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옴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pn=2&num=222359
◇. 제 2 땅굴 발견을 물적, 심적으로 지원한 정명환 준장(발견 후 소장으로 진급)
정명환(鄭名煥, 예비역 소장, 1949년 육사8기 특별 3반 졸업, 2009년 10월 24일 사망)
당시 정명환 준장은 제 2 땅굴을 발견한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뒤 육군본부 민사군정감, 국방대학원 입교,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제2군수지원사령관을 거쳐 1980년 8월 31일 전역하였습니다.
한국전력 감사와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지낸 뒤 경기도 과천에서 은퇴생활을 보낸 후 2009년 10월에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생전에 정명환 장군은 북한의 남침 땅굴에 대한 소견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관련 내용을 소개해 드리자면...
"북은 지금도 땅굴을 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땅굴은 판문점과 서울 사이의 한 복판을 출구로 삼고 있지 않을까?
북은 지난 74년 스웨덴에서 하루에 30~50 m를 팔 수 있는 기계 5~6기를 도입했다. 이 기계는 지금 어디에 배치되어 있을까? 아마도 전선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이 기계로 지하 200~400m 까지 파 내려간 다음 남쪽으로 굴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명환 장군을 인터뷰한 기자는 무슨 정보를 가지고 그러한 판단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정명환 장군은 다음과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 1977년 국방대학원에서 공부를 할 때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 사령부를 방문하여 정보참모와 북한의 남침 땅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장교는 북한이 지하 약 400m의 깊이로 땅굴을 뚫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상식으로는 지하 100~150m 정도의 심도라고 판단하여 탐사시추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지하 400m 까지 깊게 급경사를 뚫었다가 완만하게 상승하면서 남한지역으로 파고들면 후방 깊숙이 침투할 수가 있는 것이다."
Lt. General, James Francis Hollingsworth (1918 ~ 2010)
" 귀국한 뒤 한미 연합야전사령관 홀링스워스(James Francis Hollingsworth) 준장을 만나서 남침 땅굴에 관한 견해를 물었더니 하와이에서 들었던 같은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1979년 9사단 지역인 한강변에서 지하 작업음이 청음되어 북한이 한강을 건나 땅굴을 파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시추를 한 적이 있었다.
제2군수지원사령관 재직 시절 홀링스워스 장군의 권유로 현장에 나가보았는데 심도 150m 이내의 얕은 시추를 하고 있어 나무란 적이 있다.
여기서는 땅굴 발견에 실패했다. 지하 소리를 놓친 것인데 이는 (남침) 땅굴이 일선을 통과, 후방으로 빠졌다는 뜻이다. "
▲. 美 극동공병단(FED :Far East District) 역사책자에 소개된 남침 땅굴
FED symbol Far East District Building
1970 년대 FED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북한이 남침목적으로 ) 건설 된 지하 터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에 의해 DMZ 아래에 있는 지하터널은 밀수업자들의 터널이 아니라 (북한) 군대를 용이하게 하도록 설계된 대형 통로였습니다.
침입목적의 터널 활동 증거인 첫 번째 힌트가 나타났습니다.
1973 년 한국 순찰대가 DMZ 중앙 지역에서 지하 폭발 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을 때.
1974 년 11 월 15 일, 한국군 병사들은 땅 아래에서 탈출. 더 나아가 검사, 그들은 덜 얕은 터널을 발견
수면 아래 2 피트 이상, 약 3,600 km길이였습니다. 한국군의 발견은 그 이후 의심이 강하게 되는 터널의 경우 탐지를 시작했습니다
북한 보병 사단마다 하나씩 남침 땅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Cholwon(철원) 주변 지역에 대한 탐색을 DMZ를 중심으로 하였고, 한국 광물 회사를 고용하여
56곳의 드릴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69 개의 시추공 이후 추가 터널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1974 년 말, FED의 우물 용 고정 시추장비를 한국군이 8 군을 통한 지원 요청 하였습니다.
1975 년 3 월 FED는 연중무휴 시추를 위해 한국군에 정밀 시추공 드릴링 유닛 및 2 개 장비와 대원들을 파견했습니다.
1978년 6월 미 8군 시추팀 장비로 휴전선 인근에서 작업하는 모습
주한미군 땅굴 탐사팀은 하루 24시간에 각각 8 시간씩 3 교대로 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2 일 후 집약적인 시추를 하였고, 그 노력의 성과는 155 피트 표면 지하에 드릴 중 하나가 공허에 부딪혔습니다.
