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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 1:14에 보니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헬: 싸륵스: 육체-죄 없으심)으로
우리에게 영광으로 나타나심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요 14:6에서는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롬 1:15-17의 말씀을 보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벧전 1:25에는 복음이 곧 말씀이라고 합니다.
또 고전 1:24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합니다.
요 6:50-56에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이신데 이 떡은 주님의 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영생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수 1:8에는 율법(토라, 노모스) 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합니다.
겔 2:8-10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있는 두루마리 책을 먹으라고 합니다.
계 10:10에는 작은 책을 먹으니 입에는 다나 배는 쓰다고 합니다.
잠 6:23에는 하나님의 명령은 등불이요
하나님의 법(토라, 노모스)은 빛이라고 합니다.
시 119:105에는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라고 합니다.
요1:9 에는 말씀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참 빛
곧 비취는 빛이라고 합니다.
이 위 말씀을 요약해 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신 데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인 아들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심이 복음이시며 그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의이시고 지혜이시며 은혜와 진리이시자 말씀(벧전 1:25) 자체가
되십니다.
또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떡과 살로 비유하시며 먹으라고 하셨는
데 떡과 살을 먹는 의미처럼 율법 책과 두루마리 책 그리고 작은 책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벧전 1:25)
이로 보아 말씀=하나님=복음= 말씀=예수님=산 떡=주님의 살=율법(노모스)책=법(율법)=빛=말씀=하나님.
그러면 말씀이 우리에게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우리를 영적 죽은 자에서 영적 산 자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살리시기 위해서는 법(율법 : 노모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나라에 속한 사회도 법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질서가 유지되듯이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거룩한 그리스도의 나라로 세우시기 위해 (계 11:15)
하나님의 법을 정하셨습니다.
율법을 정하신 첫 번째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노모스) 가운데서 자유하게 하시고자
(요 8:31-32) 함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을 받은 자들을 율법을 악용하는 자들에게서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딤전 1:8-11)
세 번째는 길(요 14:6) 자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자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이런 삶을 사는 자가 회개한 자임)를
이 땅에서도 옳은 진리(요 14:6)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네 번째는 인간의 방법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고후 5:1)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섯 번째는 끝까지 견디며 따라갈 수 있도록 그 분의 능력(롬 1:16, 고전 1:24)을
공급해 주심으로 악에게 이기게 하셔서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벧후 1:11)
하나님께서 법을 정하셔야 하는 이유는 이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다 기록할 수 없기에 단축해서 요약했습니다.
성경에서 거론하는 '법' 또는 '율법'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거의 '노모스’라는
단어로 표기되었습니다. 헬라어 '노모스'의 뜻은 법과 율법이 같은 의미인데 법이
라는 말을 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율법’이라는 단어로 거론을 하면 심각하게
큰 반응을 일으키며 문제를 삼는 기독인들을 자주 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로 '토라'는 지시, 교훈 , 법령, 관습, 계명, 법, 율법, 규례, 법률,
법도라는 뜻으로 구약도 '법'이나 '율법'의 어원은 하나입니다.
신약의 '노모스' 역시 법, 율법, 규칙, 기준, 생활과 행동의 규율의 의미, 관례 등
으로 해석되는데, 이로 보아 '법'이나 '율법'의 어원이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토라'나 '노모스'를 어떤 의미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다가 오는지 몇 말씀을
들어 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에서 보면 시 119:72에는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잠 4:2 ... 내 법을 떠나지 마라. 잠 6:23...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다.
신약에서는 갈 6:2에는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딤후 2:5에서는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
히 10:16...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라.
약 2:8...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
위의 몇 말씀처럼 성경은 '토라'나 '노모스'를 우리말인 '법’으로 번역해서 그 뜻의
존엄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토라나 노모스인데 ‘율’자를 ‘법’자 앞에 두어 ‘율법’이라고
기록한 곳도 많이 있습니다.
