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0
7월13일[연중 제1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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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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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TBLvQwwxpc
(김용원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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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가난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언젠가 장장 12~3년이나 되는 오랜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분들 앞에서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시설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오 복음 10장 8~10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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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gtcH4d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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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아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함은 곧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과 같다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도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복음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며 가난을 강조하십니다. 그러고는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그 평화가 복음입니다. 받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주는 사랑대로 돌려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더라도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복음을 누리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어떤 호수에서 똥물이 나오면 그 호수는 똥물로 가득 찹니다. 어떤 호수에서 맑은 물이 나오면 그 호수는 맑은 물로 가득 차 있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마음이 나오면 나도 그 행복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원리입니다. 주는 대로 돌려받게 되어있습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Pay It Forward: 2000)는 로스앤젤레스의 기자 크리스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재규어 자동차를 선물로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Pay it forward”, 곧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해줍니다. 기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찾아 여행을 시작하여 라스베이거스까지 다다릅니다.
이 일이 있기 넉 달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주인공 트레버는 중학교에 입학해 사회 과목 교사인 유진을 만납니다. 유진은 반 학생들에게 이 세상을 바꿀 방법을 하나씩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줍니다. 트레버는 내가 받은 선행에 대해 보답하는 대신 다른 세 사람을 위해 선행을 하는 “pay it forward”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트레버는 제리라는 노숙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념을 시도합니다.
트레버는 노숙자 제리를 마약으로부터 구해 주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끊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줄 압니다. 하지만 그는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여성에게 자신이 끊지 못하는 마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며 그 여자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살립니다. 트레버는 유진 선생님을 어머니와 연결해주고 어머니는 유진의 과거를 통해 또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한 도둑을 도왔는데, 그 도둑이 한 유명한 변호사의 딸을 살리고 그 변호사가 자신의 차를 크리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는 드디어 그 운동이 시작된 트레버를 만나 인터뷰를 합니다. 트레버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여겼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힘을 얻고 자신에게 좌절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트레버는 전에 돕지 못했던 친구를 돕다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영화는 ‘pay it forward’ 운동의 창시자인 트레버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트레버의 집에 꽃을 봉헌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의 작은 아이디어와 실천이 진정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예수님처럼 나에게 죽음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명령하신 분이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어머니와 전화를 끊을 때 항상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질 때도 그런 말을 꼭 하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당신이 좀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연스럽지 않은 그런 말에 다른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그대로 해주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보상받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억지로라도 저 때문에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큰 행복이 자신의 사랑이 거부당하고 박해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것을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더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주는 사랑이 사람들로부터 보답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랑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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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넷플렉스에서 ‘황우석의 몰락’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많이 잊혀졌지만 20년 전에 ‘황우석 박사’는 지금의 ‘BTS와 손흥민’을 능가할 만큼 대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동물 복제’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개, 소, 양’을 복제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논문을 통해서 ‘배아줄기세포’의 가능성을 발표하였습니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장기’를 배양할 수 있는 ‘만능세포’와 같았습니다. 마치 자동차의 부품과 같아서 손상된 인체의 한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뜰 수 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걸을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각종 암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황우석 박사의 ‘논문’은 광명의 빛과 같았습니다. 정부에서도 황우석 박사를 전폭 지워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의 성공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박사는 대한민국 1호 과학자로 선정되었고, 매년 30억씩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많은 기업과 독지가들이 지원을 하였고 그 규모는 1,000억이 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황우석 박사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국익은 물론,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획기적인 도약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의 업적과 연구에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 그늘은 함께 연구하던 동료 직원의 제보가 있었고, 제보를 확인하면서 방송을 하기로 한 방송국의 결정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캐나다에 있었는데 한국 사회는 크게 술렁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국익이라는 논리로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진실이 국익이라는 사람들이 대립하였습니다.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족들은 황우석 박사에게서 희망을 보았기에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가톨릭교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배아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반대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병원을 중심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였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많은 난자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난자들이 불법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난자의 매매가 이루어졌습니다. 동물의 난자와 인간의 난자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논문’의 조작이었습니다. 어떤 과학도 윤리적인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과학도 조작으로 성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황우석 박사는 국민적인 영웅에서 과욕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진실을 왜곡한 사람으로 몰락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지금 아랍 에미리트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능력과 기술을 인정한 아랍 에미리트는 황우석 박사를 초청하였고 낙타의 복제를 부탁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지 11년이 된 낙타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낙타를 복제하였습니다. 복제된 낙타들이 우리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개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개를 복제하였습니다. 개의 주인은 복제된 개를 키우면서 황우석 박사에게 감사를 드렸고, 기뻐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얼음 동굴에서 죽은 매머드의 체세포를 채취하였습니다. 매머드 복제의 성공여부는 나오지 않았지만 황우석 박사의 동물 복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황우석 박사는 자신의 과욕을 솔직하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다큐를 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희생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며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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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7-15: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권능을 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우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하신다. 