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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키노시는 오사카부의 남쪽에 있는 도시인데 곤지왕을 모셨던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곳이다. 곤지왕이라면 다름 아닌 바로 무령왕의 아버지이다. 그가 462년 일본 아스카, 지금의 하비키노에 해당하는 가와치 아스카로 가는 도중 큐슈 마쓰우라(松浦)의 섬에서 무령왕이 출산된 것이다.
그는 가와치아스카(河內飛鳥)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세상에서 왕으로 불리어 온 인물이다. 문주왕의 공주 천도 이후 귀국하여 내신좌평의 직을 맡아 왕을 보필하였으나 바로 그 해(477)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필시 반대파의 저항에 의한 정치적 암살이었을 것이다. 곤지왕의 신사는 하비카노에 있지만, 그의 무덤은 공주에 있을 것이다. 세미나는 하비키노희망관과 필드뮤지엄토크사유회라는 향토사 단체에서 주최한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이를 기획하고 진행해온 것은 오사카 상업대학의 양형은 교수이다. 하비키노 사람들을 흔들어 곤지왕을 기억하게 하는 일을 몇 년째 진행 중인 것이다.
기조강연은 카사이(笠井敏光) 선생이 맡아 신사가 있는 하비키노 아스카 지역과 곤지왕 무령왕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카사이 선생은 가카라시마에 건립된 무령왕 기념비의 최초 초안 스켓치를 제안한 장본인이다.
이어 양형은 교수는 ‘곤지를 제사하는 아스카베 신사’, 오카다(岡田典明) 선생은 ‘가와치(河內)의 도래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신사가 있는 하비키노 아스카마을의 백제와의 깊은 인연을 집중 조명한 것이다.
원래 예정에는 없었지만, 이날 나는 마지막 순서로 ‘공주-가라츠 무령왕 교류 10년’을 간단히 발표하였다. 하비키노시는 지역에 소재한 거대규모 전방후원분을 인근 지자체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작업을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곤지왕 국제네트워크에의 첫 걸음
세미나는 억수로 퍼붓는 우중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들뜬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장소는 문화회관 같은 잘 구비된 강당이 아니고,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 마을의 청과물 작업장이었다. 함석으로 조립한 허름한 작업장을 장소로 잡았는데도 준비된 간이 의자 150석이 모자라게 사람들이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양 교수가 발표중에 곤지왕의 초상을 공개한 것은 세미나의 하이라이트였다. 곤지왕 초상은 소설가 정재수가 1999년과 2001년 곤지왕을 두 번 꿈에 만나고, 그것을 화가 김영화가 그려낸 것이라고 한다. 그 초상에서 나는 아들 무령왕의 얼굴을 보았다.
양교수는 이제 내년 본격적 세미나를 다시 준비하면서, 하비키노와 한성과 웅진을 연결하여 부자가 상봉하는 시민간 교류의 네트워크를 꿈꾸고 있다. “우리는 곤지왕 국제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끝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년 2012년이 무령왕 태어나신 1550년인데, 공주에서는 무얼 하나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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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족은 본래 영산강지역에 살았다가 마한과 백제남하로 열도로 이주하였다.
근초고왕 당시 열도가 평정되면서 백제왕족과 왜왕족은 한 집안이 되었다.
중국 최고의 지리서<산해경>"해외동경에는 신조 봉황이 사는데 봉황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온다."
고대 남한지역을 기록한 <후한서-한전>"마한에는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봉황)이 있다."
봉황은 단군3한국에서 마고성에 해당하는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의 토종닭의 토템으로 태양조다.
단군3한국 이후 남3한 중에 마한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던
서남해 마한의 진왕은 남3한을 대표하며 마한인들이 남한과 열도을 지배했다.
그런 마한을 통합하고 해양강국을 건설한 백제가 마한을 계승했다는
토템이 바로 백제대향로에 새긴 태양조 봉황이다.
한반도 서남해 서울.웅진지역을 황도로 삼고 서해와 남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전성기 시대에는 22개의 제후국을 두었던 서백제와 동백제에
각각 치소와 두 명의 좌.우현왕을 두었던 동아시아 해양강국 대백제
<담로>는 고구려의 국시이기도 한 다물(담우로)을 의미하는 말로 <담>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백제의 담로지역들이다
[백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백제는 한반도가 가진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가 위치하였던 한반도 중.서남부는 한강, 금강, 영산강을 비롯하여 많은 하천을 끼고 있으며, 인접한 바다인 서해와 남해는 서북으로는 중국대륙 동남으로는 일본열도에 닿는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자연환경은 하천을 통한 내륙수운과 해상을 통한 연안해운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 또한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국제해운을 경영하여 동아시아의 해상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백제인들이 동북아시아 뿐만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이르기까지 먼 바닷길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백제의 활발한 해상활동은 우수한 조선기술(造船技術)을 바탕으로 하였다. 실제로 백제는 ‘방(舫)’이라는 선박을 운용하였으며, 왜국에서 ‘백제선’은 우수한 선박으로 통했다. 당시 중국측의 선박과 백제선의 형태 및 제작기법의 차이로 보아 백제만의 독자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백제의 우수한 선박은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였고, 나아가 백제를 해상을 통한 문화교류 및 교역.물류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백제의 해상활동은 교역과 같은 단순히 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치.경제.군사적 측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백제 최대의 라이벌인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신라.가야, 중국 남조와 일본열도의 왜국과 연계하여 반고구려전선을 주도하였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적으로 선진기술과 문물의 전달자로 동아시아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때로는 중국대륙의 혼란과 백제내부의 발전에 힘입어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은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强兵)이 백만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吳).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燕).제(齊).노(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연.제.오.월은 중국대륙의 해안지역이므로, 이 이야기는 백제의 서해를 무대로 한 군사활동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4세기 말 북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서지역에 진출하였다고 전하며, 중국의 '남제서(南齊書)' 에도 “위나라는 기병 수십만을 동원해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안으로 쳐들어 갔다. 백제 동성왕은 사법령,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위나라 군대을 대파했다.”고 하여 5세기 말, 북중국의 탁발선비족의 왕조인 북위와 10년간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모습 등은 백제가 강력한 군사능력을 보유하였고,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상과 대륙을 잇는 무역을 장악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고 경영하여 찬란한 문화를 보유한 해상왕국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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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도를 보니 더욱 잘 이해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