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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 선택적 무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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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선택적 무지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얼마 가지 않아 파괴될 텐데
그것을 모르고 천하태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모름을 꼬집으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이 모름을 묵상하며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당신 아들을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아들이 술과 마약과 게임 중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달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간신히 시간을 내어 방문했는데
그분의 아들은 언제 오라고 했냐며 저를 박대합니다.
그때 제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런 그가 밉거나 그에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주님처럼 그를 보고서 애처로워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그 당시 평화의 길을 모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고,
평화의 길을 알려주려 오신 당신을 몰라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평화의 길을 모르고,
아직도 평화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이 주님임을 거부합니다.
공존하려고 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형제를 적으로 만듭니다.
지금의 전쟁은 하마스가 미사일 공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왜 공격했겠습니까? 공존하고자 했는데도 그랬겠습니까?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이미 오랫동안 살고 있던 곳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나라를 세우면서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기에
정의로운 족속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 미안해야 정상이며,
같이 사는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몰아내려 하고 박해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선민이라면 공동선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선을 나눴어야 했는데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선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하는데
형이라는 자가 부모의 유산을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의 이런 잘못된 의식은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집사여야 하고,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들이어야 하며,
미나를 잘 바치는 종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나무라고,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거라고 예수께서 나무라자
오히려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하느님 아들마저 죽이려 하고 있지요.
이 예수가 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 외에는 모두가 형제들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힘없는 자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라고 하자,
이들은 그런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죽이려 하고 있지요.
아무튼 그들은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제 생각에 그 무지는 선택적 무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고 싶지 않은 무지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하느님 아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면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면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다 내려놔야 하기에 모르는 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선택적 무지의 잘못을 많이 범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채 살려는 무지 말입니다.
또한 모르고 살면 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택된 무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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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임과 동시에, 회개의 결단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주님!
오늘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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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면서도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만능주의, 권력남용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약자들과의 대화의 단절 등 곳곳을 바라보시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참된 평화를 갈망하며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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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최한 세계 주교 시노드의 1차 회기가 끝났습니다.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서 시노드는 2024년까지 계속 된다고 합니다. 시노드는 교회가 처한 여러 현안에 대해서 지역별, 대륙별, 보편교회의 차원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시노드는 ‘교회’에 대한 건강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한 교회에게는 ‘건강검진’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계명인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찾고, 거기에서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가정은 ‘작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키워지고, 그런 가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문화와 역사를 선도하고, 시대의 징표를 드러낼 것입니다.
병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권위와 독선이라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교만과 욕망이라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맛을 잃어버려 거리에 버려지는 교회입니다. 기도의 맛을 잃어버린 교회는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나눔의 맛을 잃어버린 교회는 권력의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교회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감옥에 갇힌 이를 외면하는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강도를 당해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을 내밀지 않는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입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첨탑에 상징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의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병든 교회는 마치 철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병든 교회에서는 ‘믿음, 희망, 사랑’의 꽃이 피지 못할 것입니다. 병든 교회에서는 가족이 함께 미사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성서를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탄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문화와 역사를 선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노드의 진단 결과 ‘성직주의’가 있었습니다. 성직주의에 대한 좋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직의 목적과 지향은 복음 선포 사명에 있다. 사제가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사제의 존재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위계적 서열에 집착하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제는 미사를 집전한다. 집전자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변화와 쇄신의 지름길이다. 반복되는 직무에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미사를 거행할 위험이 많다. 하루의 일과에 지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도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위해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고 축복하는 마음과 태도로 미사를 정성 들여 거행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제는 거룩해질 것이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있다.
사제는 무엇보다 매개자(Mediator)다. 신학적 의미의 ‘중재자’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현실의 사제는 인정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쉽다. 늘 본당 공동체의 중심으로 살아와서, 모든 시선과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원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 간의 갈등 역시 인정 투쟁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제는 중심이 되기보다 변방에서 연결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 구조와 성직자 문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고, 미사에 정성을 기울이고, 중심이 아니라 연결하는 삶을 살아갈 때 사제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가져오는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다. 세상과 환경이 강요하기 전에 우리 사제들이 변화와 쇄신의 길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을까.”