주님께서 지니신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속적이던 이들이 이제 하늘 중심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이 되도록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리고 하신다. 만일에 그들이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을 단죄하셨다. 주님께서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거저 주셨으니 제자들도 그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9절) 라고 하신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면 금과 은과 돈을 지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못해서 그들이 하는 선교 활동이 인류 구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절) 이는 세속의 물건에 관심은 버리고, 참된 보물을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된다. 마음의 악행 때문에 이단 같은 다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신발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거룩한 땅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신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격도 없이 권위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말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신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사도들이 묵는 집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집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나쁜 평이 도는 사람이면 자칫 말씀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신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에는 평화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평화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들 앞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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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선포>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7-15)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선포’는 말로만 하는 선포가 아니라 ‘삶으로’ 하는 증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표징이 됩니다. <병자들 입장에서는 ‘치유의 기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지시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라는 말씀은,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라는 지시인데, 사도들이 ‘빈손’과 ‘빈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도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만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돈 걱정’을 한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일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의 모습’은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만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6-10)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자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사랑’이 답입니다.> ‘마땅한 사람’은 사도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고 천사의 도움이니까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지시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뜻입니다.> “집에 들어가면”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입니다.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는 “주님을 믿고 회개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참 평화를 얻으라고 권고하여라.”입니다. <단순히 축복하는 말이나 인사가 아니라 ‘복음 선포’이고,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자는 ‘초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복음을 전하는 이 자신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평화를 이미 누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으면서 남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될 뿐입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복음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이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과 신앙을 거부하는 집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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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이 받은 사명은 예수님의 활동에 바탕을 둡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활동은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본받아 이어 가고 이로써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이나 보따리나 옷, 신발이나 지팡이처럼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마련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오로지 사명에 집중하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평화를 빌어 주는 것은 축복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다.’는 것은 제자들의 축복을 바라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축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때에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충실히 따르며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실천할 때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지만 이를 거부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축복은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선포는 우리 또한 동참하도록 복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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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송제호 야고보 신부님]
<먼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지침들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시고, 그리고 전대에 돈을 넣어 다니지 말라고 하시고,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세례를 받은 우리들 역시도 제자의 사명을 받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세를 바로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무한하신 은총은 세례를 통해서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지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례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거저 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에게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를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정신은 바로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이 항아리라고 한다면, 그 항아리 안에 재산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욕망만 담아둔다면, 그 항아리에는 더는 하느님 나라가 있을 공간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항아리 안에 가득 찬 것들 외에는 더는 볼 수도 없고, 설사 본다고 하더라도 절대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이고, 또 계속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변을 비워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이라고 하면 우리의 생활태도와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변화로 발걸음을 재촉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풍부한 은총은 이웃 모두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채워지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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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맡겨진 일을 알려주십니다. 이 일들은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앓고 있던 이들을 만나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의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친구였던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있던 이들로부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일을 이제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감탄할 만한 일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맡아 할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뜻은 이렇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아라, 보상을 바라지 말아라, 인정받기를 바라지 말아라, 행세하려고 하지 말아라, 티내지 말아라, 생색내지 말아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할 때, 그것은 주님의 일이기에, 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욕심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어깨가 으쓱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대단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임금을 모시고 가는 당나귀’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절을 하고 알아보지만, 그것은 당나귀 때문이 아니라 그 등에 타고 있는 임금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인데 가끔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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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복음서의 평면적이고 문자에 머무는 이야기를 입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여러 차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에 순례가 그저 단순한 여행이 되지 않도록 많은 것을 준비하게 됩니다.
