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무채색이다. 원주민은 소수이고 이주 정착민은 다수라서 그럴까. 원도시에 빼곡하게 들어찬 원룸 아파트는 숲을 이루었다. 콘크리트 가지 위로 날아가는 건 까마귀고 낮게 포복하며 영토를 사수하는 건 고양이다. 원룸과 아파트에 사는 조선소 노동자는 출퇴근할 때 말 없는 표정으로 오간다. 그들이 웃는 얼굴을 보일 때는 길에 서서 통화하거나 술집에서 동료들과 마주 앉았을 때였다. 원주민의 자식은 섬을 떠났고 젊은 층인 노동자는 오랫동안 섬에서 살 생각은 없다. 꿈을 키우기 위해서든지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자 낯선 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노년의 표정은 얼굴 근육이 굳어서 그런지 몰라도 거리에서 활어처럼 튀는 웃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가끔 골목에서 주민 간의 대화를 듣고 창문을 열어 내려다본 적이 있다. 차의 지붕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섬에서의 인간관계는 원래부터 살았거나 막 들어온 사람이거나 공통의 관심사는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젊은 층은 젊은 대로 이미 인생의 속살을 익히 알아버린 탓도 있고 주민의 경우 생산적인 일에서 떠나 집터를 밀고 세운 원룸의 월세가 오르기만 기다리는 쪽이었다. 수입이 늘어나는 외에 자신이 무덤에 들어갈 날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조선 경기가 살아난다 해도 섬의 표정은 변할 것 같지 않다. 유일하게 표정을 보이는 건 길에 내놓은 화분과 가로수다. 저것들은 철 따라 싹을 틔우고 잎을 달았다가 여지없이 꽃을 터뜨린다. 열매를 달고 봄부터 여름 내내 매연에 시달린 몸을 주무르며 뽐내지만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흘낏 고개 들어 쳐다볼 뿐 감동스럽게 여기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처진 자신의 어깨나 늘어난 주름살을 머릿속으로 가늠해 볼 뿐이다. 섬은 현대의 사회 얼굴과 닮은 표정을 지닌 것 같다. 즐겁거나 기쁘고 보람된 일은 텔레비전의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탄 용감한 시민을 볼 때나 인간극장의 고난을 헤쳐온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 잠깐 뿐이다. 삶의 의욕이란 화석화된 원시의 유물처럼 땅속 깊이 묻혀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물에 잠긴 바위는 중천의 햇빛에 반사되어 검게 빛났다. 바다는 대체로 잔잔했는데 며칠 전 위에서 본 낚싯배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중력을 밀어붙여 끊임없이 짠물을 밀어 올렸다. 찰방이며 해변의 호박돌을 적시던 파도는 이따금 세게 밀어붙였다. 듣고 있자니 무슨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엔 여기까지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지난번 경험으로 목도리와 장갑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하니 바람이 찼다. 장갑을 가져오지 않은 게 금세 후회됐다. 도로 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산책로 아래 바다와 마주 보는 자리의 암자에선 독경 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바람은 북쪽에서 부는 것 같기도 반대쪽에서 부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도 등대까지 가기엔 그른 듯싶다. 조금 가다 바람을 피하려고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찬기운이 사라지니 몸이 따듯해진다. 산책로 오른편의 내리막엔 주민들이 일군 텃밭이 조각보처럼 얼기설기 널브러졌다. 자기 밭의 경계 표시를 하느라 폐 그물을 주워다 말뚝을 박아 둘러쳤다. 밭 터서리에는 농기구나 비료를 넣는 농막을 지었는데 사람이 들어갈 공간은 못 되고 샌드위치 패널로 대충 비바람을 가린 정도였다. 밭에는 겨울인데 마늘 양파가 한 자 넘게 키를 세우고 자란다. B군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내려가는 김에 더 내려가 본다. 경사진 좁은 길은 텃밭 농사꾼과 낚시꾼이 다져놓아 단단한 황톳길이다. 무게가 앞으로 쏠려 내딛는 걸음이 수월하다 보니 자꾸 내려갔다. 얼핏 보니 애기 무덤이 보였다. 마른풀로 덮인 무덤 주위는 해마다 풀을 베는지 말끔했다. 뱀 껍질을 닮은 해송 사이로 바다가 나타났다. 다른 날보다 많은 화물선이 수평선 위에 간격을 두고 항해에 지친 몸을 쉬고 있다.
바위가 차지한 해변 구석에는 떠내려온 쓰레기가 산처럼 쌓였다. 물에 뜨는 스티로폼 부표 플라스틱은 물살에 밀려 이리저리 표류하다 예까지 올라온 거였다. 수산업 재료를 단기간에 썩는 친환경 재료로 만든다지만 단가가 문제였다. 내가 해온 조경도 그렇다. 나무를 굴취하는 데 고무바, 굵은 철사를 사용하는데 해마다 전국의 산야에서 캐는 나무의 숫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굴취 재료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분을 떠 캔 나무를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감싼 고무바와 철사를 그대로 둔 채 땅에 심는다. 친환경 재료가 나왔어도 몇 곱절의 재료비를 부담할 업자는 없다.
