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저물어간다 이국의 언덕에
친구여 힘들지 애절하지
참는거다 기다려라 폭풍이 지나가면
돌아갈 날도 온다 봄이 온다
2.
오늘도 동터온다 이국의 언덕에
꿈도 차갑지 추워서 얼지
울면서 웃으면서 노래하며 기다리면
바라는 날이 온다 아침이 온다
3.
어제도 오늘도 이국의 언덕에
눈오는 납빛 하늘 해가 옅구나
쓰러지면 안된다 조국의 땅을
찾아 가기까지 그 날까지
패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군 패잔병들이 불렀던 '이국의 언덕'이라는 노래입니다.
패전 직후 비참했던 일본 패잔병들의 운명과 종전 후 일본 경제가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전 제가 포스팅했던 '간단히 살펴보는 전후 일본 경제'에서 이어서 쓰는 글입니다.
그 글에서 대략적으로 서술했던 전후 일본 경제에 대해 조금 더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간단히 살펴보는 전후 일본 경제'에서 제가 시대를 대략 이렇게 나누었었습니다.
제 1기- 여기로 들어오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종전 직후~1950년
제 2기- 그것은 피어나려는 벚꽃처럼- 1950년~1970년
제 3기- 그리고 빛나는 밤하늘과 같이- 1970년~1990년
제 4기- 그날 본 닛케이의 지수를, 일본은 아직 회복하지 못한다-1990년~현재
이번 글에서는 제 1기- 여기로 들어오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종전 직후~1950년+1960년 까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1945년, 일본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중일전쟁부터 9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끝냈습니다.
진주만 기습에서부터 원폭 투하에 이르기까지 일본 본토는 미 공군의 끊임없는 전략 폭격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종전 직후 궤멸적인 산업 시설 파괴로 나타납니다.
커티스 르 메이 장군
"일본을 석기시대로!"
도쿄 대공습 직후 도쿄 풍경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종전 직후 집계된 일본 본토의 피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업용 기계류- 약 34% 이상 파괴
-선박-약 80% 이상 파괴
-광공업 생산 수준- 1936년에 비해 약 90% 감소
1946년에 접어들며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만, 회복을 해도1936년에 비해 약 70%가 감소한 상태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1945년에는 흉작이 들어 일본 전역에서 약 100만톤 이상의 쌀 부족 현상이 발생하여
아사자가 1천만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었습니다.
이같은 식량 부족 현상은 영양부족을 불러왔고, 1946년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의 신장은 1937년 4학년 남학생에도
미치지 못하여 이 시기의 참혹했던 일본의 식량 부족 사태를 실감케 해 줍니다.
1947년, 전후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서 발행한 제 1회 경제 백서(경제 실상 보고서)의 캐치 프라이즈는,
'국가도 적자, 기업도 적자, 가계도 적자'
였습니다. 경제 백서에서는 이같은 현상이 계속 되고 있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둘째, 사회 기반 시설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보수와 보진이 행해지지 않고 있다.
셋째, 외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요컨대, 일본은 맥아더의 말 대로, '농업국가'로 전락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2. 소중한 것은 모두 미국이 가르쳐 주었어
이렇게 시궁창인 일본 경제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 GHQ는 정치, 경제 부분에서 강력하게 민주화를 추진합니다.
첫째, 농지개혁-유상몰수 유상분배(본토 농지 소유 한계 1정보, 홋카이도는 5정보), 농업 조합 결성
둘째, 노동 3법(노동기준법, 노동관계조정법, 노동조합법)제정,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 3권 확립
셋째, 산업의 민주화- 재벌 해체, 집중배제권 제정
이러한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GHQ는 1946년 6월, 경제 안정 본부를 설립하여 경제 안정에 총력을 다합니다.
본부장으로는 총리 대신과 함께 총무청장관(안정 본부 장관)을 두고, 각 성(대장성, 후생성 등)의 최우수 인재를
파견하여 경제 안정 본부를 강력하게 지원했고, 이 지원에 힘입어 경제 안정 본부는 정책을 시행해 나가게 됩니다.
3. 이 푸른 하늘에 공장 굴뚝을
종전 직후의 기아와 인플레이션 현상의 원인은 생산량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온 방안이 '경사 생산 방식'입니다.
