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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pn=2&num=222359
김 중령에게 노고를 치하하고 필요할 때마다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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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추장소 준비에 따른 진입도로의 확장과 신설 또는 보수작업장의 충분한 공간확보, 사무실 및 숙영시설, 경계문제, 통신문제, 인원 및 장비의 보호문제, 철저한 신원조사로 DMZ 내에서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들이다.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대피시설과 훈련, 긴급사태시 지휘계통과 공사감독의 이원화, 급수문제, 전기공사문제, 월동공사에 대비한 준칙, 준수사항과 필요한 준비사항, 장비종별과 소요, 기술병과 정비지원사항 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시추공사시의 시추 간격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우선 작업장의 위치가 북한군 GP에서 불과 1.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남방한계선의 철책선보다 전방에 있는 점이었다. 적업장을 오고갈 때마다 북한군에게 관측될 염려는 물론 북한군의 접근이 용이한 지형에서 오는 게 공사진행상의 어려운 점이었다.
그래서 사단에서 모든 경계를 해가면서 철책선을 작업장 전방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북한군의 관측에 걸리지 않도록 위장막을 쳐 가며 도로공사와 병행하고 있다.
북한군의 도발에 철저히 대비해서 필요시 작전준비를 갖추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 일전도 불사할 전투태세 까지 갖추고 이 작업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제 2 땅굴 (1975년 3월 19일 발견)
2월 15일 토요일 (북서풍, 맑음, -4℃)
아침 일찍 대대장과 같이 현장에 올라가 일명 옆굴이라고도 부르는 북한 땅굴 차단갱인 관통갱 공사준비 상태와 장비투입을 확인했다.
불도저는 벌써 표토제거작업을 상당히 해치운 뒤였다. 그런데 너무 아래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이를 약간 윗쪽으로 이동시켜서 콤프레셔 위치도 폭파시를 대비하여 현재의 노출된 장소에서 파편 돌이 날아오지 않을 모퉁이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폭파로 인해서 야기될지도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아군 GP가 위치하고 있는 고지의 후사면(後斜面)에 대피하도록 했다.
구축될 때 까지는 우선 마대와 잡목 등을 엮어 북한군의 GP로부터 엄폐가 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관통갱이 형성되면 그 자체가 훌륭한 대피호가 될 수 있겠으나 그 동안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를 임시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파 앞으로는 콘크리트나 철골조 등으로 완전한 대피호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입구가 되는 쪽이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어 앞으로 맞을 해빙기에 대한 안전대책도 세워야 되리라 여겨졌다.
관통갱공사에 필요한 천막과 연락용 통신자재, 난로 등을 여단에 요청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기자재도 보내 줄 것을 아울러 요청했다.
남침 땅굴 탐사를 위해 시추된 지점의 이상징후(지하에서 분출되는 이상한 냄새 유무)를 확인하는 장희성 대령 모습
2월 21일 금요일(북서풍, 눈, -11℃)
회의 준비사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간부들에게 지시한 후 여단으로 출발하였다.
여단장님과 함께 서울을 향해 달리면서, 나는 지난번 여단장님과 지금처럼 육군본부에 가다가 남산1호 터널에서 차가 뒤집혀 혼이 났던 생각을 했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미처 치료할 틈이 없어 그대로 회의에 참석했던 모습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여단장님께서도 아마 그때 일을 떠올랐음인지 운전병에게 거듭 거듭 안전운전을 강조한다.
우리는 무사히 육군본부에 도착하였다.
회의장에서 2.6 위원회의 각 부장과 자문위원 전원, 미8군의 밤낚시 공사(Operation Night Fishing) 지원반 등 많은 인사들이 이미 와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우리는 가지고 간 챠트로서 지금까지의 이상 징후 내용과 주상도의 비교, 분석판단, 그 밖에 여러 전문위원들의 의견들을 항목별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지난 2월 19일 통제부에서 얻어 낸 결론을 발표하였다.
이제껏 궁금해하던 공내 사진의 판독 결과와 공기 분석내용이 여기서 발표되어 오늘의 결론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장희성 대령이 슬라이스 파인애플(slice pineapple)같다고 표현한 북한 땅굴 탐사공 내 촬영사진, (1975년 3월 29일, 대한뉴스)
미국에서 현상인화되어 온 공내사진을 보았으나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잘 판독을 할 수 없었다. 얼핏 슬라이스 파인애플(slice pineapple)을 흑백으로 촬영해 놓은 것 같았다.
그 사진의 원리와 특징 그리고 사진에 나타나 있는 현상 등을 자세히 설명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것 같았다.
4개소의 공내 사진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로 <인위적인 동굴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에 문외한인 우리로서는 그 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만 미국의 전문가들이 판독한 것이라는 것만을 믿었다.
제 2땅굴 굴착 탐사 설명 보도 (1975년 3월 29일, 대한뉴스)
ADD의 공기분석 결과는 전에 전화로 연락받은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인위적인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동굴이란 (북한)적이 뚫은 동굴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제 2땅굴 탐색을 '청진기'로 폭발음 추적한 李建榮 장군
이건영(李建榮, 1926년 9월 2일 ~ , 국방경비대에서 육군사관학교 7基로 입교)
1998년 출판된 『장군의 비망록』(김문 지음)에는 이건영 장군의 제 2땅굴을 추적하는데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 李장군은 청와대에서 보직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朴 대통령으로부터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땅굴작전에 임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李장군이 부임하기 전인 그 해 11월 고량포에서 이미 제 1땅굴이 발견되었고 그 한 달 전인 10월 6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땅굴 굴착으로 보이는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李장군은 군단장에 부임하자마자 본격적인 땅굴탐색작전을 벌이도록 명령했다. 땅굴탐사를 위한 첨단장비가 없던 시절이어서 청진기를 통해 폭발음을 계속 추적하는 한편, 서울대 토목과 교수,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 광업진흥공사 관계자, 전매청 냄새탐지기술자, 공병장교 등으로 구성된 땅굴탐사연구단을 구성했다.
