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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파리 해방되자마자 나치 부역자 처단 착수
후세에도 큰 영향 미치는 언론인·작가는 가중 처벌
과거사 청산 못한 한국에선 '친일 옹호론'까지 등장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각 지역을 속속 탈환한 뒤 8월 25일 파리에 입성했다. 나치 치하에서 신음하던 프랑스가 해방되자 임시정부 주석 샤를 드골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나치 협력자 처단이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 6월 22일부터 4년 2개월이다. 파리를 포함한 국토의 5분의 3은 독일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나머지는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가 관할했다. 비시를 임시 수도로 한 남부는 자유지역이라고 불렸지만, 독일 나치 정부가 간접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1942년 11월부터는 독일군이 남부에도 진주해 비시 정부는 껍데기만 남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콜라보’라는 말은 ‘협업’을 뜻하는 영어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의 줄임말로 흔히 쓰이지만, 프랑스에서는 ‘협력자’란 뜻의 ‘콜라보라퇴르(Collaborateur)’를 줄인 말이다. 부역자나 반역자를 일컫는다. 80년 전 이맘때 프랑스에서는 “콜라보 에퓌라숑(épuration·숙청)!”을 외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 거리에 입성하는 연합군 부대.
9만 8000명 유죄, 1500명 처형 “콜라보 에퓌라숑!”
드골은 파리 해방 1년 전 알제리에서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며 나치 협력자 숙청 방침을 천명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인 6월 26일 독일 점령기 협력 행위를 처벌하는 부역자재판소를 출범시킨 데 이어 8월 18일 ‘국치죄’(자발적으로 독일과 동맹국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거나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친 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공민재판부를 설치했다. 11월 18일에는 비시 정부 주역들을 처벌하기 위한 최고재판소를 발족했다.
조사 대상은 광범위했고 판결은 추상같았다. 1944년부터 10년간 약 35만 명의 부역 혐의자 가운데 약 12만 명이 재판에 회부돼 9만 8000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중 3만 8000여 명이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은 6700여 명 중 1500명이 처형됐다.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들의 최후. 공개 처형하는 장면이다.
나치 점령기에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폐간
언론인과 작가들은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중벌을 받았다. 이들이 가혹하게 단죄된 배경에는 신문이나 책 등에 글이 남아 있어 부역 증거를 수집하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는 행위는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간지 <오주르디> 편집인 조르주 슈아레즈, 일간 <누보탕> 발행인 장 뤼셰르, 주간지 <즈수이파르투> 편집국장 로베르 브라지야크, <라디오 파리> 책임자 장 에롤 파키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징역형에 처해진 언론인도 수천 명이었다. 뚜렷한 부역 혐의가 없어도 이 시기에 종사한 모든 언론인은 다시는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공민권을 박탈했다.
나치 독일은 점령 기간에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으므로 프랑스 신문들도 친독일 논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북부의 경우 1940년 6월 25일 이후, 남부는 1942년 11월 11일 이후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돼 폐간의 운명을 맞았고 신문사 재산은 국유화됐다.
독일인 남성과 사귀어 아이를 낳은 프랑스 여인이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인 채 거리에서 조롱당하고 있다.
드골은 훈령을 통해 이러한 조치를 내리는 동시에 독일 치하에서 발행된 신문 제호를 어떤 언론사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르피가로>, <라크로아>는 독일군이 침공하자 지방으로 도피했다가 무기한 정간을 택해 살아남았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언론인 위베르 뵈브메리는 드골의 권유를 받고 1944년 12월 18일 <르몽드>를 창간했다.
음악가,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등 문화예술인에 대한 단죄도 폭넓게 진행됐으나 문인에 비해서는 처벌 강도가 낮은 편이었다. 부역 문학가로 지목된 드리외 라로셀 등 나치 협력에 관한 글을 남긴 작가나 이를 책으로 펴낸 출판사들은 가중 처벌됐다. 글의 영향력을 그만큼 중요하게 본 것이었다.
카뮈의 ‘정의론’과 모리아크의 ‘관용론’ 맞붙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1951년 사면법 통과에 이은 1951~1953년 대사면으로 일단락됐다. 상당수 수형자도 감형 조치를 받아 1964년에는 부역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해 프랑스 의회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는 입법을 단행했다. 반민족행위 가운데서도 반인륜적 범죄는 끝까지 추적해 단죄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해외 도피나 증거불충분 등으로 숙청을 면한 부역자들이 처벌받았다. 1980년대에도 비시 정부 당시의 학살사건 등이 뒤늦게 드러나 친나치 의용대 정보총책 폴 투비에게 종신형을 선고하는 등 청산작업이 계속됐다.
나치 협력자 처벌을 두고 ‘관용론’을 주장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왼쪽)와 ‘정의론’으로 이에 맞선 알베르 카뮈.
부역자 처벌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도 빚어졌다.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맞붙은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과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 논쟁이 대표적이다. 둘은 전쟁 중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서 함께 활동한 사이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모리아크가 <르피가로> 사설을 통해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자”고 주장하자 카뮈는 <콩바(전투)> 논설에서 “온 국민에 관련된 진실이 문제가 될 때 정의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침묵시키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반민특위 실패 18년 뒤 임종국이 불 지핀 ‘친일 청산론’
이제 시선을 우리나라로 돌려보자. 제헌의회가 1948년 9월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0월 발족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 7000여 명의 명단을 확인하고 이 가운데 682명을 조사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와 경찰의 습격 등으로 1년 만에 와해돼 조사나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불과 79명만이 재판에 넘겨져 집행유예 5명, 실형 7명, 공민권 정지 18명 등 30명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재심 등의 과정을 거쳐 1950년 봄 이전에 모두 풀려났다.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의 공판 광경. 악질이나 이름난 친일파의 재판이 열릴 때는 방청객이 넘쳐나 법정 밖 복도에서도 지켜봤다고 한다.