경사 생산 방식은 전시에 시행되던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과 비슷한 면을 보이기도 하는데,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석탄 캐내는 것 밖에 없으니까 석탄 열심히 캐서 그걸로 철강을 찍어냅시다." 입니다.
철강 생산의 기본이 되는 석탄 생산을 늘려, 철강 생산을 증대 시키고, 증산된 철강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을 도모하는
계획으로, 1946년 도입된 경사 생산 방식은 이듬해 그 효과를 드러내 석탄 생산이 전년도에 비해 28% 증가하였고,
이 성과는 섬유와 조선 등의 산업에 석탄 공급이 40%이상 증가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냅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전시에 군수품을 제조하던 공장(항공기, 전차 부품, 광학 제품 등)이 일반적인 공장 시설로
전환되며 석탄 증산, 철강 증산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재봉틀, 공업 기계류, 카메라, 자전거, 라디오 등의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수출에 일조하였습니다.
한편, 석탄 증산과 철강 증산에 따른 손해액은 부흥 금융과 보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1949년에 이르면
융자 잔고가 1320억엔에 달하여 당시 통화 발행량의 20%에 이르러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인플레이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경제 통제 능력의 대부분을 일본 정부에 이양하였고,
이는 일본 정부가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경제 정책을 수립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인플레이션을 즉각 해소해야한다는 '일거안정론'과 경제 발전 이후에 인플레이션 해소를 주장하는
'중간안정론'이라는 두 이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여기서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서로 대립하게 됩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 해소가 자칫 대량 실업 사태를 불러올 것이 걱정되었고,
미국 정부의 입장은 인플레이션 심화->물가 상승->국민들 불만 폭발-> 경 일본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 축
미국은 일본이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권이 되는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고, 이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한 일본 정부를
점령군을 통하여 압박하면서 일본 정부에게 '일거안정론'의 선택을 강요합니다.
4. 건설 후 티타임
'일거안정론'을 택한 일본 정부에 미국은 '조셉 닷지'라는 공사를 파견하게 되고, 닷지는 소위 '닷지 라인'으로 불리는
경제 안정 대책 정책을 발표합니다.
첫째-과잉 구매력 삭감과 수출 증대
둘째-석탄,철강 생산 보조금 철폐
셋째-긴축, 긴축, 무조건 초긴축 예산!
닷지는 종합 재정 균형을 강조하며 초긴축 예산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1948년 세출 초과 1419억엔에서,
1949년 세입 초과 1569억엔으로 전환된 것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또한 부흥 금고의 융자 정지와 더불어 민간으로의 보조금 유출을 극도로 억제하였고, 이는 곧 물가하락으로 나타납니다.
1949년 2월을 정점으로 암시장 거래물가는 32% 하락률을 보임과 동시에 상품 질이 현저히 높아졌기 때문에
더욱 큰 물가 안정 효과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닷지라인에 의해 1달러=360엔의 고정환율이 되자 학계에서는 무역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영국처럼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하여 수출하는, 현재 일본의 경제 구조인 '무역주의'를 제창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 시장이 불안하므로 내수와 국토 개발에 중점을 두자는 '개발주의'를 제창하였습니다.
결국 일본 정부의 선택은 '무역주의'로 기울었고, 이는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곧 밝혀지게 됩니다.
5.WORKING!!
닷지라인은 경제적 안정을 불러왔지만 그에 따른 대가로 경기후퇴가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을때 9회말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6.25전쟁이었습니다.
6월 25일 기습 남침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7월 유엔결의가 통과됨에 따라 유엔군이 개입합니다.
3년동안 치열한 교전이 전선에서 계속되면서 군사 개입한 미국은 물자 조달 기지를 원했고, 그 기지로 선택된 것이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일본은 많은 양의 물자와 서비스를 수출하였고,
1950년 3억달러, 1952년에는 5억달러의 수출을 기록하게 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아즈냥...☆
굉장히 저급한 댓글이군요.
godhon/ 가끔씩 저런식의 욕을 먹어도 싼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일성이 그중 하나죠. 아니면 북한에 무슨 애증이 있으신 겁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일성은 이런 소리 들을 만하지 않나요? 그닥 저급하다고는...
