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50)
오지의 민중과 삶에 바치는 헌사
장이머우의 <원 세컨드>
김 문 홍
필름영화에 대한 러브콜
영화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하는 연극에 비해 그 역사가 아주 짧지만, 대중에 미치는 영향과 그 파급력은 연극 못지않게 크다. 또한 연극은 그 주제나 형식,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향수자가 한정되어 있지만, 영화는 남녀노소 어느 누구나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리고 연극은 그 제작 방식이 수공업적 측면이 강하지만, 영화는 과학적이고 대량생산의 측면이 강하다.
영화는 일종의 꿈의 공간이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무대 쪽의 스크린에 영상이 투사되면 관객은 꿈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현실의 자신을 잊은 채 허구의 이야기 속에 감정 이입되어, 영화 속 인물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 함께 웃고 함께 웃기도 하고, 그들이 괴로워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양 연민의 감정을 보낸다. 그러다가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면 관객들은 현실과 자신의 일상 속으로 귀환하게 된다.
만약에 영화라는 영상 메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삭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하소연하지 못하는 마음속 괴로움과 슬픔을 어디에서 풀어야 할 것이며, 노동에 지친 삶의 피곤함과 지리멸렬한 삶을 어디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꿈을 찾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가서 하소연하며 해답을 얻응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내 삶의 방향타를 정해야 하는데 참 암담하기만 할 것이다.
장이머우의 <원 세컨드>(2020, 104분) 는 민중의 애환을 보듬어주고 꿈을 키웠던 과거의 영화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이다. 장이머우의 이 영화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 속 영화들처럼 그만의 독창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다.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을 비롯한 그의 영화 계보처럼 항상 민중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영화적 구성 역시 그만의 서사적 규칙을 따르고 있다. 여느 영화들처럼 인물의 대사를 통해 주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사와 행위, 그리고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여 큰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또한 영화의 서사적 구성력 역시 아귀가 맞아 빈틈이 드러나지 않는다. 통일성, 독립성, 연결성, 그리고 인과성의 원칙이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다. 모든 상황과 장면은 주제라는 전체에 통일되어 있고, 각 장면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장면과 장면은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성, 독립성, 연결성의 서사적 규칙은 반드시 인과성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주제는 대사 속에 드러나 있되 강요하지 않고, 표면에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원 세컨드>는 2020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재미가 있되 통속적이지 않고, 이념과 주제가 있되 그것을 강요하거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는 문화혁명 시기 중국의 오지인 간쑤성을 배경으로 민중들의 영화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꿈을 찾기 위한 쫓고 쫒김의 사투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 은유로 드러내고 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을 한 사내가 해쳐가고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 사내의 고통의 여정이 밝혀진다. 장주성(장역 분)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농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노동교화소를 탈출해 황량한 사막으로 고통의 행군을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 상영하는 본영화보다는 그 앞에 소개되는 '뉴스릴 22호'(중화뉴스)를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불과 1초밖에 되지 않는 그 짧은 화면 속에,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사는 딸이 출연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기 위해서다. 딸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몸속에 체화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비장한 여정을 감행하는 것이다.
장주성이 도착한 제1농장은 이미 영화가 끝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살았던 농장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그쪽으로 향한다. 그 무렵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채 제2농장에서 살고 있는 더벅머리 떠돌이 소녀 류가녀(류호존 분)는 오토바이에 실려 있는 <영웅아녀>의 필름캔 하나를 훔쳐 달아난다. 이를 목격한 장주성과 더벅머리 소녀 류가녀 사이에서 필름 캔을 찾기 위한 쫓고 쫓김의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다. 루거녀 역시 장주성 못지 않을 만큼 필름이 절실하다. 남동생이 전등갓을 빌려 공부하다가 잘못해 태워 먹었는데, 빌려준 아이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래서 필름을 잘라 전등갓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남동생이 위협을 받지않고 편안하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은 필름 속에 들어있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한 열망으로, 다른 한쪽은 현실의 곤궁과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필름이 절실하다. 사내는 필름 속에 있는 딸의 모습을 통해 그리움을 달래려 하고, 다른 한쪽은 현실의 핍박과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필름이 필요한 만큼 절박하다.