피의자 가운데 문인과 언론인은 모두 22명이다. 이 가운데 소설가 겸 언론인 이광수와 채만식, 학자이자 언론인 최남선, 종교인이자 언론인 최린이 실형을 선고받았을 뿐 대부분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 등을 통해 일제 식민정책 홍보에 앞장선 언론인들은 모두 처벌을 면했고,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고 중국 침략전쟁을 찬양하다가 1940년 8월 사실상 자진 폐간한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1945년 말 아무런 반성과 사과 없이 복간했다.
이후 친일 연구가 임종국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시작으로 <한국문학의 사회사> <일제 침략과 친일파> 등의 저서를 내며 친일 청산 움직임에 불을 댕겼다. 그의 글 ‘일제말 친일 군상의 실태’는 1980년대 초 대학생 필독서로 꼽힌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실려 대중적 관심을 일 깨웠다.
1989년 임종국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가 남긴 자료를 물려받아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발족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연구서를 펴내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는 등 임종국의 유업을 계승하며 친일 청산론을 확산해 나갔다.
1966년 ‘친일문학론’으로 친일 청산 움직임에 불을 댕긴 친일 연구가 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들의 활동은 국가 차원의 친일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불러일으켜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으며 이듬해 5월 대통령 소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4년 반의 활동 끝에 추려진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006명으로 반민특위 피의자 682명보다 324명 늘어났다.
이 가운데 언론인은 33명이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등이 추가됐다.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는 김활란 등과 함께 교육 분야에 이름을 올렸다. 문화예술인은 문학 31명, 학술 20명, 연극과 음악 각 10명, 영화 7명, 미술 4명, 무용 1명, 야담 1명을 합쳐 84명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이 수록됐다. 여기에는 박정희,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백선엽 등이 새롭게 등재됐다. 언론·출판 분야 명단은 44명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개탄하는 <황성신문>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도 1914~1918년 <매일신보>에 재직하며 다수의 친일 평론을 실어 이름이 올랐다.
KBS대전방송 뉴스의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보도 화면 갈무리
“친일 인사 명예 회복시키자”는 독립기념관장 등장
식민지 근대화론의 발원지로 꼽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주익종 연구위원(이승만학당 교사)은 2019년 <반일종족주의>에 ‘친일 청산이란 사기극’이란 글을 실어 친일 청산 작업을 비판했다. “반민족행위와 달리 친일은 범죄가 아니며, 반민특위에서 문제 삼지 않은 건국의 공로자들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이름의 범주에 넣은 것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만들려는 좌익의 네다바이(사기 행위)”라는 것이다.
지난 8일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한 김형석 관장도 기자회견에서 취임 일성으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대한 재검증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박정희·안익태·백선엽 등은 친일 인사가 아니라는 주장인데, 주익종의 견해와 일치한다.
<반일종족주의>의 또 다른 필자인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을 지낸 뒤 지난 7월 3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 농민은 일제에 쌀을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수출한 것이고, 실생활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일제는 민족 간 차별을 제도로 공식화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광복회 인천광역시지부 관계자들이 집회를 열고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2024.8.14. 연합뉴스
“프랑스에서 또다시 반역자가 나오지는 않을 것”
다시 80년 전 프랑스로 돌아가 보자. 카뮈는 1944년 9월 9일 자 <프랑스 문예>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모든 과거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드골은 모리아크 대신 카뮈의 손을 들어주며 이런 말을 남겼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뮈의 말대로 정의가 실현됐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부역자 청산 초창기에 재판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하거나 독일 남성과 사귄 여성들을 거리에 끌고 나와 조리돌림하는 일도 있었다. 형량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과 재판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드골의 기대대로 앞으로 프랑스에서 반역자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최근 프랑스 정계에서는 극우 정당이 의회 장악을 눈앞에 두었다가 주춤한 상태다.
그래도 지금까지 80년간 프랑스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숙청하는 일이 애당초 잘못됐다거나 나치 점령 기간에 오히려 프랑스가 더 발전했다는 등의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설혹 앞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프랑스의 지성과 역사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의 수장을 맡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출처 : 프랑스의 반역자 심판, 한국과 달랐다 < 문화 모꼬지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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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모든 과거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드골)
그렇지 않으면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변태됩니다.
일단 변태가 되면,
모습 뿐만 아니라, 그때 까지 '그라고 여겨지던'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굴 속의 토착왜구 스메아골로 변신합니다.
반역자 골룸, 밀정 골룸,
결국 골룸은 이러나 저러나 끝까지 죽을 팔자였다는 것이다.
마이 프레셔스~~
골룸에게 절대 반지는 일본 천황의 지배를 받는 건가 싶다.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는 행위는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죽었다.
kbs 가 jbs 로 변신.
애국가 가 기미가요
광복절에 오페라 나비부인. ㅎㅎ
두개로 쪼개진 광복절 행사.
독립기념관에 뉴라이트 반일 종족 주의자들이 점거.
그리고, 두개의 국민이 있다.
조선인 과 일본인,
지배민족과 피지배인
식민지인과 식민제국.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봄은 왔건만 ...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들(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 아직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