물에서 떨어진 너럭바위 틈에 어린 해송이 자란다. 돌 틈에 날아온 흙가루와 물기를 양분으로 솔씨가 터를 잡은 거다. 옆에 난대성 나무도 자리 잡았는데 그것의 이름은 모르겠다. 생명력은 끈질겨서 물기가 있는 틈이면 어디서도 싹을 내민다. 기후 변화 위기를 걱정하지만 초록별의 대기 안에서 저런 생명의 분출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때 지구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바이러스와 미생물의 인간을 향한 공격은 실은 인간이 그들의 영역을 침입한 결과로 나타난 반격이다. 기후 위기는 바이러스 대처를 하는 각국의 정책 중요도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당장의 현실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기후는 한 번 무너지면 백신이고 부스터 샷이고 상대가 되지 않는다. 스웨덴의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어쩌면 지구를 살리는 스승이 될지도 모른다. 바닷가 위로는 해송이 구 할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관목 크기의 잎이 기름하고 두꺼운 나무가 자라는데 어제 식물원에서 본 돈나무와 닮았다. 강아지풀이 여기까지 꼬리 치며 따라와 바위틈에서 바람을 맞고 좋아라 한다. 남도의 식생은 상록활엽수가 많으니 중부의 식생과 차이가 크다. B군의 산야에서 흔히 보는 나무가 여기선 드물었다.
바닷가에서 오래 머물렀다. 올라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는데 실제 오르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 쓰는 일이 갈수록 겁부터 난다. 나이는 숫자니 청춘은 육십부터 인생 이모작이니 젊어 보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이일 뿐이고 사회에서 6이라는 숫자는 배제 제외의 대상이다. 이모작은 은퇴하고도 먹고살지 못해 구직을 기웃거리거나 리어카를 밀고 폐지를 줍는 이모작이다. 백세 시대의 가난한 노인은 이모작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모작을 해야 할 지경이다. 럭셔리한 실버텔에서 넉넉한 말년을 즐기는 노인이 1%인 것처럼 노익장을 뽐내는 노인은 특수한 개인이다. 대부분 노인은 늘어난 수명을 저주하다 생을 접는다. 나도 사회의 통계를 비껴갈 수 없는 개인이다. 조만간 노년의 통계에 들어갈 테지만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고 싶은 바람을 가진다. 누구나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지만. 하고 있는 수영을 오래 했으면 좋겠다.
두 번 쉬고 오르니 금세 산책길과 만났다. 올라오니 바람은 여전히 차다. 더 걸으려던 마음이 자라목처럼 움츠러든다.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 보니 노간주나무가 보이고 떡갈나무도 있다. 주변의 식생은 한 곳만 보아선 코끼리 다리 만지기다. 좀 더 살피기로 한다. 길가 전망 테크에 한떼의 사람이 모여 있다. 조각 공원에선 여행객과 주민이 쉽게 구별된다. 다른 고장에서 놀러 온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 가운에서 빠져나온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성큼성큼 걸어온다. 크게 휘두르며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지팡이 끝이 자꾸 미끄러진다. 하도 써서 고무가 달아난 모양이었다. 고무 패킹을 새로 달면 좋을 거였다. 할머니는 건너편 운동기구로 가는 참이었다. 두 발로 딛고 앞뒤로 다리를 젓는 기구에 올랐다. 뒤이어 젊은 남자가 따라오며 '어머니, 운동하시게요? 하지 마세요...' 한다. 아들이다. 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구십 가까이 보이는 나이에 대단하다. 아들은 혹시 다치는 걸 염려했지만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순전히 자신이 담당할 몫이란 걸 생각해서였을까. 늙어도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 집에서 노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있으란 말은 곱게 살다 죽으란 말과 같다. 노인은 때 맞춰 화분에 물을 주는 일만으로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동작과 판단은 굼뜨지만 의욕은 이십 대 청년의 것과 동일하다. 고령자는 사물을 기억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오래 산 만큼 경험의 양이 많다. 판단 재료가 풍부해서 판단력은 결코 낮지 않다.
노인에게 시혜적 복지를 다했다고 안심하는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다. 봉사든 일거리든 취미는 뭐라도 하는 게 삶의 의미다. 연애나 사랑, 섹스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노인을 비생산적 무노동의 잣대로만 보면 자신도 늙으면 똑같은 무기력을 경험할 거다. 살아온 과정은 달라도 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존재다. 원시 공동체의 상호부조와 연대의 전통은 무한 경쟁의 사냥터를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현대인이 배워야 할 가치라고 믿는다. 가족 중에 노인과 장애인이 비생산적인 짐이라고 여겨 굶겨 죽이진 않는다. 사회도 그러해야 건강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