두 번째 터널을 발견했습니다. 통로는 높이가 3 피트이고, 폭이 3 피트로서 군대와 무기를 이동하기 위한 협궤 철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한국군 공병부대와 미 8군 소속 FED 소속 시추팀의 도움으로 발견한 북한의 남침 땅굴 모습
두 번째 터널을 발견 한 후, 美 제8군은 FED가 기술 및 물류지원기술을 제공하는 터널 중립화 팀 (TNT)을 설립했습니다.
시추팀은 추가 터널을 찾기위한 DMZ의 전체 길이와 1978 년 탈북자를 통한 정보 수집 및 위성 이미지, 시추 요원은 판문점과 휴전선 마을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도하였습니다.
제 8군 지원팀은 해가 떴을 때 가능한 모든 시간을 사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978 년 6 월 10 일, 운이 좋았는지 시추공은 버려진 오래 된 건물의 지하쪽에서 다이너마이트 충전의 결함으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추공은 몇 년 전에 심은 것이었습니다.
미 8군 시추팀은 "우리는 지하 갱도의 수면이 심어둔 시추공과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하 갱도를 통한 시추공은 바위구조였다고 FED의 시추 책임자였던 Michael King이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남침 터널의 짦은 거리 내에 있었어야 했다"고 하였습니다.
FED는 터널 內 수로의 경사도를 대략 계산했습니다. 변칙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갱도 경사도의 계산 결과를 토대로 1978년 6월 12일에 시추요원들은 지하 213m에 위치한 정교한 세 번째 터널을 발견하였습니다.
터널은 짧은 거리 내에 있어야합니다.
지하 6 피트, 높이 6 피트, 폭 7 피트 였습니다.
북한의 제 3땅굴 발견후 한국군 탐색팀이 진입 작전하기 전 가스마스크를 착용하는 모습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은 역갱도 굴착공사에 착수했지만 FED 직원은 원래 터널의 경우 북한군 굴착팀이 갱도안에 물이 많이 들어차게 역대책을 하여 역갱도 작업자들를 익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깊은 지하의 양수 펌프를 사용하여 FED 직원은 물을 퍼내어 주고 기타 기술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
유엔중립국 정전관리들은 터널이 완공 되었더라면 매 시간마다30,000 명의 무장 군인이 통과 할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그 후 한국군은 터널을 탐지하는 부대를 더 만들고 여전히 다른 시추공들을 계속 탐지했습니다.
1980년에 극동공병단은 계속해서 한국군의 땅굴 탐사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예를 들어, 1988 년에 FED는 총 15,400피트 깊이로 FED 팀은 공동으로 시추공을 뚫었습니다.
한국군 시추팀이 역갱도로 관통된 제 3땅굴
4 개의 드릴 장비가 하루에 12 시간씩, 7 일 동안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극동공병단의 숙련된 직원은 이후 몇 년 동안
작업의 대부분을 다루는데 분류되었고, 극동공병단은 한국군의 남침 터널 무력화 노력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1990 년대, 한국이 남침 땅굴 탐사 활동을 완전히 인수했습니다.
북한의 극히 비정상적인 활동이었던 DMZ 근처의 터널 굴착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저열한 행위들이었습니다.
★. 제 4땅굴 발견을 한 이진삼 장군
이진삼(李鎭三, 1937년 2월 10일 ~ ) 육군사관학교 15基
이진삼 장군의 자서전인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2017년 발행)에 제 4땅굴 발견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21사단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육군의 탐지 방향은 서부전선에 집중되었고,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21사단 지역의 갱도 탐지 활동에 대한 상급 부대의 관심은 저조하였다.
당연히 사단 장병의 탐지 의욕 또한 저하되거 있었다. 나는 전 장병에게 사단 지역 내 적의 땅굴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며 갱도 탐지 업무 활성화를 내세웠다.
연중무휴 작업과 주야간 작업을 하는 대신 인력은 3배 이상 보충하도록했다.
혹한기 난방 시설을 포함하여 특식을 제공하도록 명령하는 등 최고의 관심 지역화를 하였다.
우선은 지금껏 시추한 후 방치하고 있는 시추공들을 정비하여 관찰하도록 했다.
시추공이 흙으로 덮이면 그 안에서의 변화, 수위 변동 등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군본부를 방문하여 산악지형인 동부에 시추기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매주 일요일 오전에는 2개 시추 지역을 방문하여 독려하면서 사기를 양양시켰다.
그 다음으로 청음 집중 분포 지역인 OOO 와 OOO 2개 지역을 중점으로 시추하도록 했다. DMZ 및 철책선 근무요원의 관측 및 청음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적의 예상출구에 대한 수색도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였다.
