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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땅굴 소탕작전 준비
제 4땅굴 발견과 함께 중요한 것은 북한군의 역(逆) 대책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갱도 내부 감시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정확한 예상출구의 판단과 철저한 수색을 실시하고, 장애물 설치 등 북한군의 선제공격에 대비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무엇보다 이전의 제1, 제2, 제3 땅굴의 소탕작전 중 있었던 인명 피해 교훈을 세밀히 분석하도록 했다.
예상가능한 모든 상황을 염출(捻出), 이에 대비한 방책을 수립하여 단 한 건의 피해도 없이 완전 작전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박영익 준장 (朴寧益, 1995년 10월 10일 중장으로 진급)
1990년 1월 1일에 장군이 되어 6군단 참모장으로 내정된 육사23기 박영익 준장을 21사단 부사단장으로 발탁하여 땅굴 소탕작전 지휘관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박영익 준장을 필두로 소탕작전에 투입할 6개 팀을 편성하였다.
상부에서는 특전사 요원의 투입을 고려하였으나, 나는 사단장 시절 강력히 훈련시킨 21사단 수색대대 투입을 결정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2개월 이상 강도 높은 훈련은 상상을 초월한 훈련이었다.
체력단련은 물론 특수 장비 사용 요령에서부터 화생방 대비훈련을 했다.
또한 갱도 모형 훈련장을 설치해 소탕 작전 요령과 우발 상황에 대한 대처 요령, 모래포대 운반, 담력, 극기 훈련을 포함하여 37개의 상황 대비책(case study)을 훈련하였다.
이진삼 장군 작전 회의 모습
강원도의 폐탄광을 이용, 터널 안에서 적 소탕 훈련을 했다. 단 한 명의 낙오 병사도 없었다. 철저한 보안 대책으로 땅굴이 공개되기 전까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사령관 승인 없이 상하급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의 현지 방문을 통제하였다.
이는 갱내를 감시하기 위해 투입했던 美 시추공 카메라로 적의 활동 사항을 분석한 결과, 관통 수 시간 前까지도 북한군은 땅굴 노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
역갱도 관통일을 1990년 3월 5일로 정하였다.
역갱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1990년 2월 24일, 서울 <세계일보>에 "대한민국 동부전선 땅굴 발견" 이라는 기사가 미국 <워싱턴 타임지> 인용으로 보도되었다. 즉시 언론 보도 통제를 하는 한편 북한군의 주의를 타 지역으로 돌리도록 기만대책을 강구했다. 인접 군단을 포함하여 전 전선에 병력 및 헬리콥터 운행 등 기만작전을 실시하였다.
1990년 3월 4일 일요일, 조선일보, 제 4땅굴 발견 1면 머릿기사로 보도
나는 박 준장에게 날짜를 앞당겨 3월 3일 이전에 관통되도록 준비시켰다. 3월 5일에 관통을 하게 되면 만약에 있게 될 적의 도발에 희생이 따를 것을 염려해서였다.
나는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3월 3일, 2일 앞당겨 관통 건의를 하였다. 하지만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이미 내외신 기자 40명, 중립국 감시단 8명에게 통보를 했고, 대통령에게 보고가 된 터라 안 된다며 3월 5일에 관통하도록 했다.
군사령관인 나는 직접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역갱도 관통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적의 역대책이 우려됩니다. 3월 5일 계획을 2일 앞당겨 관통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즉시 국방부 장관에 "이진삼이 하자는 대로 해. 이진삼은 불가능 없어. 3월 3일로 앞당겨!" 라며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관통일은 3월 3일 오후 1시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관통을 몇 일 앞두고 현장에 있던 박 준장이 장화를 신은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이야?"
"사령관님, 땅굴(역갱도) 각도가 잘못됐습니다."
현장 작업에 참여했던 업체에서 적외선 빔을 잘못 건드려 각도가 위를 향한 바람에 아래로 뚫어야 하는 땅굴이 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다시 밑으로 꺾기 위해서는 다른 장비가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조치할 수 있나, 박 장군!"
나는 박 장군의 눈빛을 보며 물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
할 수 있다는데 다른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염려 마라, 불가능은 없다.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자."
나는 무엇이든 일단 맡기면 그것으로 끝이다.
작전지휘에 군사령관인 내가 지나친 간섭을 하면 오히려 효율적인 지휘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꼭 필요한 작전지침만 내렸다.
나는 바로 내 전용 헬기를 띄워 박 준장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 필요한 지원을 받도록 했다.