'법’자 앞에 ‘율’자가 붙여지면 법의 의미가 더 강조됩니다.
즉 율(律)의 의미는 악행을 제거하는 훈련이라는 뜻이 첨가되어 법을 지켜야할
확실한 증거로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엄중한 의미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된다
그렇지 않다 하며 많은 갈등을 하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수 1:8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책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율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록한대로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가 꼭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약속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전후의 상황이 과도기적으로 격변화 되면서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의 의미가 상실되어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예수님 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게
되는데 그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많은 갈등 속에서 작게 크게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 교회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인 갈 2:12-14에 보면 게바와 유대인들이 구약적인 외식주의에 치우쳐
있어 바울에게 지적을 받았는데 바나바 역시 외식에 유혹되었음을 본 바울이 복음
의 진리를 좇아 행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애통해하는 내용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수제자임에도 완전하게 된 율법을(마 5:17)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런 갈등이 있었는데 하물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러한 갈등이 어찌 적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 주여 주여 부르고는 있으나 주님의 뜻인
율법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아직 신령한 눈이 열리지 않는 자들의 연합체인,
거룩한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 안에 사단은 틈을 타고 들어와 왕 노릇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예나 지금이나 계속 조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시고 에덴 안에서부터 율법 곧 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피조물
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하는지의 여부를 감찰하셨습니다.
맨 처음에 받은 법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순종하였기에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채 죄악에 이끌림을 받는
최초의 심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성경은 각 시대별로 성경의 각각의 인물들에게 지켜야할 율법을
주셨습니다.
각 시대별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지만 많은 인물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이 땅에서도 징벌을 받은 내용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그 법을 준수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소중하게 받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율법을 지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 이름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여호수아, 갈렙, 다윗,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등
그러면 예수님 오신 이후에는 우리는 어떤 율법을 받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까요?
구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은 렘 31:31-34에서 구약법과 같지 않은 새 언약을 이스라엘
과 유다 집(...우리{이면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고전3:9)에 하나님의 율법을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삼으시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오신다는 약속대로 신약에 오셔서 그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신약의 말씀에 적용해 봅니다.
율법을 속에 둔다는 것은 갈 2:20의 말씀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눅 8:15의 심령밭인 좋은 땅에 말씀의 씨가 떨어져 심어
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요일 2:3-6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즉 말씀을 지키는 자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니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는(요 15:4,5) 관계가 되어
주님이 주인이 되시므로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주님처럼 행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사람의 의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주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어 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이 힘은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가 되므로 결코 하나님의 율법의 참 의미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신령한 눈(고전 2:6-9, 계 5:6)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약적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나 우리 능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지혜를 주님께 받아야
함이 제일 시급합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께로 옵니다.
이 비밀을 받은 자는 눅 9:23,24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성경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보혜사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 분의 지혜를 받게 되면 "네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너는 내 말씀대로
너의 방법은 버리고(네 자신을 부인) 너의 본성을 억제(네 십자가 져라)하라
그리고 나 곧 율법(말씀)을 삼켜라 그리하면 권능 자체이며 하나님인 내가 네 안에
들어가 율법을 지키도록 이끌어 주리라”라고 권면 하십니다.
그리고 자세히 지도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신약의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막 10:27)로 주님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기에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고 롬 12:1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받으시는 영적 예배를 항상 드리는 사람 안에는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16-18)이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어떤 원수도 사랑하게 되며 세상의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요일 2:15-17)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엡 5:2에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향기로운 제물로
십자가에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의 한 부분인
제사법이나 절기적인 의식법이 폐해졌으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오해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추가해서 말하면 인간의 의나 지혜로 알고 있는 즉 '인간이 세운 유전적인 율법은
지키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잘못 오인함으로 인해 주님의 명령이신 주님의 율법을
(마 5:17)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막 7:9,골 2:8, 벧전 1:18)
이러한 예로써 율법주의자들이 주님께 지적 받은 말씀이 막 7:11-13에 있습니다.
