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사야서 2,1-5
로마서 10,9-18
마태오 28,16-20
<복음화란 무엇인가?>
‘핵소고지’(2016)는 1945년 일본 오키나와 지방 핵소고지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전투에서 한 미국 위생병이 혼자 75명을 구해내 나중에 명예훈장까지 받게 된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런데 데스몬드라는 이 위생병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이고 이 교회는 안식일인 토요일은 절대 일을 하지 않는 좀 특이한 교파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총을 절대 손에 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들은 다 전쟁에 나가는데 자신만 안 나갈 수 없다며 군에 입대합니다.
총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병사가 전투부대에 입대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같은 부대의 거의 모든 장교들과 부대원들이 그를 내쫓으려 합니다.
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고 전쟁터에서 그 사람 때문에 죽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전쟁에 나가겠다며 재판을 받으면서까지 버팁니다.
결국 전투병에서 자신을 보호할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는 위생병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처절한 전투지인 핵소고지로 투입됩니다.
그는 항상 성경책을 몸에 지니고 남이 때려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아내며 임무를 수행합니다.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어지자 정신없이 후퇴하느라고 핵소 고지에는 약 백여 명의 부상 병사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냥 두면 일본군들에게 모조리 죽는 운명이었습니다.
데스몬드는 자신까지 도망칠 수 없어 밤새 부상병들을 찾아 아군의 진지까지 운반합니다.
일본군들이 득실대는 가운데 그것도 몰래 75명의 부상병들을 혼자서 구한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을 구하고 지쳐 쓰러지면서
“주님, 한 사람만 더 구할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을 구해 결국 75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를 오해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고
그가 없으면 전투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면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가 침묵 중에 그와 함께 기도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미국 최초로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영화 ‘미션’(1986)에 보면 복음화란 명목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미는 거의 천주교를 믿는데 그 이유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선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미에서 지금의 교황님이 나오신 것은 참으로 주님의 섭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교가 곧 복음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교는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사랑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하는 선교는 복음화란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는데 이렇게 두 차원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전교보다는 복음화입니다.
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돕지 못하는 이유는 종교 때문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종교를 믿기에 강도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믿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종교 활동은 하지 않을지라도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당에 미사와 봉사를 위해 나오는 사람들보다 성당에 나오지는 않아도 사랑을 실천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심판하셔 지옥으로 보내신다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무슨 복음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는 것이 민족들의 복음화인 것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은 전철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보려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런 행위가 전교는 될 수 있어도 복음화는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자랑할 때 부모님이 계신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나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사랑해주시지 않으면 자녀가 두 발로 걷거나 말을 배울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부모님이 계셔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사랑하셔서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부모님보다 부모님의 사랑을 자랑해야하듯, 우리도 하느님이 계심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자랑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자랑하는 방법은 그분의 자녀답게 사랑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며,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으며 하는 전교행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전하는 것입니다.
민족들에게 복음화를 이루는 이들은 종교의 우월성을 전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종교가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전해야합니다.
그러려면 가톨릭신자로서 누구보다 사랑이 많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신자는 절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데스몬드 도스가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도록 훈련받은 사람이지만,
아이 때 형과 다투다가 돌로 형의 머리를 쳐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때리고 총으로 위협하는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습니다.
데스몬드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복음화 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몸에 배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폭력적인 상태에서는 누구에게도 하느님을 증거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절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절대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에 사용되는 도구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입대하여 감옥에 갈 상황 앞에서도 절대 총을 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기 복음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위대함을 증거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복음화가 먼저 되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자신이 먼저 사랑이 되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 자신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당신의 사랑으로 복음화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종교보다는 사랑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어야합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