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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 はるみ(みやこ はるみ、1948年(昭和23年)2月22日 - )は、日本の女性演歌歌手、音楽プロデューサー。本名は北村 春美(きたむら はるみ)。京都市生まれ。レコード会社は日本コロムビア。所属事務所は「コロムビア音楽芸能」「サンミュージックプロダクション」「プロデュースハウス都」を経て現在は再びサンミュージック。「はるみ節」と呼ばれる独特の力強い歌唱法を持ち、昭和後期を代表する女性演歌歌手として数多くのヒット曲を世に送った。
「アンコ椿は恋の花」 「涙の連絡船」「好きになった人」「北の宿から」「大阪しぐれ」「浪花恋しぐれ」の6曲がミリオンセラー(公称セールス)を記録している。
*ミリオンセラー[million seller] ① 밀리언 셀러 ② 레코드나 서적 등에서 100만 매·권 이상 팔린 인기 상품
来歴
在日韓国人の父(李正次)、日本人の母(北村松代)の間に生まれたハーフ。北村春美の名で京都市立乾隆小学校へ通い、京都市立嘉楽中学校の卒業証書を手にした際はじめて自身の本名が李春美であることを知る。
5歳のとき、芸能好きの母親によって日本舞踊とバレエを習いはじめる。6歳の6月6日からは母親から浪曲と民謡を直接指導されるようになった。
洛陽女子高等学校の学校長(当時)は、いきなり「歌手になります!」と言って中退したと語る。同時期の若者には頻繁にみられた言動で、そのうちの一人と高をくくっていたという。在学当時は歌うことに傾倒し成績は芳しくなかった。
1963年、第14回コロムビア全国歌謡コンクールにて優勝。
1964年、「困るのことヨ」でデビュー。
同年「アンコ椿は恋の花」がミリオンセラーの大ヒットを記録し、
第6回日本レコード大賞・新人賞を獲得。
「はるみ節」と呼ばれる、うなり声のような力強いこぶし回しや、波打つような深いビブラートが特徴的。
昭和40年代〜50年代にかけて数多くのヒット曲を生み、名実ともに日本を代表する女性演歌歌手となった。
https://www.youtube.com/watch?v=RLelC5By3so
大阪しぐれ 都はるみ
https://www.youtube.com/watch?v=bvGzHluGit4
예술혼을 위하여, 일본 현직 의원 트위터에 담긴 메시지
이일영 ・ 2019. 8. 8. 21:14
일본의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아버지 이종택(李鐘澤1904-1987)은 한국인이었으며 일본 이름은 마츠다 세이지(松田 正次)였다. 그는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으로 이주하여 직물 기술자로 일하였다. 너무나 근면하고 눈썰미가 깊었던 그는 엄격한 일본 기술자들도 인정한 기술로 작은 직물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직물공장에 일하던 성실한 마츠시로(松代. 1919~2005)라는 여공이 있었다.
바로 그와 결혼하여 1948년 미야코 하루미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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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는 어머니 타미(タミ)와 아버지 나카타니 도미타로(中谷 冨太郎) 사이에서 1919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시카와 현 코마츠시로 이사하였다. 아츠시로가 네 살 때 부모는 이혼하였다. 이후 하루미의 외할머니 타미(タミ)는 기타무라 조사부로(北村 助三郎)와 재혼하여 딸(하루미 어머니 마츠시로)과 함께 교토로 돌아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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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1948~)의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며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이다.
그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 보다 11살 아래의 나이였다. 이와 같은 하루미는 1964년 16세에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제14회 가요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곤란한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로 데뷔하였다. 같은 해 10월 발표한 일본 이즈반도(伊豆半島)의 동백꽃으로 유명한 이즈오섬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이라는 노래로 일본 열도를 뒤흔들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이 155만 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첫 출장하였다. 이후 1984년까지 20년 연속 홍백가합전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인기 정상의 가수가 되었다.
이후 1973년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이적한 미야코 하루미는 1976년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적인 가요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 판매 143만 장이라는 큰 흥행을 가져왔다. 이 노래는 12월 엄동의 겨울에 발표되어 추운 겨울 연인을 향한 애틋한 여심을 노래한 대중가요로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야코 하루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에 1976년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다. 여기서 잠시 짚고 가야 하는 대목이 있다.