또한 이들의 연구결과에 따라 맞굴(역갱도)을 뚫기 위해 현대건설 작업반들이 투입되었다.
작전명은 '밤낚시 작전(Operation Night Fishing)' 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혹한과 싸워야 하고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병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야 했다.
그러기를 3 개월여 밤낚시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 3월 24일 유엔군사령부는 제 2땅굴을 발견했다고 전세계에 공표했다.
李장군은 당시 영국 BBC 방송 여기자와의 인연 등 '땅굴과 여자'에 얽힌 기묘한 일들을 몇 가지 공개했다.
땅굴이 발견되자 한,미 1군단장은 외부손님 50여명을 초청하여 땅굴을 견학토록 했다. 일행 중에는 수녀 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다녀간 후 마무리 작업(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차단벽을 뚫는 일)을 벌이던 역갱작업반원들이 갑자기 군단장을 욕하면서 일을 전혀 안하는 것이다.
사연인즉 지하굴착 작업 때 여자와 휘파람은 절대 금기인데 수녀들이 다녀갔으니 큰 사고가 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미신이었지만 위험한 작업에 동원된 그들의 고집을 묵살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李장군은 마땅한 예방책이 없느냐면서 작업속개를 설득했다. 그러자 현대건설 작업반원들은 북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꺾어오되 개소리나 닭소리를 전혀 안들은 것으로 해야 하며 소금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다. 일종의 부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李장군은 수색대를 시켜서 인적이 드문 곳에서 복숭아가지를 꺾어 오도록 했다. 인부들은 그것으로 굴내부에 부적을 만들었고 소금을 뿌려대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신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지하 50 m 깊숙히 설치된 차단벽을 뚫고 있던 작업반원 중 1진 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곧이어 뒤 따라간 2진 4명도 또 변을 당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망원인은 굴속에 가득 찼던 아황산가스에 의한 질식이었다.
당시 방위산업관계를 담당하는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지시에 의해 북쪽방향으로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으나 굴속이어서 그런지 불은 붙지 않고 아황산가스만 가득 차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7명의 수녀가 다녀간 뒤 기이하게도 작업반원 7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된 1975년 4월 어느 날 李장군은 서종철(徐鐘喆) 국방부 장관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BBC 방송기자가 땅굴이 한국측의 정치적 목적인지 아니면 실제로 북한군이 파내려온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보고 싶다고 하니 현장을 잘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李장군은 6사단장 정명환(鄭名煥, 육사 8기) 장군에게 이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이윽고 BBC 기자가 헬기편으로 땅굴 지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남자인 줄 알았던 방송기자가 여자가 아니지 않은가!!
키가 작달만한 여기자의 이름은 크즐리 사라(Kizzle Sarah,미혼)였다. 정명환 장군은 내심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번 수녀방문으로 7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이번에 또 여자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군단장으로부터 절대 '여성출입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정명훈 장군은 군단장의 명령이라면서 출입을 막았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완강한 저지에 부딪혀 여기자는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자는 스틸웰 미 8군 사령관을 만나 "땅굴이 한국측에서 판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땅굴 내부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날 밤 李장군은 서종철 국방부장관과 노재현(盧載鉉)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연거푸 질책섞인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李장군은 서장관에 직접 찾아가서 '여기자이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땅굴과 여자의 상극관계'를 설명했다. 그러자 서장관은 어떻게든 잡음 없이 잘해보라고 하면서 여기자의 땅굴방문은 북한의 남침야욕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건영 장군과 2 땅굴을 방문하러 온 BBC방송 여기자
3일 후 BBC방송 여기자가 다시 찾아 왔다. 이번에는 李장군이 직접 맞이했다. 이에 앞서 李장군은 사단장을 시켜 땅굴 근처에 있는 병사들을 전원 취침토록 하고 대신 보초들을 모두 장교로 대체했다.
李장군은 여기자와 함께 직접 지하 50 m 까지 내려가 파내려온 제 2땅굴 내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기자는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를 간파한 李장군은 땅굴을 견학하고 나오면서 '서양인들은 금요일을 싫어하는데 맞느냐, 13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李장군은 다시 '그렇다면 금요일과 13일이 겹친 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여기자는 '더 나쁘겠지요'하고 대답했다.
李장군은 '바로 그거다. 서양에도 미신이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특히 땅굴작업 때 여자가 들어오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지난 번 수녀가 방문한 뒤로 7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땅굴입구에 세워진 위령탑을 가리켰다.
여가지는 깜짝 놀라면서 '왜 진작 말을 안해줬느냐' 면서 매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자는 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李장군과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또 李장군에게 북한의 남침야욕을 전세계에 알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 뒤 떠났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이 또 터졌다.
여기자가 다녀간 며칠 뒤 땅굴수색을 하던 소대장이, 북한군이 매설해 놓은 지뢰를 밟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소대장은 중상을 입었고 옆에 동행했던 하사관 한 명은 눈에 파편을 맞고 후송됐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이건영 장군은 5군단장 시절의 자신을 땅굴 단장에 비유했다. 재임 1년 9개월 동안 제 2땅굴 발견작업에 시간을 거의 쏟았기 때문이다. 혹한기에 노무자들의 뒷바라지에서 부터 믿을 수도 안믿을 수도 없는 땅굴과 여자에 얽혀진 미신의 후유증까지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