순례의 주제를 정하고 공부도 하면서 묵상과 성경 통독으로 순례를 기다립니다. 순례를 할 때에도 주제를 깊이 생각하며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장소와 건물을 보더라도 늘 새롭게 다가오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이런 순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파견되어, 그분과 함께 떠나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은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며 같은 일을 하는 일상 말입니다. 때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유를 찾지도 못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순례의 여정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주제를 정해 주십니다. 순례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순례의 기준이며 가치, 그리고 방식입니다.
첫째는 ‘소유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채우려는 마음보다는 감사하고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머무름’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것이며 동감하는 것이고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도 서로 나누며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집착과 미련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집착과 미련은 성공과 좋은 결과만을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자기만족과 성공을 위해서 더 큰 아픔과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놓고 떠날 수 있어야 새로움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상이라는 순례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제들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함께 걸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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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 타면 종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 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에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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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의 기원’을 쓴 서인국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행복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행복인데, 여기에 음식까지 같이 먹게 되는데 어떻게 행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행복이 아닌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 안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당연히 가져야 할 삶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상황으로 얻게 될 것만이 진짜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크기만을 생각하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그마한 행복의 반복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매 순간이 행복의 통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을 누리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도 슬기롭게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돈 받고 판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물교환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받고 행복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공짜로 행복을 주셨습니다. 늘 함께하시면서 행복의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는 거저 주지 않습니다.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받을 것의 크기를 재면서 남에게 줄 행복을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면서,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일은 세상의 가치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담긴 사랑으로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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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려요>
마태오 10,7-15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려요>
하느님께든
벗님들께든
무얼 좀
받으셨습니까
마땅하진 않지만
거저 받으셨으니
감사하는 맘으로
맘껏 누리십시오
하느님께든
벗님들께든
무얼 좀
드리셨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의 것 아니고
거저 받은 거니
거저 드리십시오
생색내지 말고
아까워하지 말고
더할 나위 없이
아낌없이 기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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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방식>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파견의 목적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하늘나라라 가까이 온 것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요 기쁜 소식일까요?
슬프게도 그 기쁜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희소식이 아니고 오히려 슬픈 소식이거나 아주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쉬운 예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 하느님께 돌아갈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바로 기꺼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꼭 종말론적인 의미가 아닐지라도 제 생각에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그런 의미일지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이 세상 방식이나 가치들을 다 폐기해야 하는 것이기에 기꺼워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하늘나라 방식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을 거저 나누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거저 주지 못한다면 아직 이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전히 이 세상 방식과 가치대로 살려는 것이겠지요.
두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파견되어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파견의식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견받아 떠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야훼이레 믿음이 있어야 하며, 내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환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머물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훌훌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평화롭게 현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는 것인데 힘을 겨루고 싸우는 식이여서는 안 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 가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선교하라고 하였지요.
여건이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환영하지 않으면 겸손하고 평화롭게 현존하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길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이에 마주 오던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하니 그 할머니는 대뜸 “당신도 지옥” 이렇게 대꾸하는 거였습니다.
