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유태안
관계1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하다.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 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당선소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람들은 수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산다. 그 인연의 끈들 중에는 너무 오래돼 낡아서 끊어져 버린 끈도 있고, 벌써 끊어질 수도 있는 끈을 추억에 비끄러매어 잡고 있는 끈도 있다. 놓쳐버리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끈도 있고, 잡고 있을수록 힘을 주는 끈도 있다.내가 시(詩)라는 한 매듭을 달고 산 20년 동안, 거미줄에 걸린 듯 끊어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적도 있었고, 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것만을 안타까워했던 시기도 있었다.때로는 시에 너무 매달려 삶이 무거워졌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잡고 온 20년 동안의 시가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울했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기쁜 날 아는 형의 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써 온 시를 줄줄이 묶어 혹 시집 한 권 내게 되면/ 책을 텔레비전 받침대로 쓰는 친구에게 꼭 줘야겠다./찌개그릇 받침으로 가끔 쓰는 아내에게도 한 권 주고.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안개 속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다. 그 길을 언제까지나 함께 가 줄 거라고 믿는 친구 권택삼과 이상문 형, 그리고 끝까지 나를 믿어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 주신 이승훈, 이영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독창적 구조 갖춘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한영서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창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이승훈(한양대 명예교수) / 이영춘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