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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름만 되뇌어도 가슴벅찬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그곳을 이번 여름휴가에 다시 찾게 되었다. 호우주의보와 경보의 잦은 뒤바뀜 속에서도 산행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못함은 그 옛날 그곳을 찾았을 때의 여운이 그 감동이 아직도 내겐 잊혀진 듯 하면서도 남아 있었음에 대한 예증이리라 생각된다.
<8월 10일(土)>
아침부터 나를 깨우는 전화기소리에 잠에서 깨다.
기상악화로 지리산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친구의 말에 잠시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일단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15: 00 서울역에 집결하다.
일행은 모두 네명...다들 55리터 배낭에 바리바리 싸들고 ...
연신 비를 퍼붓는 하늘과는 달리 마음은 소풍을 앞둔 어린애 마냥 들떠있기만 했다.
15:50분 서울발 여수행 전라선 열차에 오르고 멀어지는 서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은 여전히 차창에 그 흔적은 남기고 입산금지에 대한 걱정은 친구들과의 여러 이야기 속에 파묻혀 버린다.
무수한 추억들이 전설처럼 떠돌고 있을 그곳으로 우리는 떠나려 한다.
기차는 그렇게 조용히 이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20 : 20
구례구 역에 도착하다.
우리 맞이한 것은 지독히도 퍼붓는 빗줄기... 구례구 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대책회의를 하다. 노고단 산장에서 1박하는 것은 포기하고 화엄사 근처 민박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퍼붓는 비...걱정하는 친구의 목소리...하지만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고 깨끗한 방, 간만에 앉아보는 대나무 평상...너무나 친절하신 아주머니의 넉살좋은 웃음이 저녁 찌개의 입맛 도는 향기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돌여마시는 소주잔 속에 여러 이야기 또한 그 맛을 더해갔다.
옆 팀에서 건넨 파전 ... 그곳은 부산말투를 멋드러지게 써가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전사들이었다. 소금을 빌려주고 얻은 댓가로는 남는 장사였다는 생각을 한다. 술 한잔씩 돌여마셨다면 반죽이 조금 잘못됐다고 말을 해줬을 텐데...아직도 그말을 하지 못한게 못내 아쉽기만 하다.
평상 끝에 맞고 안쪽으로 튀는 물방울들..이토준지의 소용돌이에서 나오던 그 아련한 추억의 모기향...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하던 한때의 모기들... 여전히 빗줄기는 그칠줄을 몰랐다.
<8월 11일(日)>
00 : 55
소주 1.5 리터를 단숨에 비우고..비 내리는 세상 속으로 몸을 맡겼다.
옷이 다 젖는들 그것이 무슨 걱정이랴...목청껏 이 산하에 내가 왔음을 알리려는 듯 떠들어 대다...작은 교각 위에 하늘을 보고 누워 내리는 비를 가슴깊이 끌어 앉았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비가 내게 다가오는 느낌 그리고 조용히 숨쉬고 있는 이 대자연..그리고 사랑스런 친구들, 온통 다 젖었지만 마음은 젖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젖은 몸은 샤워로 마무리 하고 모기장을 치다.
모기장..그 옛날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동료들은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 날의 일이 마치 꿈같았다고 술회했다.
10 : 00
기상호전으로 입산가능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는 급히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어제 먹다 남은 찌게로 대강 아침을 해결하고 등산화를 단단히 매었다.
아직 빗줄기가 멋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마음은 산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민박 집 앞에서 이 곳을 떠나는 아쉬움을 한 장의 사진으로 대신하고 성삼재 행 버스에 오르다. 굽이굽이 휘돌아 나아가는 이 길...저 아래 보이는 안개 쌓인 자연..모두들 얼굴에 미소가 가득이었다.
10 : 40
성상재에 도착 안개자욱한 세상을 내려다 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뿌연 세상이지만 내가 이곳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출발전 사과를 네개 사고 원두커피 한잔 씩을 마셨다.
원두의 그윽한 향이 맘속 깊은 곳까지 전해졌다.
이때 벌에 쏘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걱정과 암모니아 응급처치로 인해 산행에는 무리가 없을 듯 했다.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았고 우리는 그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부분 노고단까지만 오르는 가족단위 사람들이라 커다란 배낭을 짊어 멘 우리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기도 했다. 고생하겠다는 둥 혹은 우리들의 젊음을 부러워하는 눈길도 있었다. 도중에 작은 샘터에서 얼굴을 적셨다. 그 시원함 잊을 수 없으리라.
노고간 대피소까지의 길은 편하긴 하지만 조금은 지루함을 안겨준다.
벌써 부터 지치면 안되는데 조금씩 배낭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11 : 50 노고단 산장 도착
갑자기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이미 빗줄기같은 장애는 우리의 행보를 막을 수 없었다.
