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아,
가장 쉬운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화단에 씨를 맺기 시작한 빨간 갓과 들깨를 모두
뽑아냈다.
그대로 두면 올겨울이나 내년 봄에
다시 새싹이 돋겠지만,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집주인에게는 그저 성가신 잡풀로 여겨질 게
분명했기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정리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도 시작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오렌지 나무의 가지를 쳐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전지가위를 들고 다가가 가지를 자르다,
아직 지지 않은 꽃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아본다.
상큼한 오렌지 꽃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옆으로 퍼진 가지를 정리하려던 찰나,
이상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작은 새집이었다.
아, 허밍버드(Hummingbird), 바로 벌새의 둥지였다.
어쩐지 요즘 유독 뜰에 벌새가 자주 보인다 했더니,
나뭇잎 뒤에 숨어 은밀하고도 소중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모양이다.
몇 년 전, 딸아이 집 벤자민 나무에 벌새가
알을 낳았을 때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 나무를 우리 집으로 옮겨오며 벌새가
찾아와 주길 바란다는 글을 쓴 적도 있다.
그 간절한 기다림이 드디어 응답을 받은 것일까.
문득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속
벌새 이야기가 떠올랐다.
80세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지는
벤자민의 삶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사랑하는 데이지의 품 안에서 갓난아기가 되어
눈을 감던 그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벌새는 1분에 1,000번 이상 심장이 뛰고,
초당 80번의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나 치열하고 빠르게 움직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여유롭고 평온해 보인다.
영화 속 대사처럼 벌새는 평범한 새가 아니다.
그 날개는 무한대(∞)를 그리며 움직인다.
찰나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며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다 간 벤자민처럼,
벌새는 우리에게 삶의 속도와 멈춤에 대해
깊은 화두를 던진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그 가지를 댕강 잘라냈더라면
저 작은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나무 곁을 오갈 때마다 벌새가 주변을 맴돌던
기억이 난다.
그저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내게 간절한
신호를 보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벌새를 기다려온 마음을 알고 있어
자기 존재를 알리려는 몸짓으로 여겼다.
나는 오렌지 나무 가지치기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
벌새는 거미줄을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말이 떠올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갈색 둥지 위로 엉겨 붙은 가느다란 거미줄이 보였다.
이 작은 요람을 짓기 위해 어미 새는 수만 번
날갯짓을 하며 이곳을 오갔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이토록 닮은 모습으로
헌신하는 운명을 타고나는 모양이다.
아침에 느낀 벅찬 환희가 가시지 않아 몇 번이나
둥지를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둥지 속이 궁금해 조심스럽게 손을 대보니,
작고 동그란 알의 감촉이 느껴졌다.
혹여 어미가 눈치챌까 싶어 벌새의 날갯짓만큼이나
빠르게 손을 뗐다.
아기 벌새는 언제쯤 세상 밖으로 나올까.
이 집을 떠나기 전에 그 애들의 탄생을
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내년에는 더 많은 오렌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
이 집의 새로운 주인에게도 향기와 기쁨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벌새는 행운과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나는 참 많은 행운을 누렸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떠나는 길목에서 만난 벌새의 둥지는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삶은 언제나 희망을 품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축복의 선물이라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마 5월안에 이사를 하게 될것 같습니다 .
할 일이 태산이지요 .
올해초에 날씨가 더워서 들깨싹이 나오자 마자 꽃을 피웠어요.
모종도 얼마 안 올라오고요 .
이집으로 이사 올때 너무 힘이 들어 다시는
이사하지 않겠다 하고는 또 이사를 하네요.
가능하면 벌새를 같이 갈까 궁리 중입니다 ㅎㅎ
벌새
검색해서 보니까
화려하고 예쁜 새 입니다.
행운을 실어나르고
아녜스님 뜻대로
새로운 생명의,날개짓
기쁨과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편안한 글에
여러번 감동 받았습니다.