시추 간격을 10 m 이내로 좁히고 , 시추공 심도를 증가하는 한편 청음요원의 교육과 전방 지역 주민 홍보도 실시했다.
청음 분석 자료를 참고하여 비교 분석, 탐지 일지를 기록함으로써 청음 시간과 횟수를 그래프로 만들어 분석했다.
상세한 내용은 보안상 책자에 기록을 유보하겠다. "
군단장인 나는 1987년 7월 末 일요일 오전 10시, 그날도 나는 병사들을 격려차 시추지역을 방문했다.
21사단장, 66연대장, 작전주임, 정보주임, 땅굴팀장 등과 토의를 하던 중 북방 50 m 높은 지점에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었다.
나는 사단장과 연대장을 향해 " 저 새 참 아름답지?" 라고 했더니 연대장은 바로 "그렇습니다." 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칠봉 OP (출처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나는 잠시 동안 시선을 꾀꼬리에 고정시켰다. 2~3분 정도가 지났을까... 꾀꼬리가 가칠봉 정상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꾀꼬리가 앉았던 곳으로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올라갔다.
꾀꼬리가 앉아 있던 곳은 1984년도에 굴착했었던 14번째 시추공 지점으로 잘 관리되어 있었으며 지속적인 청음 활동으로 미상 모터 소리를 육청하여 결정적 징후를 포착했던 곳이다.
그러나 당시 갱도 관계 실무자들이 원점에서부터 땅굴 예상 분석에 다소 오차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14번째 시추공 지점의 인근 지역을 다시 정밀 시추공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가칠봉 OP와 제4땅굴 위치 (Google satellite image)
7월 우기철로 땅이 젖어 있어 매우 질퍽 거렸다. 시추기를 옮기기에는 경사로 작업이 필요했다. 전 병력을 동원하여 3시간 동안 마대에 흙과 자갈을 혼합하여 통로를 개척하고 74 m 북쪽 전방으로 시추기를 옮겼다. 시추 깊이 증가(120 m → 150 m)로 어려움은 있으나 적의 갱도 입구에 접근할수록 남침 땅굴의 발견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군사령관인 나는 꾀꼬리의 출몰 위치 근처 지점까지 1989년 8월 末, 14번 시추공 지역에서 소리를 포착, 이것을 분석한 결과 모터 음으로 판정하고, 야전 청음 분석차량(MLV ; Mobile Laboratory Van)을 추가 배치 운용했다.
10월 末에는 과학기술연구소 CW (Continuous Wave : 연속전자파 또는 연속파 시추공 레이다)장비로 7개의 시추공 지역을 탐사한 결과 근처 14 m 지점에 미세한 지층 변화를 발견했다. 드디어 적의 땅굴에 적중시키기 위한 관통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곧 찾을 것만 같았던 땅굴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첫 번째 시추공부터 빗나갔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시추공까지 빗나갔다.
1989년 12월 24일, 여섯 번째 시추공 작업에 들어갔다.
Boring Slime (시추 슬라임) - 땅 속으로 들어가는 코어 주변에 얇은 진흙 입자가 물과 섞여서 주변에 퍼진 형상
드디어 (노태우) 대통령과 약속한 대로 군사령관 부임 8개월 12일 만에 결과가 나왔다. 시추 슬라임( boring slime) 및 물이 지상으로 분출되지 않고 지하로 빠져나갔다.
시추기 압력 게이지가 떨어지면서 시추기 로드가 가볍게 낙하했고 동시에 시추기 해머 타격 소리가 약해지면서 시추공을 통하여 공기가 분출되었다.
마침내 4~6번 시추공이 적의 땅굴에 적중한 것이다. 시추공에 카메라를 달아 투입하니 레일(rail), 침목, 쇠파이프, 벽면에 빨간 페인트로 '조국통일, 수령님 만세'가 보였다.
시추 지점으로부터 불과 남쪽 22 m 지점에서 적의 땅굴 막장이 끝나는 것을 확인했다.
남방한계선까지 2,052 m 를 파 내려왔다.
기존 시추 지역에서 과감하게 74 m 를 추진하여 시추공 탐사를 하지 않았다면 1989년 12월 24일 01시 29분 크리스마스이브에 제 4 땅굴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우나 위대한 것이다. 노력 앞에 불가능은 없다. 수많은 역경과 고충이 닥칠지라도 이를 극복 해내고야 말겠다는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다. 그 무엇(질책과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땅굴 발견의 소원이 성취되었으니 훌륭한 휘하 장병들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말보다는 실천, 계획보다는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