라면으로 대강 간식을 해결하고 도중에 먹을 주먹밥을 만들었다. 특별한 꺼리가 없어 밥에 옆에서 빌린 맛소금을 뿌려가며 적당히 만들어 다시 배낭에 넣고 "천왕봉"이라는 첫 표지판 앞에서 발을 옮겼다. 우리의 등반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셨다.비가 더 올거라는 둥...하지만 그렇다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드이어 시작이다!
노고단 정상에서 기념사진 한 장 씩 찍고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발을 내딛었다. 종주의 시작! 하늘도 우리를 축복하는 듯 조금은 가늘어진 빗줄기, 친구의 꽃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자연을 맘껏 호흡하며 걸었다. 이렇게 많은 꽃들의 이름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줄줄이 꿔고 있는 이 친구의 하드용량이 새삼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금껏 무심히 지나쳐온 꽃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수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그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져 있는데 난 단지 '예쁘군'으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꽃은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친구의 강의에 함께 간 여자 동료 한명이 그윽한 눈길을 보냈음에 장가가기 위해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도중에 하나 아는 꽃이 나와서 애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별 반응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난 이제 회 맛만으로 생선의 종류를 맞혀보리라...
15 : 23 노루목
산은...뭐라 형용할 수 없다.
아니 내가 아는 어떠한 말로서 이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 감상의 100분의 1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리라...우리는 아무말 없이 이 자연을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이 기분을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이 장관을 알려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데리고 이 길을 다시 걷는 것 뿐 이었다.
쉬면서 즐기는 한 조각 사과의 그 풋풋함, 벌금 50만원이라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푯말 앞에도 꿋꿋히 한 개피의 담배를 피우는 범법자인 나...이 맛을 뭐라 형용하리...애연가들은 이 기분을 알것이다. 난 산에 갈때 마다 꼭 담배를 피워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입산하기 직전, 하산 후 그리고 산에서도 볼일은 본다. 어쨌든 골에서 올라오는 안개에 휩싸여 담배연기도 하나의 안개마냥 사라져 간다.
이하 시간 생략..
연하천 산장..
늦은 시간..이미 해는 저서 어둠이 바로 배낭 위에 반쯤 걸려 있었다. 내리는 비가 어둠에 쌓여 더욱 을씨년스럽다. 어둠이 주는 공포(?)도 있었을 법 한데...다행히 다들 헤드렌턴을 가져와서 어설픈 귀신흉내 벗삼으며 사진도 찍고 재미나게 이야기도 하며 연하천에 도착했다.
벌써 숙소 배정을 끝내고 우리의 뒤늦은 도착에 사람들은
'고생하셨습니다'
라는 말로 우리의 산행을 위로했다. 콜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아저씨 콜라 네개 주세요...
8천원 입니더...
헉...
결국 두캔만 사서 씨에라에 나눠 마셨다.
내려가면 피티로 사서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피소 안이 아닌 그 뒤 작은 쪽방에 우리의 잠자리는 마련되었다. 이미 도착해있던 부부한팀, 깔깔이를 멋지게 입고 있는 청년 한명, 사진작가 팀 한무더기와 그에 딸린 깍두기 한분, 그리고 우리보다 뒤늦은 아저씨 세분...많은 인원이 자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씩 양보하며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 그날의 메뉴는 꽁찌찌게였다- 커피 한 잔으로 피로를 위로하고 들어와 잠을 청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게 산행 첫날의 밤은 저물어 갔다.
p.s . 사진작가들의 수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는 사람에게도 미안하지 않은지 연신 자기 자랑뿐이었다. 쩝...하지만 이미 잠들기 전 한잔의 소주를 얻어마신 나는 입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걸 마시는게 아니었는데...으으...
<8월 12일(月)>
아침이 밝았다. 비는 여전히 우리를 반긴다. 자욱한 안개너머 이름모를 산새의 살아있음도 느낀다.
우리보다 일찍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산장..우린 아침을 먹고 짐을 꾸리다. 비에 젖어버린 등산화가 서글프다. 조금씩 곰팡내를 풍기기 시작한 우리의 옷들...어차피 젖을건데 하며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입은 우리의 여장부들너머 난 젖지 않은 옷을 꺼내입음이 조금은 미안했다. 내게 마른 옷이 있으니 그것을 입으라는 나의 말에..
네 옷은 작잖아...
헉...
자, 이제 또 시작이다. 오늘의 계획은 장터목산장까지이다. 토끼봉을 비롯해서 조금은 난코스들이 있지만 어제보단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 때 그 나의 숙변..아니 숙면을 방해한 사진작가 무더기가 초를 치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출발하시네요...장터목까진 힘들텐데..."