한국전쟁은 민족의 불행이지만,그 시대의 상황에서는 필연적이엇습니다.3개분단국 동서독,월남.월맹,남북한중에서 2차대전으로 초토화된 독일을 제외하곤 월남.월맹과 남북한이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습니다.김일성의 또라이짓이 아니란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북한의 입장에서 전쟁을 일으킬 정당성도 있습니다. 북한지도부가 공산주의계열이긴하지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인민군도 항일연군등 독립군이었고요.그에 반해 남한은 어떤가요. 김구등 임시정부계열은 모두 제거당하고,국군도 일부 광복군이 참여한것을 제외하고는 일본군,만주군일색이었습니다.북한의 입장에선 친일파나 미제에 넘어간 남한을 공격 통일을 해야한다는 당위
성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북한에서 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남한이라고 다를까요?
이승만도 공산주의에 넘어간 북한을 공격 통일시키겠다고 북진통일외쳤습니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이론중 수정주의 이론이 있는데,그중에 남침유도설이 있습니다. 남침유도설의 근거중에 바로 "일본경제부흥론"이 나옵니다. 즉 북한의 남침을 미국이 사전예방할수 있었는데,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요새로 일본을키우고 그러기위해서 일본경제를 부흥시켜야만 했고 그 방법이 전쟁특수였습니다. 이건 2차대전후 유럽경제부흥과 비교하면 알수있습니다. 유럽에는 마셜계획이
나 경제공동체를 통해서 경제를 부흥시킬수 있었지만,일본은 그럴수가 없습니다.초토화된 일본자체도 문제지만 그 미약한 생산력으로 생산한 제품조차 팔 시장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팔겠습니까.2차대전전에도 일본의 대미수출1위가 생사입니다.제품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아니면 공산화된 중국에 팔수있을까요. 결론은 일본경제가 부흥하는 유일한 방법은 2차대전때 미국이 그러하듯이 전쟁특수밖에는 없었습니다. 흔히 대공황에서 미국이 벗어난게 뉴딜정책때문이라고 하는데 구라입니다.2차대전터져서 전쟁특수때문에 미국경제가 살아난겁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해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이 있어왔지만 저는 두 이론 모두 타당하다고
봅니다. 북한이 남침한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이 강력한 메세지를 주었다면 6.25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스탈린도 최후까지 남침승인을 망설였다고 합니다.그러다가 결정타가된게 바로 "애치슨선언"입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대만이나 남한을 공격하라고 묵인하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만은 중공이 그 당시 해군이 없었으니 힘들고 ,남은건 육지로 연결된 남한밖에는 없습니다. 트루면 대통령이 말했다죠."한국전쟁은 일본을 방위하기위한 전쟁이었다" 지금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의 제1선은 일본이고 한국은 일본방위를 위한 교두보일뿐입니다.
한국동란은 어떠한 명분이나 당위성을 가지고 발발한 전쟁이 아닙니다. 당시 남한에서 친일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그걸 핑계로 '남조선 인민 해방'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며 남으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연안파,
남로당파,소련파,갑산파 등의 여러 파벌이 갈려 김일성을 압박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남한 침공을 계획하게 되고, "내가 권력 잡으려고 님 따귀를 갈기는거임ㅋㅋ"할 수도 없으니 '조국해방전쟁'운운하며
자신들을 포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침유도설'에 따르면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제외하고 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잇고, 중국과 북한이 각각
타이페이와 남한을 선제 공격하도록 유도했다고 얘기합니다만,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2차세계대전과 국공내전을 겪으면서
소련과 중국의 지상군은 사상 최강에 도달했고, 아시아-태평양 지구의 미군으로 소련과 중국의 침공을 막는다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에따라 미국은 지상군끼리의 전면전 대신, 훨씬 우세한 해군력을 통한 방어를 계획하게 되고,
소련,중국과 육상으로 맞닿은 남한을 포기하게 됩니다. 타이완의 경우도 '그냥 버리는 패' 취급을 했었고요.
그리고 이승만이 공공연히 '오랑캐 무찌르고 38선 넘어 북진'을 외친 이유는, 미국에서부터의 군사원조를 받기 위함이었지,
실제로 북진 통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에 당연히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을 피하려 했던 미국은 군사 원조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멀쩡한 공군기 대신에 캐나다 등지의 연습기등을 판매했고 이는 전쟁 초반에 궤멸적인 국군의 패배로
미국의 군사원조 거절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경제가 한국동란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일본의 경제 성장을 위해 남침을 유도했다고 보는 것은 그다지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본문에서 언급되듯이, 패전후 일본은 '경사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석탄과 철강의 생산량을 크게 증가 시켰습니다.