TBM(Tunnel Boring Machine)을 사용해 관통 지점 10 m 를 남겨 두고 엔진 4개 중 2 개를 껐다. 엔진 소리에 북한군이 관통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을 우려해서다. 관통 지점 2 m 를 남겨두고는 엔진 1 개만 작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기시켰다.
제 4 땅굴의 역갱도 굴착을 위해 가칠봉 근처에 설치되어 시동중인 TBM(Tunnel Boring Machine), Photo by SPECIALIST(SPC) Jean Paul Ruch
북한군이 굴설한 제 4 땅굴 시추공 현장에 배치한 감시장비, Photo by SPECIALIST(SPC) Jean Paul Ruch
북한군이 굴설한 4 땅굴의 역갱도는 오후 1시에 관통하기로 했다. 나는 현장 10시부터 현장에서 기도했다. 작전에 참가할 부하들의 무사를 기원했다.
수없는 작전을 하면서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그 순간과 다를 바 없었다. 기다리는 3시간이 길고도 길었다.
현장에는 중국과 북괴를 뺀 국내외 외신기자 40명과 중립국 감시단 8명도 와 있었다.
만약 작전지역에서 폭발 사고라도 일어나면 우리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자들 역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1990년 12월 1일, 또 다른 남침 땅굴을 찾기 위해 가칠봉 근처 시추공에서 작업을 하는 美 8군 관계자들 (source : The U.S. National Archives)
오후 1시, 마침대 역갱도는 관통되었다. 그곳에 기자들을 앞세워 들여보냈다.
당시 종북세력들은 땅굴을 우리가 팠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때문이다. 현장을 확인하고 나온 기자들의 눈물, 콧물에 먼지까지 뒤집어 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오후 2시 40분, 여전히 땅굴 발견에 대한 우리의 공식보도가 나가기 전, 땅굴 입구 지역에 위치한 북한군 GP에서 이례적으로 대면을 요구해왔다.
그러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친구, 그기 땅굴 없으니 찾지 말라우!" 하는 이색 공세와 최초 땅굴 소탕작전 중에 적이 황급히 퇴거하는 일부 징후를 포착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계획보다 앞당겨 작전을 실시한 것은 우리의 희생을 막은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제 4땅굴에 관통된 역갱도 안으로 들어가기전 도열한 21사단 땅굴 수색팀과 군견 헌트
오후 7시경, 소탕작전을 지휘하던 1팀의 중대장이 목함지뢰 몇 개가 땅굴 속 흙탕물 안에 있다는 보고를 했다. 나는 즉시 작업을 중지시켰다.
미리 준비해 둔 모래주머니로 지그재그 5중 방호벽을 쌓도록 하고 이어지는 작전은 다음 날로 이어가도록 했다.
또 1팀의 중대장은 버터를 묻힌 정구공을 목함지뢰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훈련된 군견을 앞세워 들여보냈다.
군견이 정구공을 줍기 위하여 전진하자 잠시 후 "펑" 하는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나뒹굴었다.
목함 지뢰가 있다는 것에 긴가민가하던 모두는 놀랬다.
밖에서 전화로 군견과 함께 들어갔던 중대장을 호출했다.
"코뿔소 하나! 어떻게 됐나? 응답하라, 모두 살았나?"
3분 후 응답이 왔다.
"전부 살았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수고했다. 긴장 늦추지 말고, 지금부터 화기는 꼭 휴대해라, 특히 실탄을 확인하라!"
총을 땅굴 안에 두고 나오면 지뢰폭발로 진공이 생겨 자칫 폭발로 이어져 모두 죽을 수 있어서이다.
1975년 철원 6사단에서 발견됐던 제 2 땅굴에서의 일이었다. 화기로 인한 폭발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 준비된 컴프레서를 이용해 공기를 갱내로 공급하였다.
교대한 팀원들은 중대장 이하 모두가 피투성이였다.
파편에 맞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폭탄이 터져 모래가 날아들어 피투성이가 된 거였다.
투입된 인원 그대로 나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먼저 들여보낸 군견은 죽었다.
더한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속히 작전을 마치는 일만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나는 병사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였다. 다른 팀과 임무를 교대시켰다.