1969년 11월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면서 미야코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사의 파문이 너무나 컸다. 당시 (주간 평범) 잡지는 1959년에 창간된 잡지로 1960년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는 인기 잡지였다. 이에 음반회사는 물론 기획사와 언론에 이르기까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내용에 대하여 가수의 생명이 끝이 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전역에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와 같은 사실이 1976년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되었을 당시 극심한 논란을 가져왔다. 이는 1976년 12월 9일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 산케이신문에서 발행하는 주간 산케이에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다.) (이러한 하루미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미야코 하루미는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대상을 받았다. 이때 하루미는 이즈오섬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을 부를 때마다 환호하던 함성과 '눈물의 연락선'과 '북쪽의 집에서'를 부를 때 함께 울던 그 많은 눈물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마디 말에 차가운 냉소로 돌아서는 비정함을 바라보며 당시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 하였다.
이때 미야코 하루미에게 다가온 가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였다. 당시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하루미에게 히바리가 전했던 말은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 마)였다.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의 격려를 안고 시련을 견딘 미야코 하루미는 그해 마지막 날 대망의 NHK 홍백가합전에서 출전자의 맨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오오토리(大トリ)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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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로 인정받는 NHK홍백가합전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한다. NHK홍백가합전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시도되었던 1945년 홍백음악시’를 바탕으로 1951년 NHK 라디오 방송에서 첫 회가 시작되었다. 이어 1953년 NHK TV가 개국되면서 3회부터는 TV 프로가 되어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지난해 2018년 69회의 방송을 기록한 일본의 대표적인 방송 프로그램이다.
이와 같은 일본 대표 프로그램에 일본 가수가 아닌 해외 가수가 처음 출전한 사례는 이탈리아 소녀 가수 로잔나(1950-)와 일본의 남성 가수 히데(1942-1990)가 결성한 보사노바 듀오 히데 & 로잔나가 1970년 백팀으로 첫 출연하였다. 이후 이들은 1975년 결혼하여 부부 듀오로 활동하였다. 이후 1972년 대만 여가수 오양 페이페이(欧陽菲菲1949-)와 1973년 홍콩 여가수 아그네스 찬(1955-)이 그리고 1979년 대만 여가수 주디 온그(翁倩玉1959-)와 1985년 등려군으로 잘 알려진 대만의 전설적인 여가수 덩리 쥔(鄧麗君1953-1995)이 출전하였다.
우리나라 가수로는 1987년 조용필이 처음 출전하여 그의 히트곡 창밖의 여자를 불렀다. 이후 1988년 계은숙이 1989년 김연자와 패티킴이 출전하였다. 특히 조용필은 1990년까지 한국 가수로는 최초 출전자 기록과 함께 4회 연속 출연하였다. 계은숙은 1994년까지 7회 연속 김연자는 3회 출전하였다. 이후 2002년에는 소녀 가수 보아가 출전하였으며, 2004년에는 이정현이, 그리고 2008년 남성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가 출전하였다. 이후 2011년 동방신기의 3번째 출전과 함께 소녀그룹 소녀시대와 카라가 출전하면서 한류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한일 두 나라의 냉각된 관계를 반영하듯 일본 NHK홍백가합전에 한국 가수의 출전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이후 2017년 한국 9인조 걸그룹 트와이스가 6년 만에 다시 출전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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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일본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NHK홍백가합전'의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은 1984년 제35회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던 미야코 하루미가 출전하여 눈물로 불렀던 노래 '부부 고갯길(夫婦坂)'이 방송되던 시점의 84.4%라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당시 종합 사회를 맡았던 우부가타 게이치(生方恵一) 아나운서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던 시점에 미야코 하루미를 미소라 히바리로 바꾸어 호명한 사건 이른바 미소라 히바리 생방송 사건이 벌어져 다음 해 아나운서 우부가타 게이치가 오사카 지국으로 좌천성 이동으로 퇴직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미소라 히바리는 남동생의 조직폭력단 연관 사건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에서 더욱 많은 이야기가 넘쳐났다.
