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이 상을 바칩니다.
불효자 정유순 올림
어머니의 이상한 나라
(한국문학신문문학대상 효 수필 작품)
정유순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아흔 살 되시던 겨울 몹시도 춥고 눈이 많이 오기 직전에 경기도 과천 작은아들 집으로 모셔왔다. 평소에 어머니는 도회지에 사는 큰아들 집이나 작은아들 집이 답답해서 당신 눈감기 전에는 아니 가신다고 우기시던 분이었지만, 노환으로 육신이 편치 않으셔서 작은아들이 서울의 큰 병원에 가시자고 권해서 오셨다.
<어머니>
오실 때는 잠시 다녀가신 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오셨는데 며칠이 지나자 고향 가는 길을 잃어 버려 언제 우리 집이 서울이 되었냐고 자꾸만 물어 오신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고향 한 마을에 사시는 숙부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아침에 눈 떠 보니 서울로 모두 변했다”고 하신다. 먼동을 알려주던 익산의 미륵산은 어디로 갔고 어머니 친정집은 어떻게 변했는지 일상이 매우 궁금해 하신다.
<미륵산>
그도 그럴 것이 열일곱 살에 시집오셔서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으셨던 그 고향 그 집터에서 위로는 시부모 모시고 아래로 시동생 둘과 시누이 여섯을 피붙이 같이 돌보셨고, 당신의 뱃속으로 아들 둘, 딸 둘을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으니 정도 많이 들으셨다. 아시는 것은 고향에서 이웃집 마실가던 그 길과 새벽이면 교회에 가서 자식 손자 잘 되라고 기도하던 것뿐인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어 더욱 애만 태우신다.
<어머니가 직접 만든 갈대비>
함열읍 다송리 와야 고향마을 앞을 지나던 철길도 없어지고, 청동기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던 말(馬)무덤 옆으로 지나던 신작로도 없어지고, 조상 대대로 제사를 모셔오던 제실(祭室)도 없어지고, 그 넓던 종산(宗山)도 없어진 대신 그 자리에 아파트만 꽉 들어찼으며, 고향 읍내에서 보던 오일장은 아주 큰 전방으로 변했고 모두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무척이나 신기해하신다.
<와야마을 맨드라미>
아침이면 출근하는 나에게 동구 밖까지만 데려다 주고 저녁에 퇴근 할 때 모셔가라 하시면서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때로는 역정을 내시고 때로는 ‘나는 아들도 없어’하시면서 토라지신다. 그래도 큰아들 큰딸 작은딸 친손자 외손자 시동생 시누이 안부 전화라도 오는 날이면 화색이 돌고 힘이 솟아나는 것 같으시다.
<수선화>
저녁에 일직 퇴근하는 날이면 일부러 어머니보고 등이며 팔이며 발가락이며 주물러 달라고 보채본다. 시동생 시누이 뒤치다꺼리에 자기가 난 자식들은 젖꼭지 물릴 때만 빼 놓고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으셔서 ‘너는 할머니가 버릇을 잘못 드려서…’한마디 하시면서도 나의 몸 구석구석 더듬어 보실 때 당신도 나도 행복감에 젖어 본다.
<어머니와 장모님>
지난 일요일에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제부도에 가셔서 해수탕에 몸 담그시고 왕소금에 왕새우를 구워서 맛있게 드시고도 가는 길목이나 오는 길목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을 고향 산천과 비교해 보시고 ‘내가 왜 이런 다냐. 우리 집 우리 동네는 어디 가고 내가 왜 낮선 곳을 헤매고 다닌 다냐.’ 하신다.
<제부도 매바위>
어느 날 상처(喪妻)하고 풍을 맞아 수전증이 심하신 당숙 한 분이 서울에 사는 딸네 집에 오셨다가 어머니 보시려고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반가워 눈물을 몰래 훔치시던 그 모습에 불효하는 자식의 마음이 무거웠다. 당신은 이상한 나라에 오셔서 아들이랑 계시지만 모든 것이 답답하여 매일 며느리랑 과천 서울대공원길 산책도 해보시지만 성에 차지도 않으신다. ‘처마 끝만큼’도 아니 가셨단다.
<함열향교 입구>
어머니! 고향 담장 옆에 살구꽃이 만발하고 고향 집 마당 구석에 자목련이 피면은 모든 일 접어두고 당신 모시고 고향에 다녀올게요. 이 아들은 ‘당신의 품이 항상 나의 포근한 고향이지요.’하면서 품으로 마구 파고든다. 지금도 어머니의 팔베개가 한없이 그립다. 어릴 때 여름이면 땀띠 난 등을 농사일에 투박해진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시던 그 손길이 정말 그립다. 아궁이에 감자며 고구마며 구워 주시던 그때 그 모습이 아련하다.
<파도(정동진)>
풍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된 시어머니 병시중 다 들다가 먼저 보내시었으며, 예순 여덟에 홀로 된 시아버지도 여든 살 넘어 대 소변 수발 다 하시고 히스테릭한 그 투정 다 받아넘기시면서, 대처에 사는 자식들 어쩌다 집에 오면 행여나 책이라도 잡히지 않으시려고 내색 한번 안 하시던 우리 어머니! 여든 일곱에 할아버지 가시던 날이 시집와서 그 때까지 이어 지던 당신의 부뚜막 식사가 끝나는 날이었지만, 아버지가 예순 여섯 살에 먼저 가실 때 보다 더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연꽃>
우리 아버지도 젊었을 때 일제의 신교육에 맞서 집안 아래채에 글방을 만들어 놓고 마을 아이들에게 한글과 천자문을 비밀리에 가르치시다가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생을 한 후 만주 빈강성(濱江省, 현 헤이룽장성 남부지역) 소령(小嶺)지역으로 도피해 해방되어 집에 오실 때까지 교포들을 모여 놓고 한글을 가르치셨고 민족의 독립정신을 심어 주셨다.
<중국 헤이룽장성(당시 빈장성) 지도>
어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남편이 인민군에 붙잡혀 생사를 넘나들 때 그 뒷바라지를 다 하셨음은 물론, 젊어서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집에 계시던 안 계시던 평생 부모님과 온 가족을 향해 정성을 다해 온 당신의 숭고한 사랑과 효성을 어느 자식이 어느 며느리가 흉내라도 내랴. 또 그것을 누가 배워서 따라 하랴. 집(House)만 있고 가정(Home)이 사라지는 지금 이 세태에…
<고려청자모란무늬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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