 이용하면 쉽게 될 수 있을 것이니
먼 지방 사람들과도 같은 소리로 통하게 되므로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풀어 보면 훈민정음이란 문자는 문자대로
똑 같은 부호로써 쓰이게 되니 이는 바른소리(正音)요,
이것을 모든 백성에게 가르치자(訓民)는 뜻이 있다.
각 고을을 합쳐 중앙정부를 이루고 있었던 근세의 조선은 중앙에 있는 왕국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中原의 왕국.中州의 왕국.中朝의 왕국이라 할 수 있고,
또 다른 말로 이해를 돕자면 각 고을이 小華가 되고 소화가 뭉쳐져 中華가 되는 것이다.
즉 조선은 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소화가 모여 중화를 이룬 나라이므로 중화의 나라 중국이며,
중원.중주.중조의 나라 중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소화는 조선이요, 중화는 중국이라는 말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선을 꾸미면서 만들어낸 용어일 뿐
중화는 조선의 유토피아적 중용사상이었다.
『禮記』에 있는 조선(中國)은 1천7백여 개의 나라가 모여 있다는 말이
이를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종 때의 훈민정음은 최만리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로부터 저항을 받아
한때는 빛을 잃어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으나
실학의 實事求是기 보급되면서 훈민정음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에게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찌 되었거나 훈민정음 속의 이호중국而乎中國을 국지어음國之語音과 연계하여 보면
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나라 안의
수많은 고을들의 상호어음相互語音이 중원의 왕조어음과도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을 지금의 대륙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을 한반도에 둔다면
조선 초기 대륙땅에는 온통 명나라 밖에는
아무 다른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섬겼다는 당시에
이호명국而乎明國이라고 할 것이지 국호도 아닌 중국을 사용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중국은 조선이며,
이 조선은 또 중원의 나라.중화의 나라인 중국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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