그런데 이들에게 위기가 밀어닥친다. 필름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뉴스릴이 들어있는 필름 캔이 뒤죽박죽이 돼 버린다. 이때부터 손상된 필름을 원상 복원하기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 영화를 상영하는 기술적 책임을 진 영상원 판 기사의 지시에 의해 필름 복원 작업이 시작된다. 이 장면은 영화에 대한 민중의 열망, 현실의 곤궁함을 벗어나 영화 속에서 감정이입으로 꿈을 이루려는 열망, 그리고 영화 속에서 들끓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열망이 한데 어우러져 필름 복원 작업이 시작된다. 이러한 열망으로 무대 간이 스크린 뒤에서 펼쳐지는 필름 복원 작업은, 이 작품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암시하면서 영화에 대한 민중의 그리움과 열망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작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은유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 영화의 압권으로 자리 잡는다.
증류수로 필름을 닦고, 손부채질로 필름을 건조시키고, 장면이 뒤틀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필름을 감는 작업은 하나의 성스러운 행위처럼 보여진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영화지만 관객은 필름 속의 허구적 판타지와 현실 속의 자신들을 어우러지게 하여 환호하고 박수치면서 관람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화는 일종의 구원의 매개체이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현실의 곤궁함을 잊을 수 있었고, 그들은 영화 속을 유랑하면서 현실의 고난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당시의 영화 상영은 마을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관객이 상영장을 다 빠져나가고 난 뒤에, 장주성은 영상 책임자인 판 기사의 배려로 단 1초(원 세컨드)에 불과한 그 장면만을 연신 지켜보면서, 딸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의 속내를 토로한다.
사내는 결국 보안원들에 의해 노동교화소로 끌려간다. 판 기사는 몰래 장주성의 허름한 가방 한쪽 귀퉁이 속에 단 1초밖에 안 되는 필름 조각을 넣어준다. 그런데 보안원들과의 실랑이 끝에 사내가 가지고 있던 필름 한 조각은 사막의 모래 위에 버려진다. 뒤따르던 더벅머리 소녀 류가녀는 필름을 쌌던 신문지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영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오지의 민중적 삶에 대한 위로
장이 모우의 <원 세컨드>는 영화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은 영화이다. 또한 영화의 효용 가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성찰의 영화이기도 하다,. 민중에게 영화를 보는 날은 일종의 축제이고, 그들에게 있어서 영화는 현실의 고난과 핍박, 그리고 외로움과 그리움의 열망을 담는 성스러운 매체이다. 영화가 있었기에 그들은 현실의 곤궁함을 잊을 수 있었고, 영화가 있었기에 그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영화적 허구의 판타지 속에서 이룰 수 있었고, 영화가 있었기에 그들은 현실과 판타지 속을 오고 가면서 풍부한 감정을 채우고 영혼을 위무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기이다. 도시에서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핍박으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지만, 오지인 이곳은 그런 정치적 압박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이 영화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상징적 비판은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치 권력에 대한 무관심도 아니다. 제2 집단농장 사람들이 보는 영화 <영웅아녀> 속의 모습은 정치적 이념에 의한 비판과 숙청의 진면목은 아니지만, 영화의 내용에 열광하는 집단농장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라는 획일적인 모습은 그것을 우회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필름 영화에 보내는 장이머우의 일종의 헌사에 가깝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장이머우의 러브콜이기도 하다. 오지의 민중과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영화를 통해 삶의 고단함을 잊고, 영화보기의 즐거운 축제 경험을 공유한다. 손상된 필름을 복원하는 과정은 일종의 제사의식과 같다. 영화 상영을 책임지고 있는 판 기사는 일종의 제주 역할을 맡고 있다. 필름 복원작업에 참여한 주민들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화에 대한 신적인 숭앙의 태도를 견지한다. 영화가 상영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주민들 역시 숨죽인 채 스크린 뒤의 복원 작업을 신성시하며 기다리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곤궁한 삶과 부자유스러운 행보를 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영화 상영은 곧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이머우는 이 영화를 통해 오지 속의 민중과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영화의 효용 가지가 무엇인가, 영화가 민중에게 해주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인 장이머우는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통속적인 서사적 재미를 주면서, 아기자기한 꿈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제시하면서, 영화와 한데 아우러지는 민중의 축제를 보여주면서 영화의 근원적 본질과 속성을 묻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들은 영화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으며, 영화는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무엇이며, 영화보기의 의미는 또 무엇이며,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꿈의 공장이다. 허구의 꿈을 생산해 한 조각씩 우리에게 던져주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준다.
첫댓글 영화배우 강수연을 애도하며 읽었어요.
영화에 비하면 연극의 허무성은 더 심하죠.
영화는 그래도 기록되어 보전되나니.~ㅎ
영화감독으로서
소비되는 작품에 대해 위로를
해주고 싶었을 거예요.
선생님의 차분한 서평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선생님~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