교대 병사들은 준비된 막사로 이동, 목욕과 식사를 하고 복장과 장비를 재정비한 후 다시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발견된 4 땅굴에 진입하기 전 도열한 11명의 21사단 수색팀과 군견 헌트. 지시 사항을 듣는 모습
화기는 전원 자동화기 K1A1 소지
지휘관이 직접 작전에 뛰어들자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500 m 적 지역으로 진출할 것으로 명령했으나, 북한군은 이미 퇴각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군사분계선까지 500 m 후퇴를 명령한 후, 3중 콘크리트 벽을 쌓고 경계에 돌입하였다.
그날로 우리는 군사분계선을 확보했다. 모든 작전은 종료하고 희생된 군견의 사체 수습을 끝으로 군사분계선 점령을 완료했다.
희생된 군견은 화장하여 제 4땅굴 입구 묘 앞에 동상을 세웠다.
이 모든 것은 훈련과 철저한 준비 그리고 정확한 상황 판단, 장병들의 결사 희생정신의 결과였다.
제 4 땅굴로 21사단 땅굴 수색팀과 함께 작전에 들어가는 군견 헌트
충견 헌트는 세퍼드 種으로 육군 제21사단에서 활약한 군견이다. 제 4 땅굴 소탕작전을 하며 탐사견으로 땅굴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이 수중에 매설한 목함지뢰를 밟아 폭발시켜 11명의 땅굴 수색대원들의 생명을 구한 충견으로 4살의 나이에 산화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이기는 하나, 사람의 생명을 구한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군견으로는 최초로 "소위" 라는 장교 계급으로 추서되었고 인헌무공 훈장이 수여되었다.
▼. 예병주 대령의 진화된 땅굴 탐지 기술 소개
예병주 대령 (芮秉周, 육군사관학교 25基, 땅굴 탐지 업무 담당 1991 ~ 1999)
예병주 대령의 『땅굴의 진실과 신비의 DMZ』라는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제 3땅굴'을 발견할 때까지는 지하 발파음이 귀로도 들렸다. 청음(聽音)이 중요한 몫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청음장비를 구입하여 주요 축선에서 24시간 청음하면서 곳곳에 독(옹기)을 묻어 놓고 듣는가 하면 청진기까지 동원되었다.
온갖 소리가 청취, 녹음되었으나 모두 잡음으로 분석되었다. 땅굴파기를 중단했으나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청음 분석기도 개선되었다.
새소리, 개소리가 다르듯이 각 개체는 음색이 있다. 음색은 장비로 분석하며 주파수와 주파수 모양이 도표로 나타난다.
청음 진원지 탐지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와 더불어 위성사진 정밀 분석과 간첩들의 수첩도 철저히 분석했다.
간첩의 수첩에서 특정 지역의 지형이 발견되었다. 인공위성 사진 분석 내용과 청음 기록과 간첩 수첩의 합치되는 지점에 집중 탐사하야 1990년 3월 3일 밤 1시 '제 4 땅굴'을 발견했다.
제 4 땅굴의 역갱도를 TBM으로 굴착한 후 살펴보는 중립국 감시위원, Photo by SPECIALIST(SPC) Jean Paul Ruch
'제 4땅굴'은 과학적으로 찾은 땅굴이다.
1,2,3 땅굴은 시추기로 땅굴을 적중시키는 방법이었다.
반면에 '제 4땅굴'은 마치 인체의 병을 진단하듯 MRI(자기공명장치), 초음파, X-ray, 내시경과 같은 원리의 장비들로 찾았다.
측정장비도 인공위성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측령하는 국내 유일의 장비였다. 시추공이 휘어졌는지 정확한지를 측정하는 시추공 측량장비도 갖추었다.
1989년 12월 1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개발한 '지오비스(CW : Continuous Wave) 탐사장비에서 아름다운 신호 하나를 잡아낸다.
지하 145 m 지점이다. 그 지점을 중심으로 앞과 뒤에서 같은 신호를 잡아냄으로써 남북으로 연장된 축선의 신호임이 확인되었고, 다른 장비 즉 팸스(PEMSS ; 美 시추공 레이더), 라막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었다.
정확한 작도와 측량 과정을 거쳐 적중을 목적으로 시추가 시작되었다.
美 8군, SPECIALIST(SPC) Jean Paul Ruch의 가칠봉 근처에서 야간 땅굴 탐지 모습
첫댓글 이젠 우리가 파고 올라갈 차례.
625도 북침이라는 판국이니.
옛날 교육받을때 임진각 들렸다가 땅굴견학했었죠.... 더 많은 땅굴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 당시, 북침 했어야 합니다.
북에서 국경 넘어 침공한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