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창근 목사의 신학교 생활 이야기(12)
대학생활은 학교나 기숙사에서만의 생활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학교 밖에는 정겨운 클래식 다방도 있었고, 골수팬들이 마치 미래에 대한 대책없이 늘 대기하기도 하는 듯이 보이는 당구장도 있었고, 닭집과 술집도 있고, 감신의 단골집인 “행자네”도 있었습니다. 행자씨는 저랑 나이가 똑같았고 주인집의 조카뻘이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주인보다 장사를 성실히 잘해서 보너스를 많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좋아하고 다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조카가 당시 여고생이었는데 너무 예쁘게 생겨서 꼬실려고 다니는 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행자씨는 기숙사 오픈 파트너로 오기도 했고, 박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행자 조카 이쁜이는 신학생과 결혼하여 사모가 되었구요.
가끔씩 당구장도 다니긴 했지만, 3번째인가는 경기대 앞의 당구장에 갔다가 당구다이를 찢는 바람에 거금 3만원(당시 1달을 7만원으로 살았는데....)을 물고 충격을 받고, 한동안 안치다가 2학기 중간쯤부터 조금씩 가서 당구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당구는 늘 시합이 되고 없는 살림에 부담이 돼서 잘 못가게 되더군요. 그것보다는 아침에 서점에 책 사러 가는데, 어떤 여자가 브라를 안차고 속이 보이는 옷을 입고 올라오는 것을 본 새로운 충격 이후로 여자에 대하여 조금씩 눈을 떠야겠다고 당구장 벽에 야하게 붙어있는 여자 구경하러 다녔습니다. ㅎㅎ
그러나 무엇보다 인기있는 것은 당시 학교 앞 1층에 있었던 오락실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오락인 테트리스와 갤러그는 문화적 충격이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오락을 처음 경험하였기에 50원을 내고 오락을 하다가 몇 만원을 잃는 아이들도 있었죠. 신학생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일에 익숙한 아이들도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총탄을 피하며 겔러그 끝까지 가는 도통한 아이들이 나타났고, 오락실 사장님은 돈을 주어 보내곤 했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오락실은 빠찐코도 하면서 더 큰 즐거움과 돈날리는 충격을 주곤 했습니다. 정신없이 미쳐서 하다보니 학교 수업료나 기숙사비를 날린 사람도 있을 겁니다. ㅋ
1학기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각종 데모는 끊이질 않았고, 시국도 어수선하며, 기숙사의 소방훈련의 아픈 메아리는 서울의 밤하늘로 퍼져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희한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서울 시청 근처의 한 병원에서 포경수술을 값싸게 해준다고 해서 신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숙사생 중에 많은 이들이 신청을 하고 줄지어 다녀오게 되었는데, 저는 돈이 없어서 구경만 했지만요. ㅎ
당시만 해도 일주일간을 매일 다녀와야 해서 큰 고역이었습니다. 차를 타자니 애매한 장소라 왕복비도 많이 나오니 걸어다니곤 했는데, 걷기에는 꽤 먼거리였죠. 큰 길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데, 거시기에 컵이나 피트병을 잘라 불룩하게 하고서 뒤뚱뒤뚱 학생들이 줄을 맞춰 가는 꼴을 보는 것은 대단히 웃기는 짬뽕이었습니다. 그래도 좋다고 서로들 낄낄 거리며 다녀오고, 이쁜 여자라도 지나가면서 쑥스럽게 바라보면 그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듯 보였습니다.