(ㅎㅎ...여보슈..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자네들보단 이 곳을 많이 찾은 것 같은데 쓸데없는 걱정일랑 카메라 렌즈 속에나 감춰두시구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 어제 한잔의 소주를 얻어 마시지 않았는가! 이 나라의 바른 소리를 위해선 뇌물을 먹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새삼하게 된다.
빗줄기는 멈출지 모른다. 산을 집어 삼킬만큼 쏟아 붓는다. 우비로 인한 더위때문에 차라리 비 맞음을 택한 우리들...
봉우리 마다 내려다 보는 세상은 안개속에 가려 아무것도 그 형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저 아래 펼쳐져 있을 세상...그 세상에서 바라보고 있을 이 곳, 저 아래에선 저 안개너머 이렇게 사람들이 걷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까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또 혼자 생각에 빠짐 - 아!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이 세계의 모든 분쟁을 없앨 수 있는 열쇠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부정할 순 없다. 우리는 저 너머에 감춰진 또 하나의 진실에 귀기울여야 한다...라는 산행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생각을 발걸음 하나하나에 실어 보고 있었다.
벽소령 산장...
그냥 걷는 것이 편했다. 잠시 쉴려하면 찾아오는 추위가 더욱 힘들었다. 벽소령은 우리를 그나마 편안하게 안아주었다. 미숫가루를 물에 개어 행동식으로 준비하고 우리는 하산하는 커플을 만났다.
그 커플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지닌 식량을 모두 줬다. 그것을 거부할 우리가 아니었다. 재낭이 무거워 지리라는 생각은 이 식료품이 우리에게 안겨줄 포만감에 대한 행복너머 사그러 들고 우린 넙죽넙죽 모두 다 배낭에 넣었다.
-육포 한무더기/오징어 채/국화주/소주 한팩/쥐포 여러마리/인스턴트 식품들 약간/천하장사 소시지 몇십개 - 도데체 이 많은 것들을 왜 가져왔을까? 아마도 산에 자주 오지 않은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군 만마를 얻은 듯한 기쁨...가장 군침돌게 만든 것은 국화주였다. 그 그윽한 빗깔하며 향근한 향하며...저녁의 주연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다시 배낭을 꾸려 발을 옮겼다.
빗줄기는 더 이상 우리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나약한 인간의 육체는 그 빗줄기에 쉽게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세석대피소로 접어 들었다. 같은 이유로 전진이 박탈당한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를 반겼다. 먼저 잠자리를 확인하고 우리는 저녁준비를 했다.
깊어가는 여름밤..술이 많지 않음이 아쉬웠다. 국화주로 일차 주연을 끝내고 아쉬움에 술을 더 찾아보았지만 술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려 도대체 나오질 않았다. 우리는 커피와 다과로서 이 밤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정리 후 세석 대피소 홀에 모여 앉았다.
난 사실 이날 밤이 더욱 즐거웠다. 침낭 하나 에 서로 붙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더 친해지게 되었다. 이때......
안내방송...
관리소에서 발씀드리겠습니더,
지금 집중호우로 인해 호우 경보가 발령중입니더.
내일 일체의 등반이나 하산 역시 저희 대피소의 통제를 따라주시길 바랍니더.
이상 관리소에서 말씀드렸습니더.
밤은 깊어가고 10시를 알리는 소리에 사람들은 잠에 들고 유일하게 우리만이 조용조용 이야기 하며 밤을 새하얗게 밝히고 있다. 귀신이야기 자신의 기억 저편에 뭍혀 있던 아련한 추억들, 이번 산행 동안 모여준 서로의 모습들에 대한 평가...10시 전까지 옆에 있던 교회 수련회 팀의 방식마냥 한사람 이야기하고 박수..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우리는 이번 산행을 평가했다. 우리는 서로를 만족해했다. 가히 최강의 팀이었다 해도 손색이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인상쓰고 있으니 그 이외의 말을 할 기회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말은 거짓은 아닌 듯 보였다. 우리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게임, 말 무시하기 게임, 말 못들은 척 하기 게임등을 하며 자정을 넘기고 내일을 기약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모두들 잠든 산은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킨다. 간간히 들리는 잠을 잊은 야생동물의 속삭임, 긴 산행에 지친 이들의 몸에서 나는 이상 야릇한 향기, 정말 칠흙같은 어둠, 그 어둠 한쪽에서 조용히 이 적막을 깨는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설상가상으로 이가는 소리까지...잠을 쉽게 청할 수 없었던 나는 어차피 혀깨물건데 하면서 한개피의 담배를 꺼내들고 밤바람 차가운 대피소 밖에서 한대 피워 물었다.
후우~~
이런생각을 한다.
내가 또 이곳에 왜 왔을까?