후기에 접어들면 미국은 일본으로의 철강 수출국에서 철강 수입국으로 바뀌고 맙니다. 즉, 종전직후 일본 경제는 한국 동란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속도가 느릴 뿐이지, 아무리 늦어도 1970년대 후반에는 상당히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을 겁니다.
기술력 또한 GHQ의 치하에 있으면서 미국과 서방 선진국의 기술을 많이 도입했고, 이는 상품 질의 상승과 더불어 생산성
증가를 가지고 오게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일본은 전쟁 이전에도 주력하던 조선과 섬유 산업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 품목은 일본의 고도
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남침을 유도하여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도 국공 내전을 장기화 시켜 이를 통한
미국의 잉여 생산물 처리와 일본의 경제 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이 방법이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없이
미국과 일본의 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구태여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남침을 유도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미국이 그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면 어째서 미군이 오산과 대전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고, 인천 상륙 작전 이전
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 보아, 미국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을 당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애치슨 라인의 남한-타이완이 빠진 것은 미국의 몸 조심+아시아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지, 결코 남침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주의 붕괴 이후 기밀자료가 공개되면서 남침 유도설은 학설이라기 보다는
음모론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즉, 학계에서 남침유도설은 폐기 단계에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godhon/ 완전 친북쪽의 논리를 죄다 흡수해 드셨군요. 미국이 전쟁특수를 위해 한국전쟁의 발발을 묵인했다면 아예 모든 전쟁이 미국의 전쟁특수를 위해 일어났다고 주장하시지 그러세요? 거 참...
하지만 북한 또한 친일파 입으로만 청산했지 친일파들이랑 같이 해먹었다는거 ㅠㅠ
차라리 1차 세계 대전으로 갈갈이 찢어진 게르만 민족의 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노력으로 인한 필연적인 전쟁이 2차 대전이라고 믿고 말죠. 미국이 언제부터 일본 살릴려고 자기네 젊은이 수만명을 전장으로 보내는 나라였습니까?
godhon님의 주장은 저급 주사파 논리의 전형이고, 이미 공개된 사료에 의해 다 반박된 것입니다.
.........결론 베트남 전쟁은 한국의 경제력 상승을 위한 미국의 전쟁특수의 꼼수...........라는 것?
이런식의 반미는 결코 옳은게 아니라 봅니다.
지금의 선진국들.. 이를테면.. 독일, 이탈리아는 양대전의 참가국이면서 주도국이죠.. 일본이 경제대국이 된 것도 그만큼의 직접 지적 물적 생산이 가능했고 또한 소비시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부를 축척하긴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경제대국이 된 것은 아닌 그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일본의 경제대국은 필연이지만.. 한국 즉 우리나라가 손에 꼽히는(물론 반대하는 분들도 있지만 15대 대국이라는 점엔 이유가 없을 것임) 경제대국이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입니다.
일본은 말하자면 무능한 군국정부치하에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군요..
일본의 자체행정력이 있었다는게, 참 큰 도움이 되었군요. 이후의 일본의 자립에 있어서나 재건에 있어서나. 그런게 전혀 부재했던 한국과 비교하면... 하긴 한국에 그런걸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긴 했습니다만서도...
좋은 글입니다. 일본은 패망 직후인 1946년에도 경제규모 세계7위(4위권과 큰 차이가 없는)였죠. 농업국가라는 건 미국인들만의 시각이었을 뿐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음.. 제가 잘 모르니 함부로 이야기를 하면 안되긴 합니다만 그 시기면 온 유럽은 쑥대밭이고 중국은 내전일보직전에 쑥대밭이고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국가들이 해방을 못했으니 그렇게 순위가 정해진 것 아닌가요?
유럽이 쑥대밭이긴 했지만 일본도 마찬가지였고, 중국도 내전 종결된 다음에도 경제순위가 급성장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고, 대부분의 식민지국가들이 당시 독립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 국가들은 독립 후에도 주목할 만한 경제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으.. 그 안습한 일본군의 공업, 보급과는 사뭇다른 모습에 혼란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