천당 얘기만 하면 되고 지옥 얘기는 할 필요 없습니다. 천당의 행복만 전해주고 지옥의 저주는 입 밖에 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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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한 형님, 축하드립니다!”>
- 귀향歸鄕의 여정 -
오늘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이성철 사도 요한은 제 사촌 형님이 됩니다. 저는 불암산 기슭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 살고 있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입니다. 저는 2년 전 2021년 10월 25일 여기 청담동성당에서 윤여임 엘리사벳 사촌 형수님의 미사를 봉헌하며강론했고, 2년후 오늘은 부군夫君인 요한 사촌 형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형님은 지난 7월11일 저희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날 선종하셨고 그날 오후 조카 글라라로부터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듣는 순간 “아, 형님은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처럼 사셨구나!”하는 찬탄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형님은 정말 베네딕도 성인처럼 한결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저는 떠나시는 형님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어제 오전 장례식장을 찾아 문상할 때. 형님의 영정사진을 보며 저절로 나온 인사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요한 형님, 선종을 축하드립니다!”
상주인 조카들에게도 ‘축하드린다’고 ‘그동안 수고많으셨다’고 축하와 더불어 위로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정말 장례식장에서 문상하면서도 “아, 정말 잘 살면 죽음도 기쁨의 축제가 될 수 있겠구나!” 크게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상주들도 찾는 조문객들도 다들 밝고 평화로운 미소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저에겐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이었고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문상하며 축하드린다 인사하기도 처음입니다.
참으로 후손들이나 후배들에게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자 유산은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요한 형님은 자녀들에게 우리 후배들에게 참 좋은 선종의 선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에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저는 삶을 “귀향歸鄕의 여정”이라 부르곤 합니다.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집인 본향本鄕으로의 귀향이라는 것입니다. 긴듯해도 강물처럼 흐르는 짧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규칙에서 제자들에게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고 살라” 말씀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충실히 살 수 있는 비결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일일일생一日一生, 오전 6시 일출과 더불어 오후 6시 일몰때까지 내 삶을 하루로 압축하여 내 현재 시점을 확인해 보는 겁니다. 저는 75세이니 오후 4시쯤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일년사계一年四季,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제 경우의 시점은 초겨울쯤 되는 듯 합니다. 바로 이렇게 삶을 압축해보면 내 삶의 시점이 확연히 드러나고, 하루하루가 참으로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게 되며, 삶의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위 제 좌우명은 다음 라틴어 세 격언으로 요약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삶의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1.Memento mori(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2.Amor fati(아모로 파티:운명을 사랑하라)
3.Carpe diem(카르페 디엠:현재를 살라)
삶은, 행복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을, 행복을, 희망을,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여 훈련하며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영혼 건강, 정신 건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하루히루 날마다 신뢰와 희망과 사랑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살 때, 주님은 우리 모두 하루하루 충실히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시어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주님, 이성철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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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c)
<온전한 내어맡김!>
오늘 복음(마태10,7-15)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떠날 때는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는 말씀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에 머물러 봅니다.
이 두 말씀이 참으로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험난한 세상인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매정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는데, 무엇을 주라는 말씀인지, 참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평화의 사도이시며, 생태계의 주보 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마태오 복음 10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기뻐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바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성프란치스코의 생애, 94쪽)
성 프란스치스코는 오늘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온 세상을 두루다니면서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기쁘고 평화롭게.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했을까?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만났고, 그 하느님께 온 존재를 내어 맡길 수 있었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의 그런 삶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성 프란치스코가 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 프란치스코처럼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 삶, 그러면서도 풍요로운 삶, 그 풍요를 거저 나누는 삶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의 원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그분께 온전한 내어맡김이 먼저 선행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않으면서도 풍요가 넘치는 삶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가능을 위해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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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94VbXPuUB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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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공짜로 받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소유하려 해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 생명의
참된 실체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언제나
빈손입니다.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천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고
떠날 우리의
짧은 여정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지나친 소유와
집착을
막아줍니다.
욕심을 비울수록
더욱더 신뢰가
싹트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진실한 생명과
진실한 구원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고 거저
나누는 것입니다.
감사함은 이렇듯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진심어린
사랑을
생명의
빈손에서
다시 만나고
나누시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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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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