그 언제나 대답없는 질문에 또 한번 골몰해보지만 나 역시 답을 기대하지는 않기에 이번에도 생각에 그치고...
손가락으로 퉁겨낸 담뱃불이 한가닥 선을 그리며 빗줄기 속을 飛上한다.
<8월 13일(火)>
아침 몇몇 팀은 몰래 등반을 시도하다 잡혀서 돌아오고 있었다.
"거기 등반 안되입니더. 내려오이소"
아침을 먹고..등반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하산을 아니 탈출을 기도하고 있던 우리에게 날아온 희소식 거림코슬로의 하산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문제...(친구 한명을 백무동 계곡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머리만한 수박에 파란신호등이 붙은 맥주를 사서 기다리마 굳게 약속한 친구였는데...)
"지금 무비(친구 이름입니다..)는 백무동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떡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빨리 내려가서 백무동 쪽으로 돌아가는게 최선이었다.
무릎에 무리를 느끼던 한 친구는 사랑과 정성이 담긴 출처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은 후 조금 편하다 한다. 아마도 우리의 사랑과 정성 이외에 어떤 특별한 성분이 들어가지 않았을 까 추정해 보았지만 사전이 없던 관계로 그 성분을 모두 해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것은 틀림 없다고 다들 생각했다.
우리는 안개 속에 아니 장대비 속에 감춰진 저 어딘가에 있을 천왕봉과의 조우를 다음 기회로 기약하고 이 능선 반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무비와의 조우 역시 몇시간 후로 기약하고 탈출을 시작했다.
등산로는 물바다 였다. 등산로가 작은 냇물이 되어 우린 물속에 등산화를 내맞기고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옆으로 펴쳐진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물안개가 그 거센 소리와 함께 등산로를 전설의 고향 세트 분위기로 만들어 갔다. 여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까워서 화장실에서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마지막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잘 피우지 않던 친구도 이 광경에 감복했는지 나눠피자고 했다. 한가치 담배를 나눠피우며 친구와 난 그리고 나머지 일행은 저마다의 기억을 조금씩 떼어내어 던졌다. 이 곳에 뭍어 두고픈 생각들이 있다. 저마다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아픔들...시원한 물줄기 따라 시원하게도 사라져 갔다.
그리고..우린 그렇게 내려왔다. 내려오자 마자..우리는 반겨준 작은 햇살...처음이었다. 처음이로 햇님을 볼 수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우린 남원터미널에서 컨텍하기로 하고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계곡에서 먹는 점심...제일 먹고 싶었던 시원한 콜라 한잔의 짜릿함...11시 버스였는데 우린 하산시간이 20분이나 넘어 그 버스를 놓치고 그 뒤는 3시 버스...우리는 또 걷기로 결정했다.
"말씀좀 여쭙겠습니다. 진주행 버스를 탈려면 여기말고 또 있나요"
"한 7km내려가면 됩니더...시간 많이 걸릴낀데...그냥 마 여기서 놀다가 3시 버스 타고 가는게 나을낀데예.."
우리에게 7km 행군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를 걸었는데 이쯤이야...고저가 없는 이 평탄한 도로 위를 걷는 느낌은 분명 짜릿한 것이었다.
조금 가다가 우리는 히치를 결심하고 대기하는데 우리 앞에 멈춘 트럭 한대...역시 ..트럭하면 포터였다. 동급최강 포터!
짐칸에 우릴 태운 트럭은 바람을 가르며 나아간다. 바람에 날리는 서로의 모습엔 연신 웃음이었다.
시원했다.
자유로웠다.
너무나 행복했다.
진주행 버스가 다니는 길목에 우릴 내려준 포터는 유턴해서 오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착한 사람....복받을 겁니다, 아저씨...
또 그렇게 걸었다.
드디어 간이 터미널 앞..우린 아이스께끼를 하나씩 입에 물고 여기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다. 우리 앞을 지나가는 승용차 한대..무심결에 손을 흔들었더니 멈춰서는게 아닌가? 오호...
원지까지 우리의 동승을 허락해주신 자갈치 시장의 실력자 아저씨의 등반기를 들으며 우린 너무나 즐거웠다.
원지에서 남원..그리고 남원 추어탕 한 그릇과 소주 한잔에 또 한번 행복해 하며...19시 55분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우리의 산행은 끝을 맺었다.
언제나 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삭막하게만 느껴지는 이 도시, 나를 감싸 안아주던 그 푸른 대자연 대신 나를 포위해오는 빌딩 숲들...하지만 지금의 이 현실이 그리 씁쓸하지 많은 않다.
아직도 남아있는 여운...그것은 지리산이 주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친구들이 모여준 산행동안의 우정에 대한 느낌일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여운은 조만간 천왕봉과의 조우를 위해 또 다시 배낭을 꾸리게 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