이와 같은 미야코 하루미는 1979년 작곡가이며 가수이었던 아사즈키 히로오미(1944-2009)와 결혼한 이후 1980년 '오사카 가을비'로 제22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가창 상을 받았다. 이때 남편 이름을 마야지키 타다시(宮崎雅) 라는 예명으로 바꾸어 1981년 듀엣곡 '두 사람의 오사카(ふたりの大阪)'를 발표하면서 대 히트를 기록하였지만 1982년 이혼하였다.
이후 인기 절정의 상태에 있던 그녀가 1984년 3월 36살의 나이에 보통의 아줌마가 되겠다며 갑자기 가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때 다시 등장한 인물이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였다. 11살의 나이가 어린 미야코 하루미는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지난 1976년 레코드 대상 수상 시기에 재일 한국인 문제로 언론의 뭇매를 맡으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을 때 미소라 히바리가 (여러 이야기가 쓰였네) (하지만 열심히 노래해)라는 말에 이어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 마)라는 깊은 관심으로 격려하였다.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가 미야코 하루미의 은퇴 이야기를 듣고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 며 비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렇게 무대를 떠난 미야코 하루미는 1987년 프로듀서로 활동하였다. 당시 17살의 신인가수 야마토 사쿠라(1970-)를 발굴하여 후지 TV가 주관하는 FNS 가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또한, 한국 가수 김연자(金蓮子1959-)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가요계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이때 1989년 6월 24일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죽음을 전해 듣고 미야코 하루미가 가수 복귀를 선언하였다.
여기서 신중하게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필자가 확인한 여러 자료에 의하면 미야코 하루미는 11살이 많은 미소라 히바리와 상당한 의미가 있는 많은 접촉이 있었다. 그중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재일 한국인 가수로 공개적으로 알려졌던 미야코 하루미가 가수의 인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마다 미소라 히바리가 등장한 사실이다. 이는 미야코 하루미가 1976년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던 시기에 재일 한국인에게는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와 1984년 미야코 하루미가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 등장한 미소라 히바리가 전한 의미심장한 말들이 쉽게 흘려보내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까닭이다.
또한, 이와 같은 미야코 하루미가 작곡가 손목인에게 전한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신빙성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중하게 모든 자료와 역사적 행간에 접근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이는 현재 일본 입헌민주당 소속 참의원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1952-)가 1994년에 펴낸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歌屋 都はるみ)라는 책을 살펴보다가 의외의 사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리타 요시후는 꼼꼼한 취재를 통하여 미야코 하루미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와 가수의 음악에 담긴 세세한 이야기들을 논픽션 형식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미소라 히바라와의 만남에서부터 미야코 하루미의 데뷔와 은퇴 선언 복귀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아리타 요시후는 이 책을 출판한 이후 미야코 하루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아리타 요시후 의원의 트위터를 우연히 살펴 가다 지난 2014년 6월 8일 트위터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트위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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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 하루미가 일본 레코드 대상을 (북쪽의 숙소에서) 노래로 수상하기 전에
'대상은 일본과 함께하는 일본인에게 주는 것' 이라고 업계에 음침한 차별이 있었다.
이에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하루미는 가수를 그만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때 미소라 히바리는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 마 '하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都はるみさんが日本レコード大賞を「北の宿から」で受賞する前のこと。
「大賞は日本とついているように日本人に与えるもの」と業界で陰湿な差別があった。
父が韓国人のはるみさんは歌手をやめようと思った。
そのとき美空ひばりさんは「私だってイヤなことがいっぱいあった。たじろぐな」と声をかけ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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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올린 트위터의 댓글에는 의원이 남의 개인 정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할 짓이냐 등으로 퍼붓는 일본인 팔로우의 원색적인 뭇매를 맞고 있었다.
필자는 트위터 아이디@aritayoshifu로 자신의 실명 有田芳生을 밝힌 일본 현역 의원이 올린 트위터 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일본 현역 의원이 게시한 트위터의 내용이 마치 한국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메시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야코 하루미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한국의 2인조 남성 그룹 동방신기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고 유일하게 전한 살아있는 장본인이다. 이와 같은 미야코 하루미의 음악과 삶의 이야기를 펴낸 일본의 현직 의원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트위터에 올려놓은 사실 앞에 우리는 정작 너무나 무심한 세월을 오래도록 흘려보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1952-)의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歌屋 都はるみ) (출처 google)
[출처] 예술혼을 위하여 (167) 일본 현직 의원 트위터에 담긴 메시지|작성자 이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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