좋은 성직자, 건강한 성직자가 있습니다. 나쁜 성직자, 병든 성직자도 있습니다. 성직주의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으로 20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직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고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혜를 모아 내년에 폐막이 되는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 건강한 교회를 위한 다양한 처방전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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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오늘 여러분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오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찾아오신 때를 너희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신 때를 아는 것이 바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열심히 앞으로 달려갑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뛰고, 또는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앞의 일입니다. 앞의 일은 내가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앞날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투신합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합니까? 무엇이 지금 간직하고 잘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까?
가지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가질 수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고 그것이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가끔 가지려고 하는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가려집니다.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려고 하는 많은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것만이 나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꼭 유대 사람들이 왕을 가지려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사랑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기도하고 오늘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감사함이 바로 평화입니다. 아멘.
용서란
“남의 모카신발을 신고
십 리를 걸어가 보지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
-아메리카 인디언의 속담-
그 사람의 처지에 서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한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상황을 경험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는 우리를 자만이나 오류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보려 노력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면 진정한 용서 또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는 내 처지에서가 아니라 저쪽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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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암 걸린 사람이 다리 잘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다리가 있어서.”
다리 잘린 사람이 암 걸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암이 아니라서.”
각자 다행이어서 참 다행이다.(박미경, ‘생각이 달라도 괜찮아.’)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행이다’라는 말보다, ‘희망이 없어, 끝장이야.’ 등의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주변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나의 환경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요? 희망이 없다고, 절망적이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행이다, 감사하다’를 외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어야 할까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오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거룩한 도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보지 않고 절망과 좌절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면, 그런 모습에서 평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행이다,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주님, 희망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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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싸움을 자제하는 것이 싸움에서 빠져나오기보다 쉽다(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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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평화의 전사
-평화사랑, 평화훈련, 평화습관-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기가 이리도 힘든가 봅니다. 인류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무지의 어리석음에 기인한 참혹한 전쟁입니다. 누구나 전쟁없는, 평화를 꿈꾸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삶은 평화다”가 아닌 “삶은 전쟁이다” 함이 맞을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생존자체가 전쟁입니다. 어제 발표된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난이후 오늘까지 전쟁들은 세계 많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쟁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크게 느끼지 못하지만, 오늘 여전히 바로 가까이에서 우리 모드 응답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성지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다. 너무 고통스럽다. 모두 한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 백성이 아닌가. 이들 형제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 권리를 갖고 있다.”
요지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은 심정의 교황님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며 우십니다. 복음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마디는 한번도 안나오는데 이렇게 우셨다는 적나라한 표현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면 세상 곳곳에서 전개되는 비극적 전쟁과 불행에 여전히 우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복음만 아니라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도 전쟁이야기입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안티오코스 임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마타티아스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나와 내 아이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마침내 마타티아스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를 죽이고 제단도 허문다음 그 아들들과 지지하는 이들을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에 자리잡으니 이제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마치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력도 불사했던 선조들을 생각하면 섣불리 평화의 잣대로 판단하기가 참 어렵고 복잡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상황입니다. 