주로 "허밍 버드"라고 많이 합니다 .
조금 큰 나비만 하니 새 치고는 작지요.
8년동안 이집에 살았는데 처음으로 제 뜰에다
집을 지었어요
정말 반가웠답니다 .
윤정님의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 .
정들었던 집을 떠나기로 했나 봅니다.
작은 일까지 다음을 생각하고
내 자신이 소소한 행복을 얻듯이
내살던 집에,
다음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내가 살던 집에서
행복했던 것을 생각하고
벌새도 오랜지 나무도
착한 이별을 하는 아녜스님의 심사를
잘 느껴 봅니다.
약간의 바람이 지난 후에
아녜스님이 와 주셔서
그 마음 더 고맙네요.^^
주위가 예쁜 동네지요 .
마을입구에 꽃나무들이 많고 근처에 호수가 있고요 .
막상 떠나려니 섭섭하지만 ,,,
사소한 일로 콩꽃님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실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
늘 바람은 불어 오지요 .
그러다 또 잠잡해 지기도 하고요 .
화사한 봄날 되세요 .
떠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듯합니다.
비워낸 자리 위에 생명이 얹히는 모습이 참 깊게 남습니다.
이별이 아니라, 넘겨주는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
좀더 비워진 공간에 살고 싶어 이사를 하는게
첫번째 이유입니다 .
그리고 삶의 변화를 주고 싶기도 하고요 .
다음에 이집에서 살 사람도 저처럼
앞뜰을 좋아 했으면 하는 맘입니다 .
저 작은 벌새 집을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저 같으면 그냥 빛바랜 잎인가 하고
가지치기하고 말았을 텐데요. ㅎ
새집 주소, 벌새 둥지에 붙여두세요.
새집에도 행운과 사랑을 주려고
그 벌새 분명 날아올 겁니다.
하마터면 가지를 자를뻔 했답니다 .
벌새집이 그곳에 있으리라고든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요 .
벌새를 만날때 마다 이야기 하려 해요 .
나랑 같이 이사하자고요 .
이사를 결정하셨군요.
가시면서도 새로 올 분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곱습니다.
몇년 전 대전에 있는 한밭수목원에
갔을 때 같이 간 집사님이 벌새라고
알려주던 너무도 작은 새가
생각이 납니다.
새로 가시는 곳에서도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시길
바라면서 글 잘 읽었습니다.
한밭 수목원은 어딘지 모르겠네요 .
도마동 쪽에 신선농장인가 뭐가 있었던거 같은데 ~
유성쪽에도 뭐가 있었던것 같고~~
제가 대전에서 몇년가 살았는데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
보문산만 기억이 나요 ㅎㅎㅎ
벌새가 한국에도 있군요 ,
너무 귀여운 새.
이베리아님의 덕담 고맙습니다
벌새를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아녜스님.. 우리도 같이 평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작은 새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모든게 자연의 섭리라 여겨지니 경건해지는 느낌입니다.
그 작은 새가 나즈막한 나무에 집을 짓고
알까지 품고 있다니 정말 기적 같습니다 .
그것도 제 집 뜰에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연에서 평안과 위안을
얻는 지혜가 생기는것 같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글을 볼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 가시는군요
집과 정원을 잘 가꾸다가 떠나면 아쉬움이 매우클것 같군요
아파트에서 이사가도 그런데...
좋은 곳으로 이사해서
마음의 평화와 건강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돌비님 ~
부럽다고 하시니 제가 너무 경솔했나 하는
반성도 해 보게 되네요 .
이사를 한다는게 두렵기도 하고 힘도 들지만
한번은 해야 겠다고 맘을 먹고 용기를 냈습니다 .
더 늦으면 못 할것 같아서요 .
돌비님도
푸르름이짙어가는 이 계절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드디어 이사를 하게 되시는 군요.
이사를 앞두고서 이런저런 소회가 깊으시군요.