이 말씀에 율법주의자들은 "고르반”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벗어난 인간의 유전으로 인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에 의한 악행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 때와 같은 일이 바로 예수님을 주여 주여 부르는 곳에서 크게 자행
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증거해 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율법은 마 7:21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율법)대로 행하여야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쳐 주는 말씀이 마 7:23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법이라는 것은 율법(노모스)을 지키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의 비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으며
고전 9:27에는 자신을 쳐 복종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고 도리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고 하였고 고전 15:31에는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의 법을 지킬 수 없기
에 주님을 안에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자랑할 것
이 있다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갈 6:14)
이 비밀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 7:21의 말씀을 비롯한 마 5:17,18, 눅 16:17,롬 3:31, 7:7,
고전 9:21, 약 1:25, 2:8-12, 4:11...등의 말씀을 들어 사람들에게 전하면 괴롭고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단 괴수 다루듯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소리는 가슴을 후비는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픔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된 자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아프심이기도
합니다. 이 아파하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어둠인 사단에게 흡수되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흡수되면 영적인 눈과 귀가 닫혀서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깨워도 영적인 잠에 취해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둠에 취해 있으면 기름이 없는 등을 가지고 있는 미련한 처녀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혼인 잔치에 들어 가보면 혼인 예복이 입혀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주님의 빛 앞에 밝히 보여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납니다.
그 곳에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 세상에서 사단에게 속았음이 억울해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마 22:11-14, 1-13)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멸망으로 가도록 넓은 문과 넓은 길을 걷게 하는 사단의 정체를
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 자신의 십자가를 왜 져야하는 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 주님을 왕으로 모실 수 있어 주님께서 주시는 권능에 의해
하나님의 법 곧 율법(노모스)을 지킬 수 있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인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마 7:13,14)
그러므로 항상 기름등을 밝힐 수 있어 빛나고 깨끗한 예복이 입혀진 슬기로운
하나님의 예비 신부가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가 되므로 주님 품에 안기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영원히 공급받게 된다고 성경은 오늘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오! 주님! 주님의 크신 사랑이 모두에게 임하게 하소서!
모든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로마서 5장 20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롬 5:20 -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왜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는가입니다.. 율법은 복음이 아닙니다.. 율법은 행위언약이라고 불리우며.. 복음은 약속의 언약 혹은 믿음의 언약이라고도 불이웁니다.. 율법의 내용은... 행위의 규례에 있고.. 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더 말씀드리면.. 신약에서 말하는 법은..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은 한마디로는... 생명의 성령의 법(노모스)라는 것인데.. 둘다 노모스라 하여 동일한 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의문의 글자적인 법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말그대로 어떠한 생명이 그 법인 것입니다.. 글자와 생명이 지향하는 바가 혹 같을지라도.. 글자와 생명은 모형과 그 모형의 실상의 차이처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순신 동상과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형상적으로는 동일하다 할 수 있으나... 동상과 생명체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성경은... 이처럼 율법을 두가지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한편은... 모형과 실상의 측면에선... 전혀 다르다하고.. 다른 한편.. 지향적 관점에서는.. 서로 동일하며.. 모형인 율법은 그림자로써.. 실상을 가리키고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도 성막과 모세의 십계명 기타등등의 규례등등이 있듯이... 이 모형들의 실상도 그와 같습니다.. 가령 성막의 모형으로 대표되는 실상은 어린양 되신 우리 주님이시며.. 규례적인 의문의 실상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은 한편으로는.. 신약을 대변하고.. 한편으로는.. 신약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됩니다.. 이점을 분별해서 봐야 되겠습니다..
히(4:2,6)을 보면 구약의 율법도 복음이죠. 법으로 나눈다면 율법(행위법)과 믿음법 또는 성령의 법으로 구분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