반복되는 예루살렘의 불행이요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언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철이나 평화 공존을 누릴지 참 전망하기 힘든 인간 존재들입니다. 후대에 루카 복음사가는 70년대 로마제국에 의해 초토화된 예루살렘을 묵상하며 이 복음서를 썼을 것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향합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없이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평화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이야말로 환대의 집이자 평화의 집입니다.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바로 거기 평화의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부단히 수도원을 찾아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와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주님의 갈망도 우리의 소원도 전인류의 평화입니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는 감정이나 기분이나 감상이 아닙니다. 참으로 깨어 지속적인 평화의 선택이요, 평화의 사랑이요, 평화의 공부요. 평화의 노력, 평화의 훈련이요, 평화의 습관입니다. 평생공부가 평화요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의 평화의 전사로 평생 평화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참으로 온 인류의 으뜸가치가 공존공생의 평화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평화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하느님 역시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화답송 첫절이 평화로 빛나는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느님은 찬란히 빛나시네.”(시편50,1-2)
이런 하느님을 잊기에 무지로 인해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이 부끄럽게도 끊임없이 전쟁을 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평화의 땅, 영적 시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평화로 무장시키시어 당신 평화의 전사, 평화의 사도로 세상 영적전쟁터에 파견하십니다. 어제 성녀 체칠리아 축일에 써놓은 “겨울 배나무 예찬”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쩜
저리도
담담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그 크고 탐스러운 배열매들
모두
사랑의 선물로 내놓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침묵중에
말없이 책임을 다한후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무념(無念),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겨울 텅빈 사랑의 배나무들
참 평화롭다
놀랍다
감동스럽다
부끄럽다
너야말로 내 겸손의 스승, 평화의 스승이구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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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한결같은 믿음
늘푸르른 희망
타오르는 사랑
밝디밝은 웃음
맑디맑은 눈물
곱디고운 마음
따사로운 눈길
품어주는 손길
함께걷는 발길
부드러운 섬김
아낌없는 나눔
내어주는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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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3.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우는 이들의 참행복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 이렇게 하심으로써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바를 몸소 증언하신 것이지요. 그분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대해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하셨지요. 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때 2,14-15 참조) 우리 주 예수님보다 큰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분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 행복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며 말씀하셨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 다음 그 이유까지 일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3. 켈트 신비 전통과 동방 그리스도교:
켈트풍의 라티스본에 도미니코회 수도승들이 출현한 것은 아주 일찍 이루어진 일이었다. 라티스본은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젊은 시절에 살면서 강의하던 곳이었다. 프란치스코회의 학자 에드워드 암스트롱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켈트풍의 영성에 많은 감화를 받았으며. 켈트풍 그리스도교의 특징, 곧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헌신, 가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세, 느슨한 조직, 대담한 선교의 열정, 자연에 대한 사랑”을 눈에 띌 정도로 재현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밖에도, 캘트인들은 아일랜드풍의 여행이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시와 음악과 노래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방랑벽으로 유명했다. 골롬바노 성인은 곡들을 작곡했고, 프란치스코는 그 곡들을 노래했다. 켈트인들은 프란치스코와 엑카르트처럼 동물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학식을 높이 평가했다. 암스트롱의 주장은 처음 듣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들여다보건대, 지중해 남부의 영향력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위를 차지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62)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친절한 지도자
1910년의 혁명 뒤 포르투갈의 자코뱅당은 신부를 체포하여 여러 시간 동안 싼타렘 감옥에 감금시켜 그 명성을 떨어뜨리려고 음모를 꾸몄으나 그 인망은 오히려 더욱 높아질 뿐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위대한 사제와 발현을 본 파티마의 아이들 사이에는 깊은 친교가 맺어졌다.
신부는 그들의 정신 생활의 초보를 가르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작은 희생을 많이 바치며 주님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가르쳤다.
신부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만일 누가 맛있고 먹음직한 음식을 권유할 때 그것은 그냥 두고 대신 내키지 않는 것을 먹고, 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 놀지 않는 것, 이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훌륭한 고행이다. 호기심으로 귀찮게 찾아와서 묻고 싶어하는 사람을 도저히 피할 길 없을 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그것을 희생으로 바쳐라"
이렇게 실질적인 지도를 해주는 친절한 페레이라 신부는 파티마에 갈적마다 반드시 루치아네 집에 들려 그녀를 북돋아 주었다. 신부는 때때로 오리왈 근처 스탈리아 부락에 살고 있는 열심한 에밀리아라는 과부를 알쥬스트렐에 보내기도 했다. 사람좋은 이 과부는 루치아를 데리고 오리왈의 사제관으로 가서 페레이라 신부의 조카와 더불어 2,3일 함께 머물기도 하였다.
이 체재중 친절한 신부는 귀중한 시간을 내어 수덕의 실천 방법을 가르치고 유익한 교훈을 주기도 하며 특은받은 이 영혼의 지도에 각별한 열의를 드러냈다. “통고의 마리아 수녀”가 된 루치아는 영신 생활 처음 시작 때의 그 지도자를 추억하면서 깊은 감사를 표명했다.
신부는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두 아이가 병상에 있을 즈음 신부는 루치아를 통하여 자부적인 마음 씀씀이와 감탄스런 권고를 보냈다.
후에 신부는 레이리아의 주교로부터 파티마의 발현과 기적에 관한 교회 심사원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발현의 진실됨을 단언하였었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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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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