식물들과 작은 새가 주는 평화롭고 소소한 행복을 새로운 주인에게의 양도를 앞두고 느끼시는 이런저런 감정의 결이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일년 여 전 이사를 앞두고 제가 느꼈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만큼이나 여유없이 좁은 동네 골목길, 빨래 널기 좋은 햇살 가득했던 내가 살던 집의 마당,
앞집의 친정 어머니같이 푸근했던 연상의 아지매, 그리고 몇몇 동네 지인들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에 마음이 싱숭생숭,
틈만 나면 익숙했던 동네의 풍경들을 찍어 댔어요.
멀지 않은 이웃 동네로 이사를 한 저는,
이따금 이전의 거주지였던 그 동네로 장도 보러 가고, 운동도 하러 갔어요.
주민들 모두가 이주하고 이제 일 년이 지난 시점인데, 이제 철거를 시작하더군요.
수 년 후에 아파트가 건립되면 그때 예전의 동네 지인들 몇몇은 재회할 수 있겠지요.
우울감의 원인이 약의 부작용도 있지만, 새로 이사한 이 곳에서 골목길을 걸어도 동네 시장을 가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때문이었던 듯 합니다.
지난 주에 병원 진료를 받았는데, 이제 스테로이드는 끊기로 했어요.
이런저런 부작용은 개인차가 있지만 일년에서 일년 반 정도는 간다고 하더군요.
내일배움카드 마지막 수업이었던 캘리그라피 강사님이 제게 글을 잘 쓴다면서 계속 하라고 하신 것도 있지만, 서예와 캘리그라피를 하는 중에는 마음이 좀 평온해지더군요.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원단도 사와 재단을 하고 샘플 제작 준비도 하는 동안에 우울한 마음도 많이 가셨어요. 제 이모티콘 캐릭터로 원단을 만들어 굿즈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무릎이 아팠다가 종아리가 아팠다가 번갈아 생기는 근육통도 적어도 일년간은
견뎌야하는 거라니 그런 줄 알고 생활하기로 했어요.
온라인 친구들이 모임을 하게 된다면 가서 얼굴만 보고 바로 돌아오더라도 다녀오려고 하고, 동네 성당에 찾아가서 신앙상담을 하고 왔는데, 이후 코로나가 발발,
이런저런 핑계로 유보가 된 성당 재방문도 다시 시도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보면 몸도 마음도 많이 회복되겠지요.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일상도 평화롭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
좀 환경을 바꾸고 싶었어요 . 가구들도 너무 크고 집도 좀 오래되었고 .
일이 빨리 진행이 되어 아마 5월 중으로 이사가 될것 같습니다 .
정리하기가 쉽질 않아 걱정이 되지만
차근차근히 해야겠지요 .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우린. 스테로이드를 끊게 되니 정말 다행이네요 .
힘든 고비 잘 넘기신것 같아요 .
마음 먹고 있는 일 무리 하지 마시고 하나씩 해 보세요 .
친구들도 만나고 , 성당에도 가보고요 . 가끔 재래시장도 가보면 좋겠네요.
나도 그랬었거든요 .
우린님은 무엇이든지 잘 할거예요 .
나는 그렇게 믿거든요 .
사진 속의 저 갈색의 지푸라기 같은 것이 벌새의 집인가요?
나는 TV로는 보았지만 실제로 벌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궁금합니다.
아녜스님. 이사 준비 잘하시길 바랍니다.
벌새 집 맞아요 .
너무 가까이 가면 벌새가 놀랄까봐 사진 찍기가
쉽질 않았어요 .
이제 좀 바빠질것 같습니다 .
고맙습니다 푸른비님
나는 오렌지 나무 가지치기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
그렇지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도 좋겠네요.
나이 들어가면서 변화를 두려워하기 쉬운데, 과감한 결단을 하셨다니
왠지 